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과 싸우며 새 길을 간 별처럼 빛나는 사람들
자신과 싸우며 새 길을 간 별처럼 빛나는 사람들
  • 김소리 기자
  • 승인 2022.09.06 10: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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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키즈마인드
특집

편하게,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면 좋을 텐데 귀찮음을 무릅쓰고 특별한 싸움을 하며 지내는 사람들이 있어요. 바로 자신과 싸우는 사람들이지요.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이루어 존경을 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쉽고 편한 길을 버리고‘어려워. 안 돼!’하는 부정적인 생각과 싸우며 도전하는 삶을 이어갔어요. 이번 호에서는 자신과 싸우며 별처럼 빛나는 삶을 산 사람들을 만나봐요. 

 

탐험가의 꿈을 품고 자신을 단련한 
로알 아문센
 

로알 아문센은 1872년, 노르웨이에서 한 선원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열다섯 살 때 우연히 탐험가 존 프랭클린이 쓴 탐험기를 읽었지요. 탐험기를 읽으며 대자연의 생명력과 신비로움에 큰 감동을 받은 아문센은 극지 탐험가가 되기로 마음먹었어요. 

아문센은 꿈을 생각하며 준비했어요. 운동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추운 지방에서 잘 견딜 수 있도록 꾸준히 운동해서 체력을 길렀어요. 또 틈만 나면 빙벽타기 연습을 했고 일부러 험한 산길로 다녔어요. 
극지 기후에 적응하기 위해 추운 겨울에 창문을 열어 놓고 자기도 했어요. 아문센은 극지에 관한 자료를 모아 지식을 쌓았고 선원 공부를 해서 선장 면허를 땄어요. 군대에 들어가 탐험대를 지휘할 수 있는 능력도 쌓았지요. 또 노르웨이에서는 처음으로 민간인 비행 조종사가 되었어요. 

1906년, 아문센은 작은 범선을 타고 북극해로 향했어요. 그가 대서양에서 북극해를 거쳐 태평양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반대했어요. 하지만 아문센은 철저하게 준비해 탐험을 시작했어요. 
탐험의 과정은 고난의 연속이었어요. 시도 때도 없이 암초를 만났고 거칠게 몰아치는 북극의 폭풍우와 싸워야 했어요. 아문센은 목숨을 잃을 뻔한 순간을 여러 번 넘긴 끝에 북서항로를 발견해 냈지요. 
큰 성공을 거둔 후 아문센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북극점을 찾아갈 준비를 했어요. 그런데 미국의 탐험가 피어리가 세계 최초로 북극점에 도달했다는 소식을 듣고 계획을 바꾸어 남극을 탐험하기로 했어요. 

아문센은 남극을 탐험하는 중에 자신의 생각대로 하기보다 원주민들과 교류하며 그들로부터 얻은 정보를 활용했어요. 그래서 말 대신 빙판을 잘 달리는 개가 썰매를 끌게 했고, 가죽으로 외투를 지어 입었어요. 특히 가는 중간중간에 얼음으로 창고를 만들어 바다표범 등을 잡아 저장해 두었는데, 그것은 대원과 개들의 양식이 되었고 돌아오는 길을 가르쳐 주는 지표가 되었지요. 
이렇듯 끊임없이 자신과 싸우며 탐험을 이어간 결과, 아문센은 서른아홉 살에 남극점에 첫 발을 디딘 탐험가가 되었어요. 그 후에도 북극 탐험을 세 번이나 시도하는가 하면 다른 탐험가들과 함께 비행선으로 스피츠베르겐과 알래스카 사이를 횡단해 한계를 넘어 발을 내딛는 도전 정신을 보여 주었어요. 

 

절망적인 생각과 싸우며 최고의 기업가가 된
마쓰시타 고노스케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1894년, 일본의 와카야마 현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어요. 마쓰시타의 집은 부자였지만 마쓰시타가 네 살 때, 아버지가 하시는 일에 문제가 생겨 가정형편이 무척 어려워졌지요. 게다가 큰 형과 둘째 형, 둘째 누나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 집안에 어려움이 끊이질 않았어요.
마쓰시타의 아버지는 열 살 된 마쓰시타를 학교를 그만두게 하고 멀리 오사카에 있는 화로 가게에 점원으로 보냈어요. 마쓰시타는 그곳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힘들게 일했어요. 손은 늘 물집과 상처투성이였고 먹는 것도 넉넉하지 않아 몸이 허약했지요. 무엇보다 어려운 점은 가족과 떨어져 외롭게 지내야 하는 것이었어요.

화로 가게가 문을 닫자 마쓰시타는 자전거 가게로 옮겨갔어요. 그곳에서도 고생은 계속되었어요. 매일 새벽부터 밤까지 궂은일을 했지요. 심한 꾸중을 듣고 하찮은 대우를 받으며 서러움을 느끼기도 했어요. 하지만 마쓰시타는 어려움에만 빠져 있지 않고 열심히 일을 배웠어요. 

그러던 어느 날, 마쓰시타의 인생이 바뀌는 일이 생겼어요. 당시 일본에 전차가 개통되었는데, 마쓰시타가 시내에 갔다가 전차를 타보고 깜짝 놀랐어요. 
“이렇게 편리할 수가! 전차가 있으니 자전거를 탈 일이 줄어들겠는걸. 그래, 앞으로는 전기의 시대다!”
전기에 관심을 갖게 된 마쓰시타는 자전거 가게를 그만두고 오사카전등주식회사에 들어갔어요. 마쓰시타는 학교를 제대로 나오지 못한 데다 전기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항상 배우는 자세로 일했지요. 그러다 몸이 너무약해서 회사에 출근하기가 어려워진 마쓰시타는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어요. 전구 소켓, 선풍기 부품을 만들어 팔다 1918년에는 ‘마쓰시타 전기기구 제작소’를 차리고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 데 힘썼어요.

마쓰시타는 수없이 실패하고 사람들로부터 무시도 받았어요. 하지만 ‘안 돼. 못해’ 하는 마음과 싸우며 절대 포기하지 않았어요. 전등, 연결 플러그, 라디오 등 수많은 발명품을 만들어내며 회사를 키워갔지요. 이후 경제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큰 어려움이 찾아오자 마쓰시타는 더욱 연구하고 직원들을 보살피며 ‘파나소닉’이라는 일류 회사를 만들어냈어요. 
마쓰시타는 가난하고, 허약하고, 학교에 다니지 못한 것을 문젯거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가난해서 부지런히 일할 수 있었고, 허약해서 몸을 단련할 수 있었으며, 배우지 못해서 평생 배우며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감사할 조건이라고 했지요. 어려움이 가져다주는 절망적인 생각에 맞서며 나아간 결과,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늘 새롭고 감사한 삶을 살 수 있었어요.

 

생명을 구하기 위해 쉬운 길을 버린 
더글러스 맥아더

1950년 6월 25일은 우리 역사에 잊을 수 없는 비극이 벌어진 날이에요. 북한이 소련의 도움을 받아 6.25 전쟁을 일으킨 날이지요. 
전쟁이 터진 지 사흘 만에 북한군은 서울까지 쳐들어 왔고, 8월 초에는 부산과 경남 일부 지역을 뺀 온 나라가 북한군에게 점령을 당했어요.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에 도움을 요청했어요. 유엔은 열여섯 개 나라의 연합 군대인 유엔군을 한국에 보내기로 했지요. 그때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유엔군의 사령관으로 뽑혔어요. 

1950년 8월 23일, 훌륭한 장군들이 일본 도쿄에 모여 작전 회의를 했어요. 어떤 장군은 군산을 통해 육지로 들어가자고 했고 또 다른 장군은 부산으로 안전하게 상륙해 치고 올라가자고 했어요. 하지만 맥아더는 인천으로 상륙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러자 모두가 놀라며 맥아더의 의견에 반대했지요. 
“인천으로 상륙하자고요? 인천은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6미터가 넘어요. 만약 상륙하다가 썰물 때가 되기라도 하면 수백 척의 배가 그대로 나동그라진다고요.”
“게다가 갯벌이 너무 넓어 병사들이 행군하기도 힘들어요. 만약 적이 공격해온다면 우리는 모조리 죽고 말 거예요.”

그때 맥아더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말했어요. 
“여러분이 제 계획에 이렇게 찬성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맥아더가 말을 이어갔어요. 
“여러분이 인천상륙작전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북한 장군들도 그럴 것입니다. 북한군은 우리가 절대 인천으로 상륙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할 테니, 그 점을 이용하면 작전은 성공할 수 있습니다. 쉬운 길보다 장병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는 인천상륙작전을 선택합시다!”
맥아더는 45분 동안의 연설로 반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놓았어요. 그리고 9월 15일 새벽, 7만 명의 유엔군을 이끌고 인천으로 상륙하여 9월 28일에 서울을 되찾았어요. 

맥아더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생각으로 1차, 2차 세계대전과 6.25 전쟁 등 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어요. 사람들이 한 번 생각하는 일을 여러 번 생각하고 준비해서 전쟁을 지휘했지요. 참혹한 전쟁터에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 쉽고 안전한 길을 가려는 마음과 치열하게 싸움을 한 거예요. 그 결과 더글러스 맥아더는 48년 동안 크고 작은 전쟁터를 누비며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고, 수많은 사람에게 행복한 삶을 선물해주었어요. 

 

이 어려움이 
축복으로 바뀌겠구나!

글 | 류의규 선교사님( 우크라이나 기쁜소식키예프교회)

저는 유럽 동부에 있는 우크라이나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예요. 그런데 올해 2월에 우크라이나에 전쟁이 일어난 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어요. 전쟁은 많은 사람의 생명과 삶의 터전을 빼앗아가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줘요.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생명을 지키기 위해 정든 고향을 버리고 피난을 가야 했지요. 저도 교회 성도들과 함께 피난을 떠나는데, 너무 슬프고 마음이 아팠어요. 
저는 저의 스승이신 박옥수 목사님께 전화를 드려서 우크라이나의 상황을 말씀드렸어요. 목사님은 우크라이나를 위해 기도해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우리가 만나는 어려움은 절대 어려움으로 끝나지 않고 항상 축복으로 바뀐다네. 지금은 전쟁 때문에 어려움을 겪지만 훗날 우크라이나는 가장 행복한 나라가 되고, 온 유럽에 복음을 전하는 나라가 될 걸세.”
우크라이나에 일어난 일이 제가 볼 때는 어려움인데 목사님은 축복이라고 하시며 제게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셨어요. 
그래서 제 생각을 버리고 목사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더니 ‘이 어려움이 축복으로 바뀌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싶어졌어요.
그 후 저는 성도들을 독일과 폴란드, 헝가리로 피난시키고 헝가리에서 우크라이나 난민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독일 선교사님이 제게 독일에서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으니 독일로 오라고 하셨어요. 저는 헝가리에서의 모든 계획을 뒤로하고 독일로 갔어요. 독일 선교사님은 제게 ‘므리야 프로젝트’에 대해 말씀하셨어요. 므리야 프로젝트는 우크라이나 청년들로 구성된 댄스팀을 만들어 공연을 펼치며 우크라이나 청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되찾아주고, 나아가 온 유럽을 돌며 공연해 유럽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목적으로 세운 계획이에요. 그리고 므리야 댄스팀의 첫 번째 도전은 한국에서 열리는 세계문화댄스페스티벌에 참가해 대상을 수상하는 것이었지요. 
저는 므리야 프로젝트에 대해 들을 때 ‘정말 좋은 계획이지만 이루기는 어려워’라고 생각했어요. 50명이나 되는 댄스팀 단원들을 모집하기가 힘들고, 세계문화댄스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에 가려면 여권, 비자, 항공권, 항공료 등이 필요해요. 그런데 전쟁 중에 이 모든 것을 갖추기가 불가능해 보였던 거예요. 그때 저는 ‘안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믿음으로 발을 내디뎌보자.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새로운 길을 열어주실 거야!’ 하며 선교사님과 함께 므리야 프로젝트를 진행해 갔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놀랍게 일하셔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고, 댄스팀이 페스티벌에서 대상을 수상했어요.
이후 댄스팀은 독일로 돌아와 유럽 45개 도시를 돌며 공연할 준비를 하고 있어요. 이 일 또한 불가능해 보이지만 하나님이 기적 같은 일을 이루실 줄로 믿어요. 유럽 순회공연을 마치면 내년 1월에는 우크라이나에서 공연할 계획이에요. 전쟁의 아픔을 안고 절망 속에서 지내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을 생각하니 소망스럽고 기대가 돼요. 여러분도 우크라이나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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