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 와서
[설교]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 와서
  • 글 | 박옥수(기쁜소식강남교회 목사)
  • 승인 2022.03.19 21: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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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호 기쁜소식
믿음에 이르는 길_레위기 제사 강해 제4권 속죄제 2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
레위기 4장에 나오는 속죄제에서, 속죄제사를 드려 죄를 사함 받는 사람이 되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만일 평민의 하나가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다가 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 그는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 와서 그 범한 죄를 인하여 그것을 예물로 삼아”(레 4:27~28)
여기에 속죄제사를 드리려고 하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는 첫 번째로 죄를 지어야 하고, 두 번째로 지은 죄에 대해 깨우침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이 죄를 깨우침 받으면, 그때부터 그 죄가 마음 안에 살아서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죄를 지어도 깨우치지 못할 때에는 그 죄가 죽어 있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자신이 잘못한 일을 모르고 지나칠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는 그 일이 우리 마음에 아무 영향도 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지내다가 나중에 자신이 잘못한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우리 마음에서 살아 역사합니다. 염려와 근심을 가져다주고 두려움도 가져다줍니다. 죄를 깨우치면, 그 죄가 사해졌다는 확신이 오기 전까지는 우리 마음 안에서 살아 역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해 속죄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죄를 사함 받는 이야기는 ‘죄를 지었고, 그 죄를 깨우침 받은’ 사람에게 해야 합니다. 농부가 씨를 길에 뿌리면 아무리 좋은 씨라도 싹이 나지 않습니다. 자갈밭에 씨를 뿌리면 싹이 났다가 뿌리를 내리지 못해 말라버립니다. 가시밭에 뿌려도 열매를 거두지 못합니다. 씨는 옥토에 뿌려야 합니다. 아쉽게도 마음이 옥토 같은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길처럼 단단하거나, 자신이 옳다는 마음, 잘났다는 마음 등이 속에 자갈처럼 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마음이 죄로 물들어 있는 것을 본다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앞에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입을 다물고 우리 죄를 씻으신 예수님을 마음에 받아들일 것입니다. 교회에 찾아오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마음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마음이 죄로 인해 더러우면서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조차 똑똑하고 잘난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깨달은 사람은 그 죄를 해결하지 않고는 결코 쉴 수 없기에 예수님 앞으로 옵니다.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 와서 
성경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사망이 지불되어야 죄가 해결됩니다. 그래서 속죄제사에서 죄를 지은 사람이 그 죄에 깨우침을 받으면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 성막으로 갔습니다. 
“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 그는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 와서 그 범한 죄를 인하여 그것을 예물로 삼아”(레 4:28)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죄를 깨달은 후 하나님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빕니다. 가책과 통회 같은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지은 죄에 대해 아무리 뉘우치고 괴로워해도 죄를 사함 받지 못합니다. 마음에 여전히 죄가 남아 있어서 신앙생활에 자유가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죄가 있으면 그 값으로 죽음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슨 방도로도 죄를 사함 받을 수 없습니다. 레위기 4장은,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 그 사람은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 오라고 합니다. 죄의 삯을 지불할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입은 옷과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옷
성경에는 죄의 삯을 지불함으로써 죄를 해결하는 이야기가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가죽 옷’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뱀의 말을 받아들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신들이 벌거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것에 대해 책망하신 뒤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영靈의 세계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물질세계를 통해서 영의 세계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과 가죽 옷도 사람들이 마음에서 입고 있는 옷을 나타내 주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 나이 많은 사람과 젊은 사람, 키가 큰 사람과 작은 사람…. 이 모든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 부류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고, 한 부류는 가죽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전 선악을 아는 지혜가 없었을 때에는 벌거벗고 있어도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선과 악을 아는 지혜가 생기면서 자신들이 벌거벗은 것을 알았고, 그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 옷은 부끄러움을 가려 주는 것 같다가 햇빛을 받으면 점점 말라서 부서져버렸습니다. 그러면 다시 만들어 입어야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기 바빴습니다. 
오늘날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처럼, 하나님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면 죄가 가려지는 것 같다가 또 드러나고, 다시 가리면 또 드러납니다. 그 사람은 평생 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죄가 드러날까 봐 늘 전전긍긍하며 죄를 가리기에 바쁩니다.
하나님은 부끄러운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담과 하와를 위해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가죽 옷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과 달리 부서지지 않기 때문에, 한번 입으면 부끄러움이 드러날까봐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날 가죽 옷을 입은 것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이 영원히 가려져서 다시는 죄 때문에 염려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와 가죽 옷에는 큰 차이점이 또 있습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는 인간이 만들었고, 가죽 옷은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인간이 만든 옷은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늘 수고해야 하며, 아무리 수고해도 온전한 쉼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옷은 온전합니다. 그뿐 아니라 인간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가죽 옷은 입기 위해 수고롭게 일하지 않아도 되고, 또한 온전하기 때문에 참된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신앙이 이처럼 두 부류로 나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려고 애쓰지만 마음에서 쉼을 누리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지만 마음에서 안식을 누립니다. 삶에 문제나 어려움이 닥칠 때 자신이 해결하려고 풍랑을 헤쳐 나가듯 괴롭게 노를 젓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편히 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이 일하는 것과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세계를 알지 못해 자신이 일하려고 합니다. 
죄를 해결하는 것도 인간이 하는 것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간음하고 도둑질하고 거짓말하고, 이런저런 죄를 지었다고 해봅시다. 그 죄를 여러분이 씻으려고 하는 것과 예수님이 씻어 주시는 것이 비교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죄를 자신이 씻으려고 울며 죄를 고백합니다. 산에 올라가거나 금식하면서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자신이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쓰고, 자신이 죄를 씻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를 입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온전해지거나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성도聖徒’는 ‘거룩한 무리’라는 말로, 성도의 자리에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조금도 남김 없이 다 씻어져서 온전히 깨끗해졌을 때 비로소 성도라고 일컬음 받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드는 것처럼 자신이 죄를 씻기 위해 애쓰는 사람은 절대로 성도라고 일컬음 받을 수 없습니다. 

가죽 옷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위해 만들어 입히신 가죽 옷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가죽은 어떤 짐승을 덮고 있던 것으로, 그 짐승의 생명을 지켜 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가죽을 얻기 위해 양이나 염소에게 “네 가죽을 좀 빌려 줄래?” 하고 가져오실 수는 없습니다. 양이나 염소를 죽이지 않고는 가죽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가죽 옷은 한 짐승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옷입니다.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를 대신해 한 생명이 피를 흘려 죽고 그 가죽을 제공해 줌으로써 그들의 수치를 가려 주었던 것입니다. 
속죄제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범한 죄의 값을 누가 지불하느냐입니다. 다시 말해, 죄를 씻기 위해 누가 사망을 당하느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지은 죄의 값을 지불할 제물이 필요했고, 그 제물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인간과 똑같은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게 하셨고,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고 죽게 하셨습니다. 인류가 지은 모든 죄의 값을 예수님으로 하여금 치르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그냥 못 박히신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이 지은 죄의 값을 지불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뜻이었고, 하나님은 그 뜻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사람들에게 미리 가르쳐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그들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한 짐승의 죽음으로 아담과 하와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레위기 4장에서 “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 그는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 와서 그 범한 죄를 인하여 그것을 예물로 삼아”(레 4:28)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죄를 깨달았을 때에는 그 죄를 자신이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대신 죽어줄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 와야 합니다. 우리가 지은 죄의 값을 대신 지불할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십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이 죄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의 허물을 가리려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죄에 물든 자신을 조금도 새롭게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노력이 끝나고, 가죽 옷을 지어 아담과 하와에게 입히신 하나님이 일하셔야만 우리가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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