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 -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수도사가 되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 -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수도사가 되다
  • 이한규 (기쁜소식동서울교회 목사)
  • 승인 2014.04.01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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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루터의 탄생
루터는 1483년, 독일의 아이슬레벤에서 한스 루터(Hans Luther)와 그의 아내 마가렛 사이에서 7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난 다음날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는데, 세례 받은 날이 ‘성(聖) 마르틴’을 추모하는 날이어서 그의 부모는 교회의 관습을 따라 그의 이름을 마르틴이라고 지었다.
마르틴 루터의 아버지 한스 루터는 만스펠트 지역으로 이사해 처음에는 광부로 일했지만, 나중에는 구리 광산업을 경영해 성공하여 광산의 소유주가 되었다. 그는 16세기에 새롭게 등장한 신흥 자본가로 성장했다. 루터가 태어난 때는 사회가 농업사회에서 초기 자본주의 산업사회로 옮겨가던 시기였다.

라틴어를 공부하던 소년
루터의 부모님은 엄격하면서도 다정다감했다. 그리고 가난하지 않았지만 절약을 강조했다. 루터는 네 살이 조금 넘어 라틴어 학교에서 문법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방학도 없이 매일 학교에 갔으며, 일요일에는 교회에서 성가대원으로 활동했다. 후에 어머니의 고향 아이젠나하(Eisenach)로 옮겨 ‘만스펠트 라틴 학교’를 9년간 다녔다.
당시 서유럽에서는 라틴어가 학문, 무역, 외교, 교회에서 주요 언어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라틴어 공부는 지식층이나 상류사회로 가는 필수 과정이었다. 루터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라틴어를 쓰지 않고 독일어를 사용하면 벌을 주었다.
루터의 부모는 루터에게 자본가가 되는 데에 필요한 상업이나 무역에 관련된 공부를 시키지 않고 수도원적인 분위기의 학교에서 인문학을 공부하게 했다. 루터가 14세 때 접했던 종교적인 분위기, 특별히 귀족들이 누리던 호화스런 생활을 버리고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의 탁발수도승이 된 ‘안할트의 빌헬름’(Wilhelm von Anhalt) 공(公)의 모습은 루터의 마음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스물 한 살에 처음 접한 성경에 빠져들다
루터는 1501년 그의 나이 18세 때 에르푸르트 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법률학을 공부할 예정이었다. 루터의 아버지는 그를 변호사로 만들고자 했다. 루터가 다니던 학교의 강의 내용은 신학을 중심으로 하여 짜여졌고, 학생들은 복장이나 활동 등에 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 시절에 루터는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을 폭넓게 공부했다. 나중에 루터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이교도(old heathen)’라고 불렀다. 루터는 학생들 중에서 최단 시간에 학사와 석사 학위를 마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톨릭 신앙을 가진 가정에서 자랐지만, 루터는 스물 한 살 때 대학 도서관에서 처음으로 성경을 접했다. 그 후로 루터는 성경이 있는 수도원의 도서관을 거듭 찾아갔다. 그는 큰 기쁨 속에서 라틴어 성경을 한 장 한 장 읽으면서, 언젠가는 자신도 그런 보물을 하나 소유하기를 바라는 소망이 가득했다. 그는 점점 성경에 매료되어 갔다. 구원받지 않은 상태였지만, 특히 사무엘상에 나오는 한나와 어린 사무엘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완전히 빠져들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다가 위험한 병에 걸릴 정도로 성경에 몰두했다.

루터 당시 독일의 사회상
루터가 대학에 다니던 당시의 독일은 매우 기독교적인 사회였다. 거리마다 교회가 있었고, 교회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신자들은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제(司祭)를 찾았고, 사제는 산 자의 죄만이 아니라 죽은 자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기도했다.
중세(中世)에 신부(사제)는 하나님과 사람의 중보자로 여겨졌다. 사제권(司祭權)에 대한 잘못된 믿음으로, 사람들은 죄를 사함받는 최선의 길은 수도사가 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일반 신자로서는 이 땅에서 예수님의 명령을 온전히 따르기 어렵지만 수도생활을 통해서는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수도사나 수녀가 되려고 했다. 수도사가 되겠다는 서원(誓願)은 일체의 죄악을 깨끗하게 없애는 제2의 세례로 간주되었고, 생전에 수도복을 입어 보지 못한 사람은 임종시에라도 입어 보길 원할 정도였다.

“살려 주시면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루터는 종교심이 강한 사람으로, 늘 내적인 고민과 삶의 본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씨름했다.
‘과연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사람인가?’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러한 고민은 그의 나이 스물 두 살이던 1505년 여름에 절정에 달했다. 몇몇 역사가들은 이런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1505년 7월 2일, 에르푸르트 법과대학에서 법률 공부를 하던 루터가 어느 날 부모님을 뵙고 친구와 함께 만스펠트 시(市)에서 에르푸르트에 있는 대학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에르푸르트 근방의 스토턴하임(Stotternheim)에 이르렀을 때 폭우가 쏟아지고 천둥이 치더니, 가장 친한 친구 가운데 하나였던 알렉시우스(Alexius)가 벼락에 맞아 죽고 말았다. 그 광경을 보고 루터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땅바닥에 엎드려 기도했다.
“성(聖) 안나(Anne)여! 나를 도우소서! 이번에 살려 주시면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성 안나는 광부들의 수호 성자였다. 그 후 루터는 법학도의 꿈을 버렸다. 루터는 친구의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나도 그렇게 아무런 경고도 없이 불려간다면 내 영혼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그는 죽음의 공포에 압도되어 영혼의 구원 문제를 깊이 생각했다. 하나님 앞에 설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 자신에게 죽음과 영원한 심판이 찾아왔다고 느꼈다.
루터는 <수도 서약에 관하여>(1521)라는 글에서 “내가 수도사가 된 것은 자유롭게 결정한 것도 아니고, 원해서도 아니었다. 갑자기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고뇌에 휩싸여 어쩔 수 없이 서약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약한 지 2주일 후인 7월 17일에 어거스틴파(派)의 은둔자들의 수도원에 들어갔다. 베인톤 교수는 그가 쓴 루터 전기 <Here I Stand>의 첫 페이지에서, “성인의 이름을 부른 이 청년이 나중에는 성인 숭배를 배격했고,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약한 이 청년이 나중에는 수도원 제도를 거부했으며, 카톨릭 교회에 충성을 바치겠다고 하던 이 청년이 나중에는 중세 카톨릭주의의 구조를 깨뜨려버렸고, 교황에게 헌신을 다짐했던 이 청년이 나중에는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부르게 되었다.”라고 기록했다.
루터가 수도원에 들어가자 그의 아버지의 실망은 대단했다. 아들에게 배신감을 느껴 심하게 화를 냈다. 그는 수도원으로 찾아가 루터에게 성경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있음을 상기시키며 집으로 돌아가자고 설득했다. 그러나 루터는 이미 맹세한 수도 서약을 이행하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다며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루터를 용서했다.

나는 참으로 경건한 수도사였다
루터는 수도원에서 교리사, 교회사, 조직신학 공부에 몰두하며 자신의 영혼의 구원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부단히 씨름했다. 루터는 <탁상담화>에서 말하기를 “내가 수도원에 들어가려고 서약한 것은 배를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위해서였다.”라고 하였고, <수도 서약에 관하여>에서는 “나는 하늘의 공포에 사로잡혀 이 소명에 응하였다.”라고 하였다. 루터를 사로잡은 최대의 관심사는 자신의 영혼의 구원이었던 것이다. 루터는 하나님을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으로 생각했고, 그의 유일한 관심은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을 수 있을까?’였다.
수도승들은 정해진 옷을 입고, 기도와 단식과 철야와 내한(耐寒) 등 극히 고되고 엄격한 생활을 해야 했다. 수도원은 전통적으로 엄격한 규칙들을 가지고 있었다. 청빈(poverty), 순결(chastity), 복종(obedience)의 규정 외에도 매일 행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특별히 기도와 명상 등에 관한 규칙들이 엄했다. 수도자들은 웃음을 지어서는 안 되고, 고개를 숙이고 걸어야 하며, 걸음 간격도 일정해야 했다. 앞만 보고 걸어야 하고 두리번거려서도 안 되었다. 그리고 그룹의 인도자 앞에서만 동료에게 말을 건넬 수 있었다. 수도자들은 매일 기도, 시편 묵상, 독서 등으로 일과를 보냈다.
수도자들은 새벽 2시에 일어나서 각자 독방에서 성경과 어거스틴 수도원의 규칙을 읽고 6시까지 자신의 방에 머물다가, 종이 울리면 6시에 기도회를 가졌다. 이어서 9시에 미사를 드리고, 다시 12시 미사를 드리고 나서 그날의 첫 식사를 하였다. 오후 3시에 다시 미사를 드리고, 5시에 기도 모임이 끝나면 6시에 저녁 식사를 하고 7시에 마지막 기도회를 가졌다. 그리고 저녁 8시에 취침에 들어갔다.
루터는 엄격한 규칙에 따라 수도생활을 하던 때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나는 참으로 경건한 수도사였다. 수도원의 규율을 엄격하게 지켰다. 만약 수도사가 ‘그놈의 수도’에 의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면 나는 충분히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 나와 함께 수도원에 있었던 형제들은 이 사실이 진실이라고 증언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아마 그 일을 더 계속했더라면 철야, 기도, 독서, 그리고 다른 일들로 인해 나는 죽고 말았을 것이다.”
루터는 하루에 일곱 번씩 기도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했으며, 자신을 학대하며 모든 형태의 고행을 했다. 그는 경건을 훈련했고, 신학적 연구에 전력을 다했다. 그는 수도원 생활에 마음과 몸을 다 쏟아부었다

“이 모든 것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양심은 결코 만족하지 못했다.”
중세의 수도사들이나 사제들은 ‘선행에 의해 의인이 될 수 있다(works-righteousness)’는 신학에 기초하여 철저한 수행과 경건의 훈련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루터는 죄의 유혹을 이기는 데 실패했다. 그가 행한 모든 신앙 훈련으로 구원에 이르거나 마음에 평안을 얻지 못했다. 루터의 근본적인 고뇌는 ‘인간의 공적(功績)이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상수훈’은 너무나 높고 어려워서 아무도 그것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아 루터는 괴로워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대하여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하나님을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으로 믿을 수 없었고, 단지 노여움과 불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여겼다.
루터는 수도생활로 온전해져서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특히 죄 문제로 깊이 고민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고해성사를 하여 그의 담당 사제가 괴로움을 느낄 정도였다. 죄에 대해 고해(penance)를 시작하면 때로는 여섯 시간 동안 계속하기도 했다. 작고 보잘것없는 일에서도 그는 깊은 죄의식을 느꼈다. 그런 죄들을 다 고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아직도 죄가 남아 있어서 늘 번민했다. 맑은 그의 양심은 그의 죄를 점점 더 선명하게 감각하게 하였다. 죄로 인하여 고통하고 몸부림치는 루터에게 하나님은 점점 더 무서운 분으로 다가왔다. 그러한 고뇌는 얼마 동안 계속되었다.
“나는 자주 고백하고 나에게 부과된 고행을 철저히 수행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양심은 결코 만족하지 못했다.”
루터에게 가장 큰 문제는 ‘어떻게 하면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얻을 수 있을까?’였다. 다시 말해, ‘어떻게 하면 죄를 사함받아 자신의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젊은 루터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지옥에 떨어질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항상 괴로워했다. 그는 선행으로 구원에 이르려 하였으나 자신을 구원할 만큼 충분히 선을 행할 수 없음을 발견하고 절망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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