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나는 복음 전하는, 행복한 사람
[라이프] 나는 복음 전하는, 행복한 사람
  • 글 | 박옥수(기쁜소식강남교회 목사)
  • 승인 2022.02.22 11: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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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호 기쁜소식
땅끝까지 복음을, 끝날까지 주님과 _265회 | 박옥수 목사 간증

 

 

사도행전 8장에서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가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그 전에 스데반이 죽임을 당하고, 사울이 교회를 잔멸하려고 각 집에 들어가 예수님을 믿는 남녀를 끌어다 옥에 넘겼다. 아주 위급한 상황에서 빌립이 예루살렘을 떠나 사마리아에 이르렀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빌립이 생각했다. 
‘이곳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마리아구나. 그러면 주님 말씀대로 이곳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심하게 핍박하니 위험하겠구나. 어떻게 하지? 아니, 주님이 말씀하셨으니 주님이 반드시 도우실 거야. 그래, 우리는 주님 말씀대로 해야 해.’
그래서 빌립은 사마리아 성에 들어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복음을 증거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빌립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었다. 사람들이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빌립이 말하는 것을 마음으로 좇았다. 

말을 거의 하지 않고 웃기만 하던 청년 황영목
나는 선교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뒤 경남 합천군 압곡동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 1964년 초부터는 거창 장팔리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토·일·월 3일은 장팔리에서 지내고, 화·수·목·금은 압곡동에서 지냈다. 압곡동에서 거창까지는 17km, 장팔리까지는 약 20km쯤 되었다. 그렇게 지내다가 4월에 장팔리로 이사를 갔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너무나 감사하다. 장팔리에는 예배당 건물만 있고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에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여자 아이 둘이 교회에 나왔다. 며칠이 안 되어 길에서 심재열, 김종용 두 청년을 만나 복음을 전해 두 사람이 구원을 받았고, 이어서 사람들이 계속 구원받았다. 
장팔리교회 예배당은 거창에서 ‘곰실’이라는 마을로 들어가는 도롯가에 있었다. 하루는 교회 앞으로 한 청년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내가 불러서 전도했다. 그 청년은 이름이 황영목이었다. 그 후에도 몇 번 복음을 전해, 얼마 뒤 그가 구원을 받았다. 정말 감사했다. 그런데 이 청년은 말을 거의 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구원받았으니 이제 주일 예배에 참석하라고 했을 때에도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알고 보니, 그 청년은 곰실 마을에 있는 어느 집의 머슴으로 있어서 주일에 교회에 올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라고 이야기하며 교회에 오라고 했다. 그래도 그는 웃기만 하지 대답이 없었다. 

불바다가 된 곰실 마을의 그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장날에 곰실 마을에 불이 났다. 어른들이 대부분 장에 간 상태에서 온 동네가 불바다가 되었다. 나는 급히 곰실로 뛰어 올라갔다. 동네가 불길에 휩싸였고, 아이들과 여자들의 울음소리만 들렸다. 집집마다 땔감으로 쓸 소나무 가지를 집채처럼 쌓아놓아서 불이 아주 잘 옮겨붙었다. 
나는 정신없이 집집마다 다니며, 무엇보다 양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집에 있는 양식들을 불이 붙지 않는 마당으로 모두 옮기기 시작했다. 이 집 저 집 뛰어다니며 양식들을 마당 한가운데로 옮겼다. 그러다 어느 집에 들어가니 집주인인 50대 아저씨가 있었다. 그런데 그분은 정신이 나가 있었다. 나를 보더니 “물, 물, 물, 물.” 했다. 옆에 있는 곡간으로 뛰어가 문을 열자 거기에 벼가 잔뜩 쌓여 있었다. 마침 옆에 가마니가 많이 있었다. 나는 “아저씨, 이리 와요!” 하고 정신이 나가 있는 아저씨를 부른 뒤, 가마니를 잡으라고 하고 벼를 퍼서 가마니 안에 부었다. 열 가마니쯤 되는 벼를 마당에 내놓아 불에 타지 않게 했다. 
나는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양식들을 옮기다가 너무 지쳐서 쓰러졌다. 그때 읍내에서 마을 사람들과 학생들이 곰실로 몰려왔다. 동네가 이미 불에 다 탄 뒤였다. 겨울이라 얼음이 얼어 물을 구할 수 없어서, 사람들이 먼 곳에 있는 연못의 얼음을 깨고 그 물을 날라 남은 불들을 껐다. 그날 신문기자가 곰실에 취재하러 와서 내 사진이 기사와 함께 처음으로 신문에 났다. 
며칠 뒤, 불이 났을 때 정신이 나가 있었던 아저씨가 담배 두 갑을 사가지고 나를 찾아왔다. 그 아저씨가 바로 황영목 형제가 머슴으로 일하는 집의 주인이었다. 나에게 고맙다고 하며 담배를 주면서 피우라고 했다. 
“아저씨, 저는 담배를 못 피워요. 그 대신 영목이가 일이 바쁠 때에는 일하고, 일이 없는 날에는 교회에 오게 해주세요.”
내 부탁을 듣고 아저씨가 그렇게 해주겠다고 했다. 그 후로 황영목 형제가 늘 오지는 못했지만 한 번씩 교회에 나올 수 있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일하신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일
장팔리에서 지내는 동안 한 사람 한 사람 구원받는 것을 보면서 너무나 감사했다. 지금도 생각하면 그때가 그립다. 구원받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더해지면서, 가난해서 자주 굶기도 했지만 그때가 제일 좋았다. 
내가 1964년 4월에 장팔리로 가서 1965년 10월까지 약 1년 반 동안 그곳에서 지냈다. 그때 우리는 매일 저녁 교회에서 모였다. 목이 터져라 찬송을 부르고, 한 사람 한 사람 돌아가면서 간증을 했다. 그러고 나서 내가 성경 말씀을 전했다. 말씀을 마치고 기도회를 가진 뒤 우리는 전부 거창 읍내로 갔다. 형제들이 타고 온 자전거와 내 자전거에 사람들을 태울 수 있는 만큼 태우고 함께 이야기하면서 읍내로 갔다. 그렇게 형제 자매들을 데려다준 뒤, 나는 어두운 밤길을 혼자 자전거를 타고 교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주일이 되면 형제 자매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예배를 마치면 모두 경찰서 유치장으로 가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5일마다 서는 장날이 되면 시장에 가서 노방 전도를 했다. 그렇게 지냈던 그 시절이 지금도 너무 그립다. 

나는 압곡동에서, 장팔리에서, 군대에서, 그리고 제대한 뒤 김천에서, 또 대구에서 매일 복음을 전했다. 그 사이에 결혼해 1972년에 딸을 낳고 1974년에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1976년에 대구에서 선교학교를 시작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내 나이가 많고 내가 늙었다. 그래도 매일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다. 
내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사람들이 구원받을 때 그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복음을 전하는 동안 배가 고플 때도 있었고,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요즘도, 구원받은 사람이 왜 복음을 전하지 않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지만 한 사람 한 사람 구원받으면 행복해진다. 복음 전하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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