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신앙의 변화, 내 마음의 주인
[라이프] 신앙의 변화, 내 마음의 주인
  • 글 | 강태욱(에스와티니, 기쁜소식만지니교회 선교사)
  • 승인 2023.03.10 13: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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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호 기쁜소식
선교사 수기(3회)

 

하나님이 내 삶에 일하시는 것을 경험하면서 나는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믿음의 한계를 드러내시면서 말라위에서 선교 3년차에 실패를 허락하셨다. 그뒤 내 마음의 주인을 바꾸어 주시고, 신앙을 새로 시작하게 하셨다.

 

2009년에 군대에서 제대한 후 곧바로 신학교에 복학했다. 신학교에 돌아오니, 모든 것이 감사하고 행복했다. 서로 마음이 통하고 교제할 수 있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동기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새삼 감사할 따름이었다. 군대에서 핍박받으며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도 있었지만, 목사님들의 인도를 받으며 두려움을 깨트리고 나갔을 때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것을 보았다. 막상 부딪쳐 보면 내가 느끼는 두려움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경험하면서 전보다 훨씬 담대하게 지낼 수 있었다. 내가 보기에 가능하든 불가능하든 한계를 정하지 않고 부딪쳐 보고 발걸음을 내디디면서 아프리카, 인도, 필리핀 전도 여행도 함께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경험하면서 믿음의 삶에 대해 더욱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말라위 파송과 교회 개척
스물여섯 살이 되던 해인 2010년 5월, 단기선교를 갔다 온 말라위에 파송받았다. 교회의 인도로 최윤선 자매와 결혼한 후 곧바로 5월 말에 말라위로 떠났다.
김성경 선교사님이 사역하는 기쁜소식릴롱궤교회에서 잠시 지낸 후 말라위 제2의 도시 블랜타이어에 교회를 개척했다. 릴롱궤교회의 도움으로 교회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많은 부분이 부족했다. 가지고 있던 돈으로 먼저 3개월치 집세를 내고 플라스틱 의자 20여 개를 구매하니 돈이 바닥났다. 교회 간판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먼저 종이박스에 영어로 ‘기쁜소식블랜타이어교회’라고 쓰고 코팅을 대신해 박스테이프를 붙여 대문 앞에 걸었다. 외형적인 모양은 초라했지만, 교회를 시작할 수 있어서 감사했고, 크고 작은 어려움을 만나면서 하나님이 세밀하게 도우시고 지키시는 것을 경험한 복된 시간이었다.
아내와 둘이 여러 곳을 걸어가기도 하고 모든 지나가는 차를 다 아는 양 히치하이킹해서 타고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돈도 들지만 승합차는 늘 사람들로 만원 상태라 불편하기도 해서 그렇게 히치하이킹하는 것이 더 편했다.
블랜타이어는 교육 도시고, 상공업의 수도로 불릴 정도로 발달된 도시라 대학교에서 활동도 하고 컴퓨터와 피아노 아카데미를 열어서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 한 사람 한 사람 교회에 연결되고 구원받을 때 감사했고, 어려울 때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때에 따라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고 도우심을 경험하는 삶이 재미있었다.

막막했던 순간들
아내가 첫 아이를 임신하고 3개월쯤 되었을 때였다. 하루는 아내가 갑자기 복통을 호소했다. 가진 돈이 전혀 없었고 블랜타이어 도시도 익숙하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르다가 국립병원으로 갔다. 병원에서는 간단하게 진찰하더니 아직 태아는 괜찮으니까 집에 가서 쉬라고 했다. 집에 돌아온 아내는 누워서 쉬었는데 주기적으로 진통이 찾아와서 아파했다.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 하나님만 찾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병원에 가보고 싶어도 깜깜한 밤이라 대중교통도 없고,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몰라 무작정 동네 밖으로 뛰어나갔다. 마침 동네로 들어오는 차가 있어 세웠다. 아저씨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제발 도와달라고 했다. 아저씨의 도움으로 아내를 차에 태우고, 가까운 산부인과 병원으로 가달라고 부탁했다. 작은 병원에 갔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낮에 갔던 국립병원에 다시 간다고 해도 아무런 조치를 안 해주었기에 의미가 없을 것 같았고, 그렇다고 다른 병원도 몰라서 너무 막막했다.
그때 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블랜타이어로 무전전도여행을 왔을 때가 생각났다. 밤이 되자 불이 환하게 켜진 건물로 많은 차가 들락날락했다. ‘밤중에 이렇게 바쁜 곳이 있나?’ 하고 궁금해서 현지인에게 물어보니 블랜타이어에서 가장 큰 사립병원이라고 했다. 갑자기 그 병원이 떠올랐다. 아저씨에게 사립병원으로 가달라고 부탁했다.
응급실에 들어가자 진료받기 전에 예상 치료비 약 500달러를 먼저 내야 한다고 했다. 돈이 전혀 없었기도 했지만, 사람이 아파서 힘들어하는데 돈부터 달라고 하는 상황이 너무 기가 막혀서 ‘아픈 사람부터 먼저 치료해 달라’며 화를 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사립병원에서는 치료비를 먼저 내지 않으면 환자도 받지 않는다고 했다. 아프리카 병원은 그런 곳이 많다. 다행히 간호사가 진찰을 시작했고 아내는 입원했지만, 그날 밤 아내는 하혈을 많이 했고 아이는 유산되었다.
다음 날, 아내는 수술을 잘 마치고 안정을 찾았는데, 문제는 퇴원하려면 병원비를 먼저 다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동안 돈이 없어서 크고 작은 문제가 있어도 우리가 선교사로서 말라위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면 웬만하면 은혜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병원비도 탕감을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원무과장에게 우리 상황을 설명하고 은혜를 구했다. 그런데 그는 탕감은커녕 단돈 10원도 깎아 줄 수가 없다고 했다. 너무 막막했다. 

내 필요를 다 아신 하나님
그때 갑자기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이런 상황을 한국에 알리지도 않아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고, 당시는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국제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는데 뜻밖의 전화였다. 아버지셨다. 아버지는 교회에 가끔 나오시긴 했지만, 친구와 술을 좋아하셔서 타지에서 지내실 때가 많았다. 가족 중에 교회와 가장 상관이 없이 사는 분이다.
아버지는 그해 말라위에서 열리는 월드캠프 기간에 맞춰 말라위를 오고 싶다며 그 전에 필요한 돈을 먼저 보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으셨다. 나는 오실 때 그냥 환전해서 오시면 된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아버지는 굳이 지금 돈이 생겼을 때 보내놓겠다고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하셨다. 나는 얼마를 보내실 건지 묻지도 않고 계좌번호를 알려드렸다. 그날 아버지는 우리에게 꼭 필요했던 병원비 500달러를 송금해 주셨다.
신학교 수업을 받을 때 박옥수 목사님은 자주 “여러분이 부모님보다 더 오래 살 텐데 평생 부모님을 의지해 살 수 있습니까?” 하시면서 “인간을 의지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안전하고 확실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동안 부모님을 의지하고 기대했던 마음을 끊게 하셨다. 그날 아버지가 보내주신 돈은 아버지가 보내신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해 모든 것을 잘 알고 계셨던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필요에 딱 맞게 도우셨던 것이었다.

믿음의 한계
때에 따라 하나님의 돕는 손길과 전도하면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경험하면서 감사한 일도 많았지만, 선교하면서 한계에 봉착한 때가 있었다. 나름대로 믿음으로 어려운 일을 이겨나가고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지는 경험을 했기에 나는 믿음을 배우고 있고, 때로는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병을 통해 내가 생각한 믿음의 한계를 드러내시고 참된 믿음을 가르쳐주셨다. 내 한계를 끝내고 인간 강태욱이 사는 삶이 아닌, 예수님의 삶을 선물로 주고 싶으셨던 하나님은 내가 선교를 시작한 지 3년차에 실패를 허락하셨다.
나는 어렸을 때 기관지가 좀 약했다. 그렇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 병원도 거의 가지 않고 잘 지냈기 때문에 건강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런데 선교하면서 말라리아에 걸리기도 하고 원인도 모르게 심하게 아플 때가 있었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고질병같이 명치가 답답하고 꽉 막힌 느낌이 일 년간 지속되는 증세였다. 증세가 심할 때는 물을 마시는 것조차 힘들기도 했다. 답답한 증세의 원인과 치료법을 알고 싶었지만, 아프리카에서는 병원도 의지할 만하지 못해서 알 방법이 없었다. 말라위 주변 국가에 의료봉사 팀들이 왔을 때 상담하며 치료 방법에 대해 듣고, 생활 습관을 고쳐봐도 증세가 계속되어 답답했다.

내 생각이 내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선교학교에 있을 때도 한 번씩 몸이 좋지 않거나 다리에 고름이 생겨 아팠을 때 말씀을 의지해 믿음으로 나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 또한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나으라고 하시는 신호라는 마음이 들었다. 기도하며 말씀을 찾는데, 하나님이 마태복음 8장 17절 말씀을 보여주셨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이 말씀을 보고 성경을 덮으면서 ‘이제 됐습니다. 하나님!’ 하고 외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으니 이제 증상이 호전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증상이 심해지다가 완화되기를 반복했다. 원래 있던 비염까지 극심해져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새벽에 깨면서 ‘이렇게는 계속 살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증상이 심해지자 생각에 빠지기 시작했다. 
‘분명 말씀을 믿었는데 왜 증상은 호전되지 않고 계속 나빠지지? 내가 믿음이라고 하는 게 믿음이 아니구나! 나는 나름대로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병도 하나 제대로 못 나으면서 무슨 믿음이 있다고? 믿음도 없는데 무슨 복음을 전해? 그래, 나는 안돼!’ 점점 내 생각이 내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병도 안 낫고 힘들고, 더 이상 방법도 없고 믿음도 없으니 선교도 할 수 없겠다고 판단했다. 
박옥수 목사님에게 전화를 드렸다. 목사님은 내 이야기를 들으시고 가족과 함께 한국에 나오라고 하셨다. 그렇게 나는 말라위 블랜타이어에서 짧은 3년의 시간을 ‘선교 실패’라는 마침표를 찍고 한국에 나왔다. 

내 모습을 발견하다
박 목사님은 내게 당분간 기쁜소식강남교회에서 푹 쉬면서 병원 진료를 받으라고 하셨다. 말라위에서 나올 때는 목사님에게 “더는 사역을 못 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사역을 그만두려고 마음먹었는데, 막상 목사님을 뵈니까 그 말씀을 드리지 못했다.
병원에 가니 위염이 있지만 심각한 상태는 아니어서 당분간 약을 먹으면 괜찮다고 했다. 그러나 약을 먹어도 증상은 호전되지 않았고 여전히 명치가 답답한 증세는 계속되었다. 
2013년 3월부터 5월까지 기쁜소식강남교회에 있으면서 박 목사님의 말씀을 들었다. 내가 사탄에 속아서 살아온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목사님이 여러 번 교제도 해주셨다. 그런데 말씀을 들을 때는 알 것 같은데 말씀과 다른 생각이 찾아오면 흔들리는 나를 보면서 내 신앙의 문제점에 대한 정확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박 목사님은 내게 직장을 잡으라고 하셨다. 마음이 많이 어렵고 괴로웠다. 그때 나 자신을 한 번 객관적으로 보았다.
나는 학생 시절부터 가난을 통해 하나님을 배웠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에 나는 믿음을 배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단기선교, 신학교, 군대를 거치면서 복음을 전할 때 핍박도 받았지만 다 이겼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서도 말씀을 믿었을 때 가능하게 되는 일을 경험하면서 나는 믿음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나 자신을 믿기 시작한 모습들이 보였다. 
사탄은 먼저 여러 일들을 통해 ‘나’라는 사람을 믿도록 역사했다. 결국 몸이 아팠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을 보여주셨어도 하나님이나 교회나 목사님보다도 내 생각을 더 믿으니까, 내 판단을 따라 병이 낫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믿음이 없어 사역도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결국, 그동안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나 자신을 믿고 살아왔기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정확하게 배울 수 없었다. 그래서 박 목사님은 이런 나를 계속 거절하셨다.

내 마음의 주인
나는 결국 한계에 다다라 ‘더 이상 안 되겠구나. 직장을 잡으러 나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때 목사님이 마지막으로 교제해주셨다.
“강 형제, 자네는 내가 하나님의 종인 것을 믿는가?”
“예, 목사님. 목사님이 하나님의 종인 것은 제가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럼 내 말을 그대로, 있는 그대로 한번 들어봐!”
목사님은 오른손을 펼치시며 물으셨다. “이 손이 윤선(아내)이 손이야. 자, 이 손이 누구 손이라고?” 나는 목사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윤선이 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목사님은 손뼉을 치시며 “그래, 바로 그렇게 듣는 거야. 그런 식으로 내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봐!”라고 하셨다.
목사님은 내 마음의 상태를 먼저 진단해주셨다. 의사가 환자의 병을 진단하고 병명을 내리듯이 목사님은 “자네는 구원은 받았지만, 한 번도 예수님을 마음의 주인으로 받아들여 본 적이 없어!”라고 하셨다.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생각해보니 정말 목사님의 진단이 인정되었다. 왜냐하면 말씀을 듣고 믿음이 생길 때도 나는 늘 나 자신에게 ‘확실하냐? 믿어지냐?’ 묻고 나에게 동의를 구했지 ‘말씀이 그러하냐, 말씀이 뭐라고 하시냐?’를 확인하고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가 믿음이 있다고 생각한 것도 내 판단의 기준이었고, 내가 믿음이 없어서 병도 못 낫고 사역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도 내 생각의 기준을 따른 것이었다. 겉으로는 교회와 하나님의 종을 존경하고 따르는 것 같았지만, 실제 내 속에서는 내가 내 마음의 주인이었고 왕이었다.
내 마음의 주인이 하나님과 교회와 하나님의 종이었다면 몸이 아팠을 때 목사님에게 전화를 걸어 “목사님, 제가 몸이 안 좋은데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하고 무슨 말씀을 하시든 그 말씀을 듣고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주인 된 삶의 결국이 선교에 실패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것임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내 마음의 주인으로 받아들이도록 이끌어주셨다.
이제 말씀이 이해되는지 믿어지는지 나에게 확인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시고 교회와 종이 나의 주인이 되셔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 말씀이 실상이기 때문에, 따라가면 항상 복이 되는 것을 경험한다. 때로는 형편이 말씀과 정반대로 흘러가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의롭다는 말씀을 믿고 구원받은 후 삶 속에서 여전히 죄를 짓는 모습이 보이더라도, 다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의인이라고 믿는 것처럼 형편은 달라져도 말씀은 변하지 않는 실상이고 진리다. 내 생각이나 판단이 없어진 것이 아니고 항상 올라오지만, 그것 위에 내 마음 가장 높은 곳에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가 서 있기 때문에 말씀과 교회의 인도가 삶 속에 능력이 되는 것을 본다.

세 가지 말씀
목사님은 이어서 교제해주셨다. 교제의 핵심은 세 가지였다. 첫 번째, ‘우리는 항상 악하다.’ 물론 그 악을 판단하는 기준은 내 느낌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인 말씀이다. 내 느낌으로는 내가 악하게도 선하게도 느껴지지만, 하나님은 나를 항상 악하다고 하신다. 악하다고 하신 말씀을 느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두 번째, ‘악뿐인 인간을 바꾸거나 고칠 수 없어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셨다.’ 만약 나의 할아버지가 세 살 때 돌아가셨다면 나는 태어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아버지 안에 있었고 아버지는 할아버지 안에 있었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세 살 때 돌아가셨다면 나는 태어날 수 없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 안에 죽었고 지금 나는 내가 아니라 이미 죽은 옛 사람이 되었다. 
세 번째,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 안에 사셨다.’ 목사님은 레위기의 번제를 말씀하셨다. 1장에서 번제 희생제물의 머리, 다리, 내장(내 생각, 판단, 경험, 의지할 모든 것) 등 모든 부위를 불에 태우지만, 한 가지 태우지 않는 것이 껍데기다. 껍데기는 레위기 7장에서 ‘제사장이 취한다’고 했다. 이것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껍데기(육신)를 뒤집어쓰시고 사신다는 의미다. 겉사람은 여전히 강태욱의 모습이지만 이제 속사람은 예수님의 영이 사신 것이다. 
목사님과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은 먼저 내 마음의 주인을 바꾸어 주시고, 신앙을 새로 시작하게 하셨다. 그리고 목사님이 ‘계속해서 교제를 나누고 백 번 천 번 간증하라’고 하셔서 지금까지 그렇게 하고 있다. 하나님은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내 마음에 심어 주시고 지금까지도 그 말씀을 따라 내 삶을 계속해서 훈련시켜 가신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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