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형제가 범죄하거든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고
[설교] 형제가 범죄하거든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고
  • 글 | 임민철(기쁜소식부산대연교회 목사)
  • 승인 2022.07.13 1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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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호 기쁜소식
갈라디아서 강해(20편)

 

갈라디아서 6장 1~10절
성도가 성령을 따라 살지 않고 육체를 따라 살면 때로 범죄하게 됩니다. 그런 일이 있을 때 교회 안에서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소상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발견함으로써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형제가 잘못한 것이 드러나면 온유한 마음으로 그 사람을 바로잡으라고 했습니다. 온유하다는 말은,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향하여 은혜를 베푸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부모는 자녀의 허물을 자신의 허물로 여깁니다. 자녀가 잘못하면 “제가 잘못 키웠습니다. 제가 잘못 가르쳤습니다. 제 잘못입니다.”라고 합니다. 부모 마음에 온유한 마음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형제가 범죄한 것이 드러났을 때 먼저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잡으라고 했습니다. 다음으로, 자신도 죄에 이끌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마 7:3~4) 티는 아주 작은 것이고 들보는 집의 뼈대를 이루는 큰 나무입니다. 티와 들보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형제에게 있는 작은 허물이나 약함이나 잘못을 드러내서 “너, 왜 그래? 구원받은 사람이 그럴 수 있어?”라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자기 눈 속에 들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에 범죄한 사람이 있으면 온유한 마음으로 그 사람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잘못한 사람에게 “너, 왜 그래? 앞으로 그러면 안 돼!”라고 나무라서 바르게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잡으라고 했습니다. 또한 자신도 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죄에 끌릴까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이 자신을 돌아보아 
‘나도 얼마든지 잘못할 수 있구나’라는 마음을 갖는다면 자신에게 자랑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발견함으로써, 겸비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섬기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 이처럼 온유한 마음이 흐를 때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견고하게 자라 교회가 든든히 선다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 약한 자, 천한 자, 멸시받는 자, 없는 자였던 우리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 1:26~28)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미련한 자, 약한 자, 천한 자, 멸시받는 자, 없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바울 당시뿐 아니라 오늘날도 하나님이 부르신 이들은 대부분 약하고 천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누가 거룩하다고 하고 온전하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당신의 사랑과 능력으로 의롭고 아름답고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9)
사람들은 어떤 사람의 죄나 허물이나 부끄러운 면을 알면 그 사람을 경계하고 멀리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 중에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서 기도할 때, 바리새인은 세리와 따로 서서 “하나님,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립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한다고 하며 자신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자랑할 게 있다면, 그것은 타인에게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자랑할 거리입니다. 하나님이 천하고 멸시받는 우리를 부르셔서 영화롭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정확히 알면, 범죄한 형제를 나무라고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잡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또한 잘못한 사람을 볼 때 자신도 그런 잘못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돌아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우리에게 기대와 소망이 없습니다. 

서로 짐을 지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짐을 서로 지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어떤 형제에게 허물이나 연약함이 있을 때 나도 그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마음을 가지면, 그의 허물이나 연약함이 그만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이기도 하다고 여겨져 짐을 함께 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면 예수님이 우리 짐을 지신 것이 마음에 새겨져서 우리 마음을 언제든지 자유롭게 합니다. 
교회에는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종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형제의 허물이나 실수를 자신의 허물이나 실수로 여겨 그 짐을 함께 집니다. 히브리서 13장 17절에서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인도하는 이들은 자신이 회계會計할 자인 것처럼 우리를 위한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우리 대신 계산할 사람이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형제의 허물을 자기 허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범죄와 연약함에 대해 인도하는 사람이 회계한다면, 그것이 인도자의 허물이 되고 연약함이 되고 짐이 된다면, 성도들이 한 몸을 이루어 주의 뜻을 이루는 일에 함께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우리가 져야 할 짐과 모든 죄악을 예수님이 직접 계산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허물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예수님은 우리 허물을 다 당신의 짐으로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대신 예수님이 회계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그리고 성도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종들은 성도의 허물에 대해 자신이 회계할 자로 여겨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뒤 마음에 가책을 받아, 대제사장들을 찾아가 예수님을 팔고 받은 은 30을 도로 주며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라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판 것이 자기 죄라고 생각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처럼 보이지만, 요한복음 13장 2절에서 ‘마귀가 유다의 마음에 예수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했습니다. 유다는 마귀에게 조종을 당한 것입니다. 마귀가 유다를 이용해서 예수를 판 뒤 유다 자신이 팔았다고 속인 것입니다. 유다가 그 사실을 알지 못해 괴로워하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찾아갔는데, 그들이 유다의 짐을 대신 진 것이 아니라 “네가 당하라.” 했습니다. 그들은 참된 인도자가 아니었습니다. 인도자는 성도의 짐을 자신이 회계할 자인 것처럼 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은혜를 구합니다.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구원받은 성도들 가운데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사람에 대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속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갈 6:3)
우리가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인간은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버리고 사탄의 말을 받아들여서 사탄에게 이끌리며 죄의 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인간을 위해 예수님이 대신 죽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런 우리가 무엇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탄의 꾐에 넘어가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자신이 잘났다고 여기는 마음, 무언가 되었다고 여기는 마음, 그런 마음들은 사탄이 넣어준 것입니다. 사탄은 그렇게 하여 우리를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듭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가질수록 넘어지기 쉬운 것이, 무언가 된 것처럼 사탄이 우리 마음을 높이기 때문입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갈 6:4~5)
우리가 자랑할 데가 어디 있습니까? 아무데도 없습니다. 자랑한다면 나 자신에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나 성도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범죄한 형제를 온유한 마음으로 바르게 세우는 사람이 됩니다. 형제의 짐이 나의 짐이 되어 함께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성도가 됩니다. 그렇게 지낼 때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고린도후서 5장에서도 이와 같이 이야기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8~19)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 죄를 누구에게 돌리셨습니까? 예수님에게 돌리셨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우리 죄악을 짊어지고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형제의 허물을 누구에게 돌립니까? 우리도 범죄한 형제와 똑같이 어둠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형제의 짐이 나의 짐이 된다면 하나님 앞에 함께 나아가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 인도자가 성도의 허물에 대해 자신이 회계할 자로 여겨 그 짐을 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면 성도들이 교회와 인도자를 향하여 마음을 열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 했습니다. 인도자는 우리 잘못을 자신이 회계할 자인 것처럼 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길을 처음 걸으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는 예수님이 우리의 참 목자요, 인도자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가르치며 이끌어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며, 교회의 인도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도자와 함께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지 모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바울은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했습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썩은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을 주관하고 이끌면 우리가 영생을 얻고, 우리 생각이 마음을 주관하고 이끌면 썩은 것을 거둘 뿐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를 바르게 인도하려고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이방인으로 하나님을 모르고 살다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유대에서 온 사람들이 율법을 모르는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왜 할례를 받지 않느냐고 가르쳐 그들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기도 하고, 연약하고 범죄에 빠진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문제들을 바로잡고 교회를 바르게 인도하기 위해 하나하나 세밀히 이야기했습니다. 
갈라디아 6장에서 사도 바울은 형제가 범죄했을 때 성도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말씀이 저에게도 인도자로서 어떻게 교회를 이끌고 성도를 섬겨야 하는지 분명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허물이나 연약함이나 범죄를 나무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져야 할 짐으로 여기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 마음으로 교회를 이끌었습니다. 우리 모두 온유한 마음으로 형제를 붙들어 함께 주를 섬기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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