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생각을 따라갔던 나 VS. 말씀 안에 있는 나
[라이프] 생각을 따라갔던 나 VS. 말씀 안에 있는 나
  • 글 | 안현지(기쁜소식원주교회)
  • 승인 2022.01.08 12: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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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호 기쁜소식
보배와 질그릇

 

‘자폐성 발달장애 2급. 초등학교 4학년 이상의 공부는 할 수 없다.’
아들에게 의사가 내린 진단과 함께 가족에게 찾아온 절망이
주님 안에서 축복으로 바뀌었다. 말씀으로 평안을 찾은 어머니와,
약속 안에서 성장한 아들의 간증을 만나본다.

 

나의 어린 시절은 비교적 행복한 그림들이 많이 있었다. 삼척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경찰이셨던 아빠와 직접 선주로 어선을 운영하셨던 대장부 같은 엄마, 그리고 오빠, 언니, 나, 이렇게 다섯 식구가 다복하게 지냈다. 하지만 빚보증으로 인한 부도와 부모님의 불화가 겹쳐서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가족이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강릉에 있는 기숙사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갑자기 달라진 경제적 형편으로 학교생활은 쉽지 않았다. 마음의 위로라도 받고 싶어서 학교 앞에 있는 장로교회에 다녔다. 조금씩 마음의 안정은 찾아갔지만,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점점 답답해졌다. 하나님과 나는 여전히 멀기만 했다. 전도사님이 회개 기도를 하라고 해서 영어 단어장에 죄를 적고 매일 저녁 교회에 가서 회개 기도를 했다.
어느 날 회개 기도를 하고 상쾌해진 기분으로 걸어가는데, 어떤 분이 성경세미나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뵀던 분 같아서 공손하게 인사를 드렸다. 알고 보니, 전에 학교 컴퓨터 선생님의 초청으로 강릉은혜교회(현 기쁜소식강릉교회)에 간 적이 있었는데, 주위에서 이단시하는 바람에 그 뒤로 절대 가지 않기로 했던 그 교회에서 잠깐 만났던 양정학 목사님이셨다. 그런데 그날 우연히 목사님과 성경 공부를 하며 구원을 받았다. 회개 기도로,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내 모든 죄를 이미 씻어놓으셨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히 10:17)라고 하신 말씀을 들으며 죄 사함을 확신했다.
그때부터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하루하루 듣는 말씀이 정말 꿀 송이보다 달았다. 매일 새벽기도에 참석하고, 저녁마다 집회에 참석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진로를 결정해야 할 당시 양정학 목사님은 내가 대학에 가면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없을 것 같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당시에 나는 말씀이 너무 좋았고, 매일 교회에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목사님의 말씀이 심각하게 들리지 않았다. 춘천교육대학교에 입학 후, 신입생 환영회를 시작으로 교수님들과 만나고, 동아리 설명회에 참여하며 너무 바쁜 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때 작은 생각 하나가 올라왔다.
‘야, 춘천교회에서는 아직 너를 모르잖아. 신입생이 모임에 자꾸 빠지면, 앞으로 대학 생활이 힘들어질 거야. 딱 한 달만 있다가 4월부터 교회에 나가는 거야.’
그렇게 미루어진 한 달이 결국 10년이 되었다.
대학 선배와 결혼 후, 우리 부부는 양구에서 부부 교사로서 교직 생활을 했다. 열정을 쏟아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칭찬 교사 상도 받고 교육청의 각종 연수와 일을 도맡아 하는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예쁜 딸과 아들도 얻고, 인생이 계획했던 대로 잘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음의 여유가 조금 생기니까 둘째 민섭이가 자라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허공을 보고 웃고, 한번 울면 무슨 이유로 우는지 원인을 모른 채로 1시간 2시간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걷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혼자 직선거리를 왔다 갔다 반복해서 뛰는 것을 좋아했다. ‘혼자서 무엇이 저렇게 좋은 걸까?’ 궁금했지만 알 길이 없었다. 민섭이를 받아주는 어린이집이 없어서 나는 학교에 간병휴직계를 냈다. 밤마다 민섭이 행동의 원인을 찾으려고 컴퓨터를 뒤지고 책을 보았는데, 알 길이 없었다.
반면, 남편은 학교에서 중책을 맡고 있어서 굉장히 바빴고, 아이들 성장 과정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일상이 싸움과 한숨의 연속이었다. 결국 원인을 찾지 못해 병원을 찾아다녔는데, 1년 6개월이나 걸린 민섭이의 병원 진료 결과는 IQ 50, 자폐성 발달장애 2급, 아무리 교육해도 초등학교 4학년 이상의 공부는 할 수가 없는 불치병이었다. 앞이 캄캄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구나.’
어디서 생빚을 내어 몇억을 가져와도, 무슨 짓을 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 힘이 모두 빠졌다. 그 후 치료에 좋다는 것은 다 해 보다가 모아 놓았던 돈도 다 쓰고, 빚까지 졌다. 내 생각을 따라 온 결과가 그것이었다.

나는 잊었지만, 하나님은 잊지 않으셨다
도저히 민섭이를 포기할 수는 없을 것 같고, 고민하던 마음의 끝자락에 가니까 그제야 하나님이 생각났다. ‘아! 이건 그냥 병이 아니야. 하나님이 나를 찾고 계시는 손길이야. 하나님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하시는구나. 나를 잊지 않고 계셨구나.’ 한없이 눈물이 났다. 하나님을 떠나 10년 동안 그렇게 내 멋대로 살았는데, 내가 하나님이라면, ‘너 같은 거 없어도 나는 하나도 문제 안 돼.’ 하면서 외면할 것 같은데.... 아직도 나를 잊지 않고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마음이 다 무너졌다. 하나님께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남편에게 내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고백하고 교회에 가고 싶다고 했다. 예상대로 날벼락이 떨어졌지만, 민섭이를 포기할 수 없다는 말에 남편도 힘을 잃고 허락해 주었다.
그 무렵 강원도에서도 가장 작은 양구군에 교회가 생겼다. 길을 가다가 ‘양구은혜교회’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낮에는 민섭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사모님과 시골 동네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성경 공부를 했는데, 그 시간이 참 행복했다. 그런데 문득 두려운 마음이 올라왔다. 
‘지금 이렇게 말씀 듣는 것이 행복하고, 전도하는 것이 좋은데... 이런 내 마음도 못 믿겠어. 또 언제 사탄의 유혹을 받아서 내 생각을 따라 교회를 떠날 수도 있어. 어떻게 하지?’
며칠 후, 하나님께서 그런 내 마음을 보시고는 말씀을 주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그제서야 말할 수 없는 평안함이 찾아왔다.

‘정말 말씀대로 되는구나. 말씀이 하나님이시구나’
나는 교회에 돌아와서 마음의 평안을 얻고 행복했지만, 남편과의 사이는 급격히 나빠졌다. 남편은 예수님, 하나님 소리만 들어도 질색했다. 나는 자제해야겠다고 다짐하는데도, TV를 보다가도 시장을 보러 가서 물건을 고르다가도 이상하게 모든 상황이 하나님 이야기로 연결이 되고 나도 모르게 
“하나님이, 예수님이, 박옥수 목사님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남편은 툭하면 나를 ‘안옥수 목사’라고 부르며 나가서 마음대로 살라고 소리쳤다. 남편은 정말 말을 잘하고 논리적인 사람이라 말로는 절대 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난 것이 이메일 편지였다. 나는 일주일에 2~3번씩 이메일 편지를 썼다. 다행히도 남편은 이메일 편지를 읽고 꼬박꼬박 답장해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남편은 마음을 열지 않았다. 이메일 편지 교제를 한 지 6개월쯤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왔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을 보내 주셨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행 16:14)
‘아, 남편이 스스로 마음을 안 열어도 주께서 마음을 여신다고 쓰여 있네. 그럼, 주님께 조르면 되겠네. 그리고 바울의 말을 청종케 하신다고? 그럼 남편이 박옥수 목사님을 만나겠네?’ 정말 신이 났다.
다음 날에는 말씀 테이프를 듣다가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눅 18:5) 말씀을 주셨다. 그때부터 남편에게는 운동하러 간다고 하고 새벽기도에 나갔다.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를 떠올리라고 하면, 나는 지금도 그때를 떠올린다. 하나님께 내 마음을 토하고,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사실이 정말 행복했다.
그리고 2001년 9월, 원주 성경세미나에서 남편이 기적적으로 박 목사님과 만났다. 남편은 그동안 교회 분들의 말을 듣지 않고, 상대방의 말을 분석하고 비판하고 가르쳤다. 그런데 그날은 너무 공손한 자세로 머리를 끄덕이며 목사님의 말을 청종하고 있었다. 구원을 받은 것이다. ‘정말 말씀대로 되는구나. 말씀이 하나님이시구나.’ 멀리서 민섭이를 업고 그 장면을 보는데, 한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민섭이 다 나았습니다. 걱정 마세요”
남편이 구원받고 양구에서 6개월간 신앙생활을 하다가 그다음 해에 원주로 발령을 받았다. 원주에 온 지 몇 달이 지났을 때, 박옥수 목사님이 춘천에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 부부는 민섭이를 데리고 목사님을 만나러 갔다. 목사님은 민섭이에게 기도해주시고, 기도가 끝난 후에 민섭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요 11:4)
“형제님, 민섭이 다 나았습니다. 걱정 마세요. 다 나았어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다. 그리고 그 말씀을 받는 순간 수많은 내 생각과 싸움이 시작되었다. 민섭이의 행동이 이상하게 보이는 내 눈과 싸웠고, 이상하게 행동하는 민섭이와 또 싸웠다. 모든 것을 누나인 혜림이와 똑같이 시키고 안되더라도 끝까지 기다리고 싸워서 이겼다. 민섭이와 나와의 싸움은 항상 100전 100승이었다. 왜냐하면 내게는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 목사님이 전해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더라면 나는 수많은 절망 앞에서 100전 100패 했을 것이다. 그렇게 교회 안에서 말씀 듣고 전도하면서 민섭이는 교회 안에서 자랐는데, 정상 아이들과 같이 똑같이 대소변 가리기, 젓가락 잡기, 연필 잡기, 공부하기, 발표하기 등등 모든 것이 단계별로 이루어졌다. 학교에 들어가서는 수영부에 들어가 강원도 소년체전에서 메달을 휩쓸고, 초등학교 전교 어린이회장에 당선되고, 초등학교 졸업할 때는 장학금과 표창장을 수없이 받았다. 민섭이는 정상, 아니 정상인 친구들보다 더 앞서가고 있었다. 말씀대로 자폐증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일 뿐이었다.

부담을 즐기면서 행복을 찾다
민섭이는 어렸을 때부터 마음을 꺾는 훈련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너무 잘 처리하고 주변 정리도 잘했다. 반면에 다양한 성격의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을 굉장히 어려워했다. 자신의 말이 좀 어눌하다는 열등감과 자폐증을 앓았다는 사실이 스스로를 주눅들게 하는 것 같았다.
고등학교 때는 그런 마음들이 절정이 되어 친구와 폭력까지 쓰면서 싸우는 일이 있었다. 억울한 심정을 참지 못하고 크게 울면서 소리치는 민섭이를 보면서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그것 또한 너무 좋은 일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목사님과 교제를 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민섭이는 복음을 들을 때만 죄가 없다고 하고, 시간이 지나면 또 죄인이라고 했었는데, 그 사건 이후로는 명확하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마음에 분명히 갖고 간증했다.
이후 대학교 및 전공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고민이 되었다. 민섭이는 수학을 좋아했고, 수학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했는데, 남편은 민섭이가 마인드교육 강사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박 목사님에게 민섭이의 진로에 대해 여쭤보았는데, 목사님은 당연히 대학 생활도 잘할 거라며 ‘졸업하면 나에게 다시 와라. 그때 목사님이 뭘 할지 가르쳐 줄게.’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민섭아, 영어 잘하니?” 물으셨다. 민섭이가 “예.”라고 대답하자, “그래, 참 좋다. 영어 공부 잘해라.” 하시면서 어깨를 두드려 주셨다. 그리고 얼마 후, 민섭이는 집 옆에 있는 상지대학교 영어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그리고 목사님의 기대대로 모든 부담을 즐기면서 당당히 과에서 상위 세 번째에 들면서 대학 생활을 하고 있다.

미국으로 간 민섭이, 그리고 다시 만난 다섯 가족
1년의 대학 생활을 마치고, 민섭이도 단기선교를 지원했다. 민섭이와 우리는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에 있는 나라로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곳에서는 실수하거나 말을 잘 못해도 아시아인들에게 우호적이니까,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교회 심부름으로 기쁜소식강남교회에 갔다가 박 목사님의 사모님을 우연히 만났다. 민섭이가 단기선교를 가려고 한다고 말씀드리니까, 사모님이 ”아! 그래? 미국으로 가. 미국 좋아.”라고 하셨다.
우리 생각과 다르게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민섭이를 미국으로 보냈다. 민섭이는 CLF 홍보 활동 중에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감을 찾았다. 선교사님들이 민섭이 활동사진을 보내주실 때마다 정말 감사했다.
그즈음에 선교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미국의 학교에 마인드교육을 설명할 기회가 왔다면서, 미국 CLF 때 교사인 민섭이 아버지가 직접 와서 민섭이와 함께 마인드교육을 하면 좋겠다고 하셨다. 너무 좋았지만, 교사 복무 규정상 학기 중에는 외국에 나갈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코로나가 터지면서 CLF는 취소되었고, 한국의 학교는 개학이 무기한 연기되어 오히려 미국에 갈 수 있었다. 미국에 가서 민섭이와 함께 워싱턴, 애틀랜타, 올랜도, 맨해튼을 돌면서 간증 집회를 했다. 막내 은섭이가 올랜도에서 유학하고 있던 터라, 우리 가족은 오랜만에 완전체를 이루어 함께 너무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말씀 안에 있는 나
지난 12월에는 학교에서 아이들과 감사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는 활동을 했다. 나도 나의 삶을 돌아보는데, 내 생각을 따라갔던 나와 말씀 안에 있던 내가 보색이 대비되듯이 너무 달라져 있었다. 내 생각을 따라갈 때는 처음에 뭔가 잘 되는 것처럼 느껴지다가 결국에는 다 망했고, 말씀 안에 있을 때는 어렵고 잘 안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내 생각 안에서는 부부 교사로 두 사람의 월급을 모으고 저축해도 민섭이의 병원비로 빚만 졌는데, 교회에 돌아온 후로는 단 1원도 저금하거나 보험을 든 적이 없는데 너무 좋은 집에 좋은 차를 갖고 살고 있다. 민섭이의 마음을 꺾고 자제력을 가르치며 키우다 보니 큰아이와 막내까지 함께 분위기를 흘러 받아서 교회 안에 마음의 뿌리를 두고 예쁘게 잘 자라주었다.
작년부터 코로나19로 세상이 절망과 어둠에 싸였는데, 하나님은 그 위기를 뒤집어서 오히려 우리의 마음이 자라는 기회로 만드셨다. 2020년에는 매일 저녁 박옥수 목사님의 마인드 강연을 듣고, 2021년에는 전국연합 온라인 기도회에 참석하면서 너무 행복했다. 제일 크게 남았던 부분은 박 목사님의 마음이 바뀌게 된 순간이었다. 목사님은 1962년에 자기 생각을 믿지 않는 지혜를 얻으셨는데, 나는 10년의 고통을 받고서야 마음에 선이 그어졌다. ‘내 생각을 믿으면 나는 망할 수밖에 없어.’
그리고 복음이 온라인으로 온 세계에 전해지는 현장을 볼 때마다 신기했다. 더 감사한 것은 목사님과 교회의 마음을 따라갔더니 나에게도 많은 부스러기가 떨어졌다는 것이다. 기쁜소식원주교회 집회 때 화상앱 줌과 현장 예배를 동시에 진행했는데, 청년 온라인 모임에서 민섭이가 간증했다. 동료 선생님들에게 민섭이의 간증을 들으러 오시라고 권유했는데, 그동안 교회에 오는 것을 꺼렸던 선생님들이 줌으로 들어와서 듣다가 마음을 열고, 복음을 들으셨다. 현장에 올 수 없는 학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친정 언니도 줌 소회의실에서 1:1 개인 교제를 했다.
내 생각은 오늘도 나에게 속삭인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할 자격이 없어. 교만하고, 육신적이고, 교류도 못 하고....’
하지만 뒤따라오는 말씀이 항상 내 생각을 이긴다.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 3:6)
나를 이끌어 말씀 안에 있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산더미 같은 부담이 
오늘도 저를 자라게 합니다

 

글 | 이민섭(기쁜소식원주교회)

내 삶은 부담의 연속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던 가족부터, 친구들과 선생님, 그리고 교회 식구들까지 모두 내가 넘어야 할 크고 작은 산이었다. 나 혼자 있고, 나 혼자 생각하고, 나 혼자 웃는 것이 편안하고 좋은데 모두 왜 그렇게 나를 내버려 두지 않는지 이해가 안 가고 화가 날 때도 많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에야 조금 깨달았다. 내가 싫어하고 피했던 많은 사람이 마치 다 쓰러져가는 나무를 잡아주는 버팀목처럼 나를 키워주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대학 생활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잘하는 것도 없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여전히 부담스럽지만, ‘나를 지켜주시는 예수님이 계시니까 대학 생활도 문제없어.’ 하며 신입생 환영 모임에서 나를 소개하기도 하고, 조별 과제를 발표하기도 했다. 공부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가장 어려운 것은 친구를 사귀는 것이었다. 모르는 사람에게 내가 먼저 말을 거는 것이 너무 큰 부담이었다. ‘하나님, 저에게 친구를 주세요. 함께 밥을 먹고, 대화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친구를 만들어 주세요.’ 그리고 며칠이 지나 한 친구에게 용기를 내어 다가가 말을 걸었고,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같이 단기선교를 가기로 약속했는데, 친구 부모님의 반대로 가지는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그 친구를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2020년에 나는 미국으로 단기선교를 갔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곳에도 나를 이끌어 줄 교회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어느 날, 선교사님이 CLF를 홍보하러 나가면서 내가 자폐증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나를 무시할 것 같아 너무 싫었지만, 억지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내가 영어로 더듬거리며 하는 이야기를 듣고 많은 분이 정말 감동받아서 대단하다며 칭찬해주고, CLF에 마음을 여셨다. 내 생각과 달랐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니까 내가 부족한 것도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19로 인해 외부 활동을 하지 못해 답답했다. 하지만 온라인으로 한국어 클래스 외 많은 행사를 준비했다. 그것 또한 나에게는 부담이었다. ‘한국 사람인데도 한국말을 유창하게 못 하는 내가 뭘 가르칠 수 있어?’라는 생각에 또 팀원들을 힘들게 했다. 선교사님은 내가 못한다는 생각에 갇힌 것은 부족함을 깨달아 은혜 입으려는 마음이 아니라, 내 마음만을 크게 생각하는 교만한 마음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듣고 보니 나는 정말 교만한 사람이었다. ‘부족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아. 마음 낮추고 배우면 되지.’ 그렇게 나는 또 부담을 넘고 도전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어서 지금도 많이 생각난다.
2021년에는 학교에 복학하여 온라인으로 수업을 들었다. 학교 공부가 점점 어렵고, 모르는 용어들이 많이 나와서 헤맬 때도 많고, 조별 토론이나 보고서 작성도 내게 큰 부담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교수님에게 묻고, 이해가 될 때까지 다시 질문한다. 교수님은 그런 내 수업 태도에 감동하였다고 하셨다. 교회에서는 청년들과 ‘리플라이 코리아’ 캠프를 1년 동안 함께 운영하고 있다. 한국어 클래스 콘텐츠를 찍기도 하고, 2주에 한 번 온라인으로 각국 친구들을 만나 한국 노래도 가르치고, 복음도 전한다. 나는 지금도 하루하루가 부담의 연속이다. 하지만, 이제는 부담을 절대 피하지 않는다. 부담은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놀이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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