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칸타타가 찾아오다
크리스마스 칸타타가 찾아오다
  • 요나히시 린콘(기쁜소식마이애미교회)
  • 승인 2014.04.01 16: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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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간증

 

베네수엘라에서 보낸 어두운 날들
 
나는 베네수엘라의 마라카이보에서 태어났다. 그때 부모님은 별거 중이었고, 엄마는 다른 도시에 가서 혼자 살고 있었다. 그것말고는 나는 어린 시절을 별 문제 없이 보냈다.
내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엄마와 함께 일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바(Bar)나 클럽에 술을 대주는 일을 하셨다. 나도 그런 곳들을 찾아다니면서 술을 홍보했다. 엄마는 그 일이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고 미국으로 가서 일하기 시작하셨다. 나와 언니는 베네수엘라에 남아 일하며 공부했다. 늘 돈이 부족했고, 언니는 자신의 삶을 살기에도 바빴다. 나를 돌봐줄 사람은 없었다. 많이 외로웠다. 때로는 음식이 없어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나는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내가 왜 살고 있는지 삶의 목표를 잃었고, 결국 우울증에 걸렸다. 긴 머리를 짧게 자르고, 학교도 포기했다. 더러운 집에서 씻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잠만 잤다. 집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얼마 후, 엄마가 미국에서 돌아오셨다. 엄마는 내가 심하게 말라 있는 것을 보고 우리를 미국으로 데려가기로 하셨다. 그리고 3개월 만에 집과 차를 팔고 모든 것을 팔아서 우리를 미국으로 데려가셨다. 내 나이 열여섯 살 때였다.

학교를 그만두고 레스토랑에서 일해야 했다
엄마는 집 근처에서 하우스키퍼를 했고, 나와 언니는 학교를 다녔다. 학교 생활은 많이 어려웠다. 영어가 서툴렀기 때문이다. 그래도 낙제생이 되고 싶지 않아서 열심히 공부했고,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다.
얼마 후, 엄마는 하우스키퍼를 그만두고 바에서 바텐더로 일했다. 그때 어떤 아저씨를 만나 함께 지내다가 결혼했다. 새아버지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라스베가스에서 살던 그 아들도 우리가 살던 마이애미로 왔다. 나는 그와 가깝게 지냈고, 얼마 후 그는 라스베가스로 돌아갔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우리 집은 많이 어려웠다. 새아버지가 엄마가 바에서 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 엄마가 일을 그만두면서 물질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나는 학교를 그만두고 레스토랑에서 일했다.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났지만…
2007년 4월에 나는 라스베가스로 가기로 했다. 그곳에 가면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엄마와 주위 사람들은 말렸지만, 그곳에 남자 친구도 있어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라스베가스로 떠났다. 하지만 그곳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비자도 없고, 워크 퍼밋(취업허가증)도 없고,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었기 때문에 누구도 나를 써주지 않았다.
라스베가스에 간 지 3개월 만에 임신했는데, 남자 친구는 아이를 원하지 않아 지우자고 했다. 혼란스러웠다. 그때 엄마가 “걱정 말고 돌아와라. 내가 돌봐 줄게” 하셨다. 엄마가 나에게 실망하고 나를 싫어할 줄 알았는데, 정반대였다. 나는 남자 친구와 함께 마이애미로 돌아왔고, 엄마 집 근처에 아파트를 얻었다. 얼마 후 우리는 결혼했고, 다음 해 봄에 아들 다니엘이 태어났다.

 
그 즈음부터 남편은 마약의 일종인 마리화나를 피우기 시작했다. 나에게 들켜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후로는 밖에서 마리화나를 피우고 집으로 들어왔다. 한번은 아이에게 우유를 주려고 남편에게 맡겼는데, 아이가 갑자기 심하게 울어 얼른 달려가서 아이에게 우유를 먹였다. 다음날, 나는 다니엘의 다리에 파란 멍이 있는 것을 보았다. 며칠 후에는 아이를 씻기다가 양 옆구리에 멍이 있는 것을 보았다. 남편이 그렇게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마리화나를 피운 후, 아이가 우니까 조용히 시키려고 아이를 꼬집고 때린 것이다.
나는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왔다가 남편이 잘못했다고 해서 들어갔다. 하지만 그런 일은 계속되었다. 결국 남편은 아동학대로 법원에 소환되었고, 나중에 약물 테스트에 걸려 마약재활센터에서 훈련을 받았다.
2011년에 남편은 마약재활센터의 훈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서 마리화나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마약을 하기 시작했다. 마약재활센터에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에게서 모든 종류의 마약을 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결국 나는 그와 헤어져야 했다.

또 다른 어려움
엄마도 새아버지와 헤어져 우리 모녀는 다시 같이 살게 되었다. 우리는 가진 돈도 별로 없고, 갈 곳도 없었다. 나는 다니엘을 언니 집에 맡기고 친구 집에서 지냈고, 엄마는 차에서 지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두 달 후에 집을 얻을 수 있었다.
2011년에는 또 다른 어려움을 만났다. 다니엘을 낳은 후 허리가 굉장히 아파서 힘들었는데, 허리 통증이 너무 심해진 것이다. 나는 자주 “하나님, 제발 통증을 없애 주세요!” 하고 부르짖었다. 하루는 허리가 너무 아파서 병원 응급실에 실려갔다. 진통제와 모르핀으로 통증을 완화시켜 보려고 했지만 너무 아파서 견딜 수 없었다. 어떤 통증 완화제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의사는 MRI를 찍자고 권했다. 그리고 다음날, MRI 검사 결과를 들고 와서 내 척추 디스크에 얼마나 큰 문제가 생겼는지 보여 주었다. 어느 부분이 아주 크게 돌출되어 있었다. 의사는 심각하다며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수술이 잘 끝나 나는 곧 일을 할 수 있었다. 레스토랑에서 하루종일 열심히 일했다. 접시들이 무겁고 힘들었지만, 돈을 조금씩 모으는 것이 즐거웠다.
2012년 어느 날, 레스토랑에서 일하는데 다리가 아파서 앉았다가 일어설 수가 없었다. 아무리 몸을 일으키려고 해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엄마가 와서 나를 집으로 데리고 갔다. 강한 진통제를 먹었지만 심한 고통이 계속되었다. 다시 병원에서 MRI를 찍었다. 분명히 돌출된 디스크를 잘라냈는데, 그 부분이 전보다 더 커져 있었다. 감사하게, 전에 수술한 선생님이 다시 수술해 주었다. 수술은 잘 되었다. 하지만 한 번 더 디스크가 발생하면, 그때는 평생을 허리에 철심을 박고 살아야 한다고 했다.

마이애미에서 가장 위험한 곳에서
2012년 12월에 우리는 ‘오팔로카’라는 곳에서 아주 싼 집을 얻었다. 우리는 그 집이 정말 좋았다. 발코니가 무척 넓고, 주위도 조용하고, 이웃들도 좋아 보였다. 그런데 2013년 3월부터 경찰차가 우리 앞집을 찾아왔다. ‘무슨 문제가 있나 보다’ 하고 그냥 지나갔는데, 며칠 후 옆집에서 총소리가 났다. 그리고 한 사람이 총에 맞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후로도 우리 동네에는 경찰이 끊임없이 찾아왔다. 하루는 중무장한 경찰 부대가 우리 동네를 둘러싸고 집들을 수색했다. 특별히 우리 앞집과 옆집은 봉쇄하고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수색했다. 이틀 후에는 우리 집에서 한 집 건너의 옆집을 수색했다. 그 집은 마약과 총을 파는 집이었다. 동네에서 우리 집만 문제가 없는 것 같았다.
마이애미에서 농구 경기가 있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잠들었고 엄마는 성경을 읽고 언니는 거실에 있었는데, 우리 집 트럭을 어떤 차가 끌고 가는 것을 언니가 보았다. 경찰을 불러서 그 사실을 이야기하자 경찰은 “왜 이곳에서 사냐?”고 물었다. 그곳이 마이애미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라고 했다. 그래서 집 값이 쌌던 것이다. 나중에 이웃 사람이 우리 트럭이 있는 곳을 알아내 가르쳐 주었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은 ‘지금은 아무도 도울 수 없다’고 했다. 그때 찾지 않으면 영영 잃어버릴 것 같아 형부가 몰래 가서 차를 몰고 왔다. 그러고는 차를 가져간 사람들이 우리에게 보복할까봐 두려웠다.
우리 트럭을 훔친 사람은 마약과 총을 팔던 이웃집 사람들이었고, 우리에게 트럭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준 사람은 그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너무 무서워서 이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삶을 바꿀 만한 감동을 준 공연
2013년 7월에 우리는 마이애미의 ‘할리우드’라는 곳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9월 어느 날, 우리 집 문 앞에 “디어 네이버(Dear Neighbour, 친애하는 이웃에게)”라고 적힌 편지가 놓여 있었다. 편지를 읽어 보니,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에 초청한다는 내용이었다. “엄마, 이거 봐! 크리스마스 공연을 하는데 무료래!” 엄마와 아들 다니엘이 굉장히 좋아했다. 우리는 주저 없이 공연을 보러 가기로 했다.
10월 3일, ‘필모어 마이애미 비치’에서 우리는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을 보았다. 정말 놀라웠다. 공연도, 성탄 메시지도 우리를 감격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렇게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내 삶을 바꿀 만한 감동을 준 공연이었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내 마음에 이루어진 크리스마스 칸타타
그리고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이 경품 응모권을 냈는데, 우리가 당첨되었다. 마이애미 교회의 사모님이 경품을 전해 주러 우리 집을 방문했다. 사모님은 엄마와 언니를 만나 성경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이애미 교회는 우리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송충환 목사님과 성경공부를 했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내 죄가 눈처럼 희어진 것을 알았다. 눈물이 흘렀다. 하나님께 감사했다. 내 인생, 내 마음 속에 이루어진 크리스마스 칸타타였다.
이제 나는 자유롭다. 내게는 정죄가 없으며, 부끄러워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소망이 있다. 예수님 안에서 어떤 일이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돌아보니, 내 삶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었음을 알게 된다. 앞으로 살아가는 인생길에서도 나는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것들을 만날 것이다.
지금 나는 주님 안에서, 교회 안에서 그동안 맛보지 못했던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다. 이처럼 밝은 날들을 나에게 허락하신 주님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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