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율법과 속죄소
[설교] 율법과 속죄소
  • 글 | 오세재(기쁜소식울산교회 목사)
  • 승인 2023.04.21 10: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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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호 기쁜소식
CLF 강연 | 성막에서 드린 제사와 그리스도의 구속_제4강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온 뒤 시내 광야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이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셨습니다. 거기서 돌판 두 개에 십계명을 새겨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율법을 주시는 데는 하루면 충분할 텐데,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동안 모세에게 하늘나라에 있는 성전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양대로 이 땅에 성전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당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옮겨 다니며 텐트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전을 천막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성막’이라고 했습니다.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고 싶으셨습니다. 은혜란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복을 주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인간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누렸습니다. 그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범죄하면서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얼굴에 땀을 흘리며 수고해야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여자는 잉태하고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했습니다. 인간이 은혜에서 떠나 수고해야 하는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수고를 통해 인간을 다시 은혜의 세계로 이끌고 싶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이 수고해서 행복하려는 생각에 젖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그런 인간을 위해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습니다. 로마서 5장 13절에 보면,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세상에 있었지만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도 인간은 죄인이었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9)
인간은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어져 죽은 자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은혜를 알지 못하고 자신이 잘하려고 애쓰고 수고하는 것에 빠져 지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사는 인간에게 율법을 주셔서 인간 속에 있는 죄를 드러내셨습니다. ‘아, 내가 하나님 앞에서 악한 죄인이구나! 나는 저주를 받아야 하고 지옥에 가야 할 인간이구나!’ 율법이 없을 때는 자신을 괜찮은 사람으로 여겼지만, 율법이 오면서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고 하나님의 심판인 사망을 알게 된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막이 없어서 속죄제사를 드릴 수 없었기 때문에
모세가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그것이 하나님이라고 하고 있었습니다. 십계명 중에서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1계명과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2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그날 이스라엘 백성 3천 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출 32:31~32)
3천 명이 죽은 후 모세는 여전히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하나님께 애타게 간구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출 32:33~34)
하나님이 그 죄를 보응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죄가 해결되지 않은 것입니다. 모세가 우상숭배한 사람들을 죽이고, 간절하게 하나님께 속죄의 기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죄는 그렇게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성막에서 속죄제사를 드려야 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시면서 죄를 씻을 수 있는 성막을 함께 주셨습니다. 인간이 율법을 어기고 죄를 지을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지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죄를 씻을 성막이 아직 세워지지 않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성막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속죄제사를 드릴 수 없었고, 속죄제사를 드리지 않고는 죄를 사함받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그대로 두시지 못합니다. 죄는 반드시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길 원한다면 먼저 죄가 완전히 해결되어야 합니다. 죄를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는 곳이 성막이었습니다. 성막이 나중에 솔로몬 시대에 성전으로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성막과 성전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수고가 끝나고 행위가 끝나는 자리, 머시 시트Mercy Seat 
성막에는 죄를 속하는 장치가 있습니다. 성막 문을 통과하면 속죄제사를 드리는 번제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1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할 때 들어가는 속죄소가 있습니다. 
속죄소는 법궤를 덮은 뚜껑으로, 법궤에는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돌판은 하나님이 친히 새겨서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계명은 하나님이 친히 새겨서 주신 겁니다. 이 계명들을 자주 보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십계명을 잘 보이는 곳에 두라고 하시지 않고, 아무도 보지 못하게 법궤 안에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이 오기 전에도 죄가 있었지만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가 있지만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은혜로 맺어지길 원하시는데,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마음이 안 된 것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잘해서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고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여기려면 죄가 드러나야 합니다. ‘아, 나는 멸망을 당할 인간이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조건, 형편,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사랑을 베푸시는 것을 알 때, 그것이 은혜가 됩니다. 은혜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죄가 드러나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19~20)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법궤 안에 넣고 뚜껑으로 덮은 것은, ‘너희들이 행위로 내 앞에 나올 수 없다. 은혜로 나와야 한다. 나는 너희들이 잘한 것도 안 보고 못한 것도 안 본다. 내가 율법을 준 것은 죄를 깨달으라고 준 것이지, 그것을 잘 지켜서 내 앞에 오라고 준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십계명을 넣은 법궤를 닫은 뚜껑이 속죄소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덮어서 우리 행위를 더 이상 보시지 않고, 속죄소에서 우리 죄를 씻어 은혜로 우리와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속죄소를 영어로는 ‘머시 시트mercy seat, 은혜(자비)의 자리’라고 합니다. 율법을 덮은 곳, 인간의 수고가 끝이 난 곳이 바로 속죄소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수고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가 그 수고를 견뎌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짐이 너무 무겁습니다. 나를 믿고 사는 것이 힘겹고 비참합니다. 이제 저 자신을 믿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해야 합니다. 자신이 지고 있는 죄의 짐이, 인생의 짐이 무거워서 쓰러질 때, 그 사람은 그 짐을 벗겨줄 분을 기다립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이 이야기가 누구에게 들리겠습니까? 자신의 수고로 사는 삶이 힘겹고 고통스러운 사람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잘하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쉬게 해주시는 삶, 그곳이 바로 ‘mercy seat, 은혜의 자리’입니다. 우리 수고가 끝나는 자리입니다. 내가 잘한 것도 끝이 나고 못한 것도 끝이 나고 우리 행위가 끝이 난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의 세계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찾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하게 살거나 잘해서 하나님 앞에 서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영원한 언약인 ‘확실한 은혜’
이사야 55장에 중요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사 55:1~3)
하나님이 목마른 자들은 물로 나아오라고 하셨습니다. 돈 없이 값 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수고하며 목마르고 배고픈 것을 하나님이 보셨습니다. 사람들이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 수고했지만 그것은 참된 양식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때 좋은 것을 먹을 수 있고 우리 영혼이 산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왜 주림과 목마름으로 방황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등져 은혜의 세계에서 떠나 자신이 수고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잘하려고 하는 수고와 노력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를 우리에게 영원한 언약으로 세우셨습니다. 
다윗이 온전했습니까? 허물이 없었습니까? 다윗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기 때문에 간음했고, 그 죄를 숨기기 위해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버림을 받지 않을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확실한 은혜를 약속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우리 영혼이 목마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악을 행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의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에 목마르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자신이 무엇인가 잘하려고 노력하는 데에 빠져 있기 때문에 힘들고 마음에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은혜의 언약입니다. 그 언약을 더 자세히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 ‘머시 시트mercy seat’입니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은혜와 진리의 시대가 시작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와 시내 광야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과 약속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율법을 주면 지키겠느냐고 하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다 지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출 19:8)
하나님이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러 40일 동안 지내게 하셨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 양손에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 두 개를 들고 내려왔고, 마음에는 성막을 담아 내려왔습니다. 율법이 내려온 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 죽었습니다. 우상을 만들어서 죽고, 하나님을 원망하다 죽고, 안식일을 어겨 죽고…. 
로마서에서는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가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범죄를 더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율법이 내려오기 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신들의 악을 알지 못하고 자신들이 선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법을 얼마든지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해, 하나님이 법을 주시면 잘 지켜서 복을 받고 못 지키면 저주를 받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어겨 계속 저주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 베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해 은혜 앞으로 나아오지 않기 때문에 율법을 주어 죄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은 자신이 잘해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에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진리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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