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설교]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 글 | 임민철 (기쁜소식부산대연교회 목사)
  • 승인 2022.02.14 09: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22년 2월호 기쁜소식
갈라디아서 강해(15편)

 

갈라디아서 4장 8~20절
신앙은 우리가 신실하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미 이루어 놓으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다 씻어 놓으셨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실제로 죄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미 죄에서 자유롭게 하셨는데, 그 사실을 알지 못해 자신이 죄에 묶여 있다고 여기고 말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그 사람을 죄에 묶여 있는 데에서 풀어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풀려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당신의 죄가 십자가에서 이미 다 씻어졌으니 이 사실을 받아들이면 당신은 의롭고 온전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그와 같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무언가를 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가 믿음으로 살도록 이미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어 놓으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면 믿음대로 우리가 그 길을 걷게 됩니다. 

우리를 이미 온전하게 하신 하나님 
성경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하게 해놓으셨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했을 때 우리가 죄에 매이고 율법에 종노릇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갈 4:8)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히 10:9)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오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둘째 것을 세우기 위해 첫 것을 폐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첫 것’은 율법을 따라 속죄제사를 드리는 것이고, ‘둘째 것’은 예수님이 제물이 되어 우리 죄를 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씻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다 씻었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믿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이미 거룩하게 온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 ‘아, 내가 거룩하고 온전하구나!’ 합니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믿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도가 거룩하고 온전하다는 말은 자신이 거룩하고 온전하게 살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를 거룩하고 온전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였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믿음이 있습니까?”라고 물을 때, 자신이 어떠한지 자기를 살피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다시 종노릇하려 하느냐?
예수님이 우리 죄를 씻어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구원받은 뒤에도 여전히 하나님이 아닌 것에 종노릇하던 이전처럼 살려고 했습니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갈 4:9)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이 아십니다. 구원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 것입니다. 자녀라면 하나님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종처럼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성도를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게 만드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입혀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성도에게서 예수님이 나타납니까, 자신이 나타납니까? 나타나는 것을 보면 대부분 성도 자신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나는 나지, 내가 무슨 그리스도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 저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는데 왜 그리스도가 나타나지 않고 제가 나타납니까? 하나님, 이래도 제가 그리스도입니까?”라고 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자기 마음을 따라서 살아버립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미 자녀로 만들어 놓으셨지만, 그 사실을 정확히 몰라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 종노릇하며 사는 것입니다. 

‘열심히’가 아니라 온전하게 된 것을 믿는 믿음으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어찌하여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것들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은 율법을 가리킵니다. 율법의 핵심은, 내가 열심히 해서 복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고도 마음의 방향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지 못하고, ‘내가 열심히 해야 한다’는 데에서 떠나질 못합니다. 
사람들이 “가만히 있으면 떡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라고 말합니다. 하다못해 땅이라도 파야 뭐가 나옵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우리 어머니에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말이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는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아, 저녁 8시쯤 되면 어머니가 “아이고, 내가 죽어야지.” 하며 주무셨습니다. 그리고 새벽 3시쯤 일어나면서 버릇처럼 하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소리가 귓가에 쟁쟁합니다. “내가 안 하면 누가 하냐?” 그리고 종일 땡볕에서 일하셨습니다. 
신앙생활도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안 하면 누가 전도하겠어요?” 그러나 신앙생활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전도하지 않는 것이 신앙인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미 온전케 하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복음의 일을 하게 하고, 복음을 전하게 합니다. 
우리 교회의 어느 전도사님은 우리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굿뉴스신학교에 절대로 가고 싶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신학교에 안 가도 되니 박옥수 목사님을 한 번만 만나 봐라. 그 후로는 아무 말 않겠다.”라고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목사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자네는 왜 신학교에 들어오려고 하지 않는가?”
“저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고, 복음 전도자로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
“자네, 운전할 줄 알지? 차를 몰고 광주까지 좀 다녀오겠는가?”
“가고 싶지 않습니다.”
“갔다 오면 1억을 준다면 가겠는가?”
“그러면 열 번이라도 가죠.”
서울에서 광주까지 운전해서 갔다 오는 것은 분명히 피곤한 일입니다. 그런데 1억 원을 준다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피곤한데 안 피곤합니다. 거리가 먼 것도 문제가 안 됩니다. 목사님이 그 전도사님에게 신학교에 들어오면 1억 원보다 더 큰 것을 주겠다고 하셨고, 전도사님이 그 말에 감동을 받아 신학교에 입학해 복음 전도자가 되었답니다. 
서울에서 광주까지 운전해서 갔다 오는 것을 피곤해하는 사람에게 
“뭐가 피곤해?”, “멀기는 뭐가 멀어?”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좋은 것을 주어야 합니다. 먼길을 운전하면 피곤한 게 맞지만 1억 원을 준다면 서로 가려고 할 것입니다. 한 번 다녀온 사람에게 다시 가라고 해도 갈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그와 같습니다. 전도하고 기도하고 봉사하는 것이 마음에서 즐겁고 행복하면 누가 하지 않겠습니까? 서울에서 광주에 다녀오면 
1억 원을 준다고 하면 가고 싶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라면 왜 무엇이든지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인 우리를 반드시 도우실 텐데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는 로마서 8장 31절 말씀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히 나아가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합니다. 어려움도 있지만 그 길을 다시 가라고 해도 갑니다.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에는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게 종노릇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는데 왜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에 종노릇하려 하느냐?’고 했습니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 4:10~11)
율법을 지켜서 의를 얻으려고 하는, 하나님이 아닌 율법에 종노릇하려 하는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갈 4:12)
바울은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고린도전서 9장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 9:20~22)
사도 바울은 자기 모양이 없었습니다. 유대인을 얻기 위해서는 유대인처럼, 약한 자를 얻기 위해서는 약한 자처럼 되었습니다.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자기를 버리고 여러 모양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이방인처럼 되었고,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그런 바울을 마음으로 영접했습니다. 바울에게 육체의 약함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천사처럼, 예수 그리스도처럼 영접했습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갈 4:14)
그뿐 아니라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바울을 위하려고 했습니다. 바울이 눈이 안 좋았던지, 15절에서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안경이 없었던 때니까, 눈이 나쁜 바울을 위해 자신의 눈이라도 주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무시하려고 하면 무시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자기를 버리고 그들과 같이 되어, 그들을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이끌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들은 바울을 예수님처럼 섬겼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 싶으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처럼 자신을 버리고 사람들을 위해 어떤 모양이든지 되었던 사도 바울의 삶이 정말 복되고 아름답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라디아 교회가 이처럼 아름답게 시작되었지만 변질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향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마음도 변했습니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갈 4:16~17)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초등 학문에 다시 종노릇하려고 하는 그들을 위해 사도 바울이 애타는 심정으로 말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
구원받아 예수로 옷 입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다시 종의 길을 가려고 했던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 사도 바울은 그들을 위해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잘해야 복을 받는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진 자녀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어, 그 사실이 그들 마음에 이루어지기까지 수고하겠다고 했습니다. 잘못된 신앙의 길로 들어선 그들을 다시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그들의 문제를 바울이 다 떠안겠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7절에서, 성도를 인도하는 이에 대해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도 그들과 같이 되었고, 그들이 잘못된 길로 갔을 때에도 자신의 일로 받아들여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 마음으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고, 사랑이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