[설교]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율법
[설교]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율법
  • 글 | 임민철(기쁜소식부산대연교회 목사)
  • 승인 2021.12.20 09: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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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호 기쁜소식
갈라디아서 강해(13편)

 

갈라디아서 3장 23~29절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이 오기 전과 온 후를 구분해 놓았습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갈 3: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 매이고 갇혀 있었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믿음이 오면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율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율법은 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5장에서는 죄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죄가 세상에, 곧 우리 안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죄인이라는 말은 ‘그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죄가 들어왔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죄가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를 끌고 간다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죄를 짓지 않으면 좋겠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언제쯤 죄를 짓지 않고 살까?’라는 마음을 갖습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말씀한 바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느끼는 대로 믿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안에 들어온 죄가 우리를 끌고 간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9~20) 
사람이 죄를 지으려고 할 때도 있지만, 죄를 짓지 않고 선하게 살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우리를 끌고 가서 우리로 하여금 악을 행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선하게 살고 싶어도, 죄가 우리를 악한 길로 끌고 가면 우리는 끌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못나서도, 어리석어서도, 의지가 약해서도 아닙니다. 죄가 끌고 갈 때 우리에게 그것을 이길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우리가 두 가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는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사망 가운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하는 사람에게는 결심이나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줄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구원자가 건져주면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계속 매이고 갇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죄가 사람 안에 들어왔고, 그로 말미암아 사망이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을 쏟으려고 창조하신 인간이 죄에 물들어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먼저 사람 안에 죄가 들어왔으며 그로 말미암아 죽음이 이르렀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우쳐주셔야 했습니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 3:24)
사도 바울이 율법을 몽학선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몽학선생은 옛날에 주인의 어린 자녀를 학교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는 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율법은 잘 지키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자리까지 인도하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천국에 이르도록 인도하는 길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와 사망에 매이고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자신이 죄와 사망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노력으로는 거기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오직 자신을 죄에서 건져줄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이처럼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해서 우리를 구원자인 예수님에게로 데려가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정확히 몰라서 율법을 지켜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있었습니다. 구원자인 예수님을 만나 믿음으로 죄에서 벗어나기 전까지 우리가 율법 아래 있었지만, 예수님을 만나면 더 이상 그 아래 있지 않습니다.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 3:25) 몽학선생인 율법은 할 일을 마쳤기 때문에 우리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
우리가 죄를 다 씻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6~27)
여기에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가 나옵니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과 합하여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까? 그 부분에 대하여 조금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는 장면이 마태복음 3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 3:13~14)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세례 요한은, 아버지 사가랴가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그 또한 서른 살이 되면 자동으로 제사장이 됩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외치며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곳에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러 오셨고,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자신은 예수님의 신발 끈 푸는 것도 감당치 못할 사람인데 예수님이 자신에게 세례를 받겠다고 하니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마 3:15)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네가 나에게 세례를 베풀어서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마 3:16)
여기, 하늘이 열렸다고 했습니다. 그 전에는 닫혀 있었겠지요? 이사야 59장 2절에 보면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이 있었는데, 바로 죄였습니다.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죄의 장벽이 허물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모든 죄가 씻어져서 모든 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죄를 씻기 위해 속죄제사를 드렸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양이나 염소를 끌고 와 안수하여 죄를 넘기고, 그 제물이 죽어 죄 값을 지불함으로써 죄를 사함 받았습니다. 한 사람의 죄를 씻는 속죄제사도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죄를 씻는 속죄제사도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안수해서 죄를 넘기는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이 백성의 대표로 안수해 죄를 넘겼습니다.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레 16:21)
여기 보면, 대제사장인 아론이 속죄제사를 위해 선택된 두 마리의 염소 가운데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해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불의와 죄를 넘긴 뒤 그 염소를 광야로 보냈습니다. 그 염소를 ‘아사셀 염소’라고 불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를 짊어진 염소가 광야 너머로 사라지면 ‘우리 죄가 다 사라졌다’ 하며 자유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인 예수님도 우리 죄를 지고 예루살렘 성 안에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성밖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죄의 장벽이 허물어졌습니다. 제사장인 요한은 인류의 대표로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 11:11) 인류의 대표인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며 안수할 때, 인간의 모든 죄가 예수님에게로 건너갔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이제 예수님과 인간은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광야로 간 아사셀 염소는 그냥 염소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짊어진 염소였던 것처럼,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도 그냥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염소가 갈 때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함께 갔던 것처럼,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우리도 함께한 것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롬 6:3)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5)

우리가 예수님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고, 로마서 6장 말씀대로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했습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우리가 거듭났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이처럼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었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우리 자신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그리스도’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더럽고 추하지만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우리도 함께 못박혔고, 예수님이 장사되실 때 우리도 함께 장사되었으며,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우리도 함께 부활했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 사실을 믿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 믿음을 가질 때 우리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이 됩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든지 상관없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또한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입니다. 하늘의 것들을 받을 자격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렇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노력이나 수고로 복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우리를 율법에서 자유하게 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해주며,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얻게 해줍니다. 예수님은 그냥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고, 다 우리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우리가 못박힌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선하게 살아서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주위에 있는 구원받은 성도들을 보면 그리스도처럼 보이지 않을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눈을 믿지 말고 성경대로 믿고, 성경을 따라서 달려가야 합니다. 곁길로 가고 세상을 향하여 가는 성도가 있다면, “형제(자매)는 이미 그리스도로 옷 입었잖아. 이렇게 사는 것은 거짓된 거야.”라고 하며, 말씀으로 바로잡아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어둡게 살던 성도들이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새 삶을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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