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많은 것을 잃었지만 가야 할 길을 찾았다
아주 많은 것을 잃었지만 가야 할 길을 찾았다
  • 이환구
  • 승인 2012.09.08 18: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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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9월 이달의 간증 / 이환구

강도들이 권총을 들고 들이닥쳤다

나는 방수제 만드는 일을 했다. 한국에서 한창 사업이 잘되고 있을 때 조선족의 요청으로 중국 땅을 밟기로 했다. 그 사람이 지인의 소개로 나를 알게 되어 사업을 같이 하고 싶다고 했다. 2년 남짓 상대해보니 사람이 괜찮다는 마음이 들어, 중국의 상황을 잘 몰랐기 때문에 그가 요구하는 방식대로 거래하기로 했다.
그 사람이 방수제를 싣고 중국으로 들어오면 대금을 전부 현금으로 주겠다고 했다. 중국으로 가서 시장을 조사해보니 우리가 만드는 물건이 꽤 고급 물품으로 시장성이 있다는 결론을 얻어, 1998년에 계약서 하나 가지고 5억 원 어치의 물건을 싣고 들어갔다.
계약서 내용대로라면 부두에 도착해서 선적 서류만 주면 돈을 건네받는 것이었는데, 도착해서 서류를 가지고 들어갔지만 돈이 나오지 않았다.
그날 밤 사고가 일어났다. 호텔에서 자고 있는데, 강도들이 권총을 들고 들이닥쳤다. 내가 중국말을 못 하는데도 나를 덮친 상황을 볼 때 강도 가운데 조선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몸에 손만 안 대면 원하는 걸다 주겠다. 권총을 내려라.” 하고 한 시간 가량 설전을 벌였다. 돈을 탐내는 자들이기에 나를 바로 죽이지는 못할 거라고 여겼다. “원하는 게 뭐냐? 내 가방? TV 옆 책상 위에 있으니까 가져가라. 그 안에 있는 수첩 속에 선적 서류가 있다. 그것이 너희가 원하는 게 아니냐?” 한 사람이 먼저 가방을 가지고 나가고, 두 사람은 권총을 겨눈 채 내 옆에 남았다.
물론 그들이 서류를 가지고 가서 절차를 밟는다 해도 5억 원 어치의 물품을 금방 옮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빼앗기지 않을 줄 알았기에 어떻게든 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나님!’ 하고 속으로 불러보았다. 그들이 한참 동안 나를 붙들고 있다가 놓아주었다. 떠나갈 때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는 말이 나왔다. 나는 교회에 다닌 적이 없고, 우리 집안에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동생 (이명구 장로, 기쁜소식강남교회) 내외가 구원받아 교회를 나가고 있었다.
가방은 빼앗겼지만 내 생각이 맞았다. 그들은 물건을 가져가지 못했다.
그때부터는 공안과 힘겨루기가 계속되었다. 나는 물건을 하역하려고 하고 공안은 허락해줄 수 없다고 했다. 결국 5억 원을 중국 바다에 고스란히 버리고 말았다. 방수제는 귀금속처럼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물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성분이 점점 사라지고 3개월이 지나면 쓸 수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공안과 하역 문제로 3개월 동안 실랑이하는 동안 제품의 수명이 끝나버린 것이다.

나는 중국을 몰랐다.

▲ 어린 시절 삼형제가 함께 찍은사진.가운데가 필자.필자를 믿음 안으로 인도한 막내 동생 이명구 장로(기쁜소식강남교회)는 넷째로 사진에는 없다.
외국에서 처음 시작한 사업이기에 ‘여기서 그만둘 것이냐 계속 할 것이냐?’를 생각한 끝에 2차 사업을 시도했다. 중국에 공장을 짓기로 했다. 그동안 번 돈도 있고 기술도 있으니까 공장을 지으면 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나는 중국을 몰랐다.
중국에서는 공업용수로 장강(長江)의 물을 끌어다 사용하는데, 수로(水路)가 동선(東線), 중선(中線), 서선(西線) 세 개로 나뉘어 공사중에 있었다.
나는 세 개의 수로 가운데 2,800km에 달하는 서선 수로 공사에 들어갈 방수제를 납품하기로 중국 정부와 계약했다. 일년에 납품할 물품의 대금이 몇 조 원에 이르는 큰 계약이었다. 중국 신문과 방송에 몇 달간 내 이름이 오르내렸다. 그런데 정부의 개발자금이 부족해서 동선과 중선만 공사를 시작하고 서선은 시작하지 못했다. 그게 내 운명이었던가 보다. 한 달에 30만 톤의 방수제를 생산해야 하기에 그것을 만들어낼 설비를 갖추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계약금을 받으면 본격적으로 설비를 확충하려고 했지만 돈을 받지 못한 채 2년을 기다렸다. ‘오늘이나 내일이면 되겠지’ 하고.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경비가 지출되었겠는가? 수십억 원이 그냥 날아갔다.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내리쳤다

1차 실패, 2차 실패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잃은 돈이 내 돈이었으니까. 3차 사업을 시작하면서는 형제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것도 다 날리고 말았다. 그래도 형제들이니까 큰 문제는 없었다. 4차 사업은 돈을 빌려서 시작했다. ‘나는 해야 한다. 사람을 잘못 만난 걸 보니 터가 안 맞는 모양이다.
다른 데로 가자’ 하고 공장 설비를 북경으로 다 옮겼다. 또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었겠는가?
공장 시설을 제대로 갖추고, 직원들 100명 정도를 풀어서 영업하게 하고 , 순수하게 내 노력을 기울여서 사업이 제대로 펼쳐지는 것 같았다. 앞서 말한 대로 방수제품은 자동차처럼 재고를 쌓아둘 수 없기에 주문을 받아서 제작하는데, 마침 몇 곳에서 주문해와 기계를 자동화하기로 했다. 한국에 들어와서 투자자들을 모은 후 한 사람당 몇 억씩 자금을 모았다. 그리고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현지에서 기계를 만들기로 하고, 내가 직접 공장들을 찾아다니며 기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 예기치 않은 사건이 일어났다. 하루는 천 달러짜리 수표 20장(2,500만원 정도)을 가지고 기계를 사러 갔는데, 그 사실을 내 운전기사가 알았다. 중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운전사, 비서, 경호원을 꼭 데리고 다녀야 한다. 그날 사야 할 기계를 계약하고, 돈은 다음날 달라고 해서 잡아둔 호텔로 돌아왔다. 그런데 호텔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내리쳤다. 쓰러지면서 보니까 운전기사였다. 옆에는 비서가 있었다. 다 조선족들이었다. 급히 화장실로 들어가면서 비상벨을 눌렀다. 곧 공안들이 뛰어올라와 두 사람은 사로잡혔다.
네 번째 사업을 앞두고 하지 말라는 징조로 여겨졌다. 전부 포기했다. 조용히 살기로 했다. 다만 내가 중국에 와서 실패한 이유, 사람을 잘못 판단한 이유 등을 책이라도 써서 한국의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랍에미리트로 가자

조용히 있으려고 했는데, 나와 함께 지내던 조선족 사람이 ‘공장을 자그마하게 하나 만들어주면 자기들이 운영하겠다’고 했다. 좋은 사람 만난 것 같아서 다시 일을 시작했지만 똑같은 상황의 반복이었다. 조선족에게 사기를 안 당하면 중국 사람이 나를 해하려고 했다. 책을 쓰겠다는 것도 접고, 모든 것을 접었다.
중국은 원자재 가격이 싼 것만은 확실했다. 다른 나라에 가서 중국 원자재를 수입해서 물건을 만들면 그동안 손해본 돈을 만회할 수 있다고 여겨져 아랍에미리트로 갔다. 그곳에서 지인을 통해 경제부통령을 알게 되었다. 아랍에미리트는 부자 국가여서 두바이, 아부다비 등에서 건설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 경제부통령이 아부다비에서 2030년까지 하는 건설 프로젝트의 방수제품 부분을 나에게 주겠다고 했다. 내가 그동안 경험한 것을 볼 때 진실하고, 기술이 완성되었음이 증명되었다고 했다. 정부와 ‘2030년까지 이어지는 건설에 사용되는 모든 방수제품은 당신 것을 사용하겠다’는 계약을 맺었다. 그 일에 필요한 회사들을 참여시킬 수 있는 위임장도 받았다. 전체 공사 금액이 700조 원인 대공사니, 방수제품 값만도 몇 조 원은 되었다. 경제 부통령은 ‘공사 진행에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오만에 가서 내무장관을 만나 그쪽 공사를 먼저 하라’고 했다. 오만에 공장을 세우고 제품을 만들 준비를 완벽하게 갖추었다. 그런데 하필 그때 유럽 경제가 흔들리면서 건설시장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또 공사가 시작될 날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아저씨, 왜 거기 가셨습니까?”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다. 큰 일을 벌려놓고 갔으니 막일을 해서 먹고 살 수도 없었다. 이것저것 걱정하다 보니 가지고 있던 돈도 떨어지고, 여권과 비자 기간이 만료되는 줄도 몰랐다. 매일 먹는 것을 걱정해야 했다. 중국에서는 중국 돈 1원(180원 가량)이면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데, 나중엔 1원이 없었다. 중동 땅에 투자한 돈만 해도 얼만데 ….
마지막이 왔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건 살 길이 아니다. 신이 있다면 나를 이렇게 버리지는 않을 거다. 살 필요가 없다’고 마음을 정하고, 독한 중국 술 배갈 4홉 들이 두 병을 샀다. 수구초심(首邱初心), 여우도 죽을 때는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머리를 둔다고 하는데, 나는 명색이 사람이니 고향 땅을 보고 죽고 싶었다. 중국에서 가장 가까운 한국 땅이 신의주로, 중국 단동에서 350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중간에는 압록강이 흐르고.
배갈 두 병을 들고 길을 걷다가 괜찮아 보이는 바위가 보여 내려가 거기 앉았다. 6.25전쟁 무렵 포탄에 맞아 굽어진 압록강 다리가 그대로 있었다.
술병을 들고 콸콸 입에 부었다. 한 병을 다 마시고, 남은 한 병만 더 마시면 정신을 잃고 강으로 뛰어내릴 거였다. 그런데 두 번째 병 뚜껑을 따려고 할때 “아저씨!” 하고 누가 불렀다. 둘러봐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길가를 올려다보니 한 여자가 나를 가리키며 부르고 있었다.
“잠깐만 얘기 좀 해요.”
“무슨 얘기요? 난 아줌마 모르는데요.”
잠깐이면 된다고 해서 술병을 두고 10여 미터 되는 비탈길을 올라갔다.
나이가 마흔 가량 되어보이는 아줌마였다. 따라오라고 해서 가는데, 자꾸 어딘가로 가더니 큰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조금 있으니까 됐다면서 오라고 하더니 버스를 타자고 했다. ‘이 사람이 내게서 뭘 빼앗으려고 이러는가?’
생각하다가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그냥 따라갔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아줌마는 “조금이면 됩니다. 조금이면 됩니다.” 하였는데, 두 시간 반이나 가서 내렸다. 내려서 보니까 내가 아는 동네였다.
잘 가는 식당이 있냐고 묻고, 나를 그리로 데려가더니 술을 한 잔 사준후 “아저씨, 무슨 사연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 그렇게 물으니 의아하기 짝이 없었다. “왜 거기 가셨습니까?” 하더니, 한국사람이 제일 많이 죽는 자리가 그 자리라고 했다. 거기 앉은 사람 백이면 백한국 사람이고, 실패한 사람이며, 죽으려고 온 사람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 바위 이름이 ‘자살바위’라고 했다. 그분이 운동하러 나왔다가 그 바위에 앉아서 안주도 없이 술을 마시고 있는 나를 보고 자살하려고 하는 줄 알고 그렇게 나를 살린 것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살리신 것이다.

“두 시간 후에 가세요”

▲ 고향 진해에 있는 농장에서 젊은날 가족과 함께.(부모님. 아들을 안고 있는 필자. 형수와 두자녀. 그리고 아내)
한국으로 돌아가려도 해도 여권도 기한이 지나고, 돈도 없었다. 교회에 다니는 조선족 집사 부부를 만나 그들과 함께 지냈다. 비자와 여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 돈으로 1,500만 원 가량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국에 있는 이명구 장로에게 전화를 했다. “막내야, 돈이 좀 필요하다.” 동생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알았습니다. 내일 전화 드릴게요.”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저녁에 동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형님, 나 돈 없습니다.” “내가 지금 위급한데 어떻게 하면 되겠냐?” “내가 시키는 대로 할랍니까?” “그래, 할게.”
동생은 ‘같은 선교회의 중국 교회에 다니는 조선족 장로님을 형님께 보낼 테니 그분 뜻대로 하라’고 했다. 그분이 돈을 빌려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분은 “저도 잘 모릅니다. 지금부터 한국 간다는 생각 다 버리고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고 말했다. 그때 처음으로 ‘구원’이란 말을 들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목단강에 사는 아는 조선족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국에 갈 길이 보인다며 3~4백만 원이면 가능할 것 같다고 했다. 집사람에게 전화하니 2백만 원을 부쳐주었다. 그 돈을 가지고 목단강으로 가서 조선족 친구를 만나 함께 공항으로 갔다. 공안에게 기한이 지난 여권을 보여주었다. 그런 경우 보통 바로 수갑이 채워지고 불법한 대가로 벌금을 내야 하며, 서너 달은 잡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냥 가라고 했다. 계급이 좀 높은 공안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돈을 조선족 친구에게 주자 그가 자기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보태서 600만 원 가량을 공안에게 건넸다. 그 정도 가지고는 해결이 안 되는데, 공안이 “오늘 갈래요, 내일 갈래요?” 하고 물었다. “지금 가면 좋겠습니다.” 하자, “두 시간 후에 가세요. ” 하더니 비행기표를 끊어서 따라 들어오라고 했다. 비행기를 타려면 여권도 검사받고 해야 하는데, 그런 것 없이 VIP실로 데리고 가더니 바로 비행기에 태웠다. 하나님이 그렇게 이끄신 것이었다. 얼마 동안 교회 장로님
과 함께 지내서인지 입에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는 말이 절로 나왔다.

지금은 성경을 공부하고 싶다

2012년 4월 초순에 한국에 들어와, 동생 내외와 함께 체조경기장에서 있었던 대전도집회에 참석했다. 설교 말씀을 듣다가 동생에게 “너, 목사님한테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알려줬어? 왜 나를 두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했더니 동생이 막 웃었다. ‘어떻게 내 속을 꿰뚫어보고 말씀을 하실까?’ 강사 목사님이 꼭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후로는 교회 예배에도 참석했다. 구원이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에 돌아온 후 소송에 휘말렸다. 어떤 사람이 발행한 약속어음을 마치 내가 돈을 받아서 처분한 것처럼 조작되어 있었다. 잘못한 것이 없었지만 죄인으로 몰려서 벌금 천만 원을 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주일마다 예배에 참석하면서 진심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왜 여기까지 와서 없는 사실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그런데 선고 하루 전에 고소한 사람의 마음이 바뀌어 고소가 취소되었다. 그 이유가, 그냥 그의 아내가 나를 풀어주라고 했다는 것이다.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으면 그렇게 될 수 없었다. 내 삶에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 전 여름 캠프에 참석했다. 말씀을 들으면서 한 가지 사실을 느꼈다.
‘내 삶이지만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게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제대로 가는 거다.’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기로 했다. 캠프 기간에 한 목사님과 신앙상담을 계속했다. 성경에서 궁금한 점들을 묻고 자세히 설명을 들으면서, 그동안 들었던 복음이 마음에 믿음으로 자리잡았다. 비로소 내죄를 다 씻음받고 구원을 받은 것이다.
2011년 10월 26일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나는 중국에 있어서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는데, 아버지는 구원받고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산소는 어머님이 계시는 고향 진해에 있는 우리 농장 안에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못 와서 그런지, 요즘 나는 아버지 산소에 가서 이야기를 한다. ‘아버지, 집안은 이렇고 저렇고, 사업하고 있는 것은 이렇고 저렇고 … ’ 하고 대화를 주고받듯 이야기한다.
나는 아주 많은 일을 겪었다. 돌아보면 그 모든 실패는 나를 구원의 길로 이끌어오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잃었지만 나는 감사하다. 지금은 성경을 공부하고 싶다. 이게 내가 가야 할 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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