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잎사귀 하나가 떨어져도 그는 부들부들 떨었다
루터는 율법과 자신이 몸담고 있던 어거스틴파(派) 수도원의 규칙을 완벽하게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늘 실패했고, 그를 무력하게 만드는 죄의 짐에 시달려야 했다. 그로 인해 ‘유혹’은 루터 신학에서 중요한 낱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차분하고 경건한 분위기에서 자라 하나님의 심판을 강하게 의식했던 루터. 그는 자신이 율법을 지키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위선자라는 생각에 휩싸였다. 그래서 한번 죄에 대해 고해(Confession)를 시작하면 때로는 여섯 시간 동안 계속하기도 했다. 작고 보잘것없는 일에서도 그는 깊은 죄의식을 느꼈다. “참회는 루터의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깊은 죄의식과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서 지냈다. 나무 잎사귀 하나가 바람에 날려 떨어져도 그는 부들부들 떨었다. 꿈속에서 마귀는 자기를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하는데, 자신을 도우려는 천사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나님은 계속 무서운 심판주로만 보였다.”(Bainton, Here I Stand, pp. 52-56)
마침내 복음의 진리가 그의 영혼을 죄의 속박에서 자유케 했다
1512년 29세의 나이에 비텐베르크대학의 성서학 교수가 된 루터는 어거스틴파(派) 수도원 건물의 탑 속에 있는 방에서 살며,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그곳에서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며, 사색했다. 어느 날, 루터는 로마서를 읽고 있었다. 그런데 1장 17절 말씀이 그의 마음에 머물렀고, 그는 계속해서 그 말씀을 묵상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그리고 마침내 복음의 진리가 그의 영혼을 모든 죄의 속박에서 자유케 했다. 루터는 이때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한 행위나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는 노력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간의 모든 죄를 사하셔서 값없이 은혜로 구원을 이루어 놓으셨음’을 발견했다.
이 놀랍고 위대한 발견은 끊이지 않았던 고통과 기나긴 번민과 고민 끝에 얻어진 것이었지만, 루터의 마음에 있던 모든 괴로움과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그리고 후일에 그는 이 놀라운 복음을 근거로 하여 진리에서 떠나 부패해 있던 중세 로마카톨릭교회를 개혁할 수 있었다.
“드디어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주시는 의(義)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루터는 자신이 수도원 탑 속의 서재에서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을 깊이 묵상하던 중에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나는 바울이 기록한 그 말씀에 끈덕지게 매달렸고, 성(聖) 바울이 말하고 싶어하는 바를 알고자 하였다. 나는 로마서 1장 17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을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며, 불의한 자들을 심판하심에 있어서 의로우시다’는 의미인 줄로 생각했다. … 나는 이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다가 드디어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께서 은혜와 긍휼로 우리에게 주시는 의(義)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또, 우리가 그 의(義)를 믿을 때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의로 말미암아 산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 그러므로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의 의미는 ‘복음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를 우리에게 능동적으로 계시하시고, 그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따라 믿음이라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것이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점을 깨닫자 나는 다시 태어나서 천국으로 통하는 활짝 열린 문으로 들어선 느낌이었다.”
“어째서? 어째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버림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또한 루터는 시편 22편에서 비참한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고 있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이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시 22:1~20) 그러나 다음 순간, 루터는 시편 22편의 내용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묘사한 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한 글이었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놀라움에 사로잡혀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다.
“어째서? 어째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버림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나 자신이 버림을 당하는 것은 얼마든지 타당한 일이다. 나는 약하고 불순하고 불경건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약하지도, 불순하지도, 불경건하지도 않으신데…. 어째서? 어째서?”
이어서 루터는 벼락에 맞은 듯한 놀라움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져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는 나 루터 대신 그리스도가 친히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져 버림을 당했다! 죄 없으신 그리스도가 나 대신 죄를 담당하시고 나 대신 죄인이 되셨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성경
이제 루터 앞에 나타난 하나님은 더 이상 무서운 진노를 쏟아 붓고 자신을 심판하는 하나님이 아니었다. 값없이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었다. 그가 그토록 애타게 찾았던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그는 마침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발견한 것이다.
루터는 인간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은 인간의 올바른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어 놓으신 의를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복음의 진리를 깨달았다. 그가 1515년에서 1516년 사이에 저술한 ‘로마서 강의’를 보면 1519년에 쓴 ‘갈라디아서 강의’와 완전히 일치하는 복음주의 신학을 펼치고 있다. 이로 미루어볼 때 루터가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탑 속의 경험’을 한 때는 1515년까지 소급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루터가 구원받아 죄에서 벗어나고 거듭난 것은 어떤 신비한 체험을 하거나 기적을 경험해서 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구원받았고, 하나님을 만났다. 그는 학생들에게 로마서를 강의하기 위해 말씀을 묵상하는 동안, 복음의 진리를 발견해 율법과 선행의 무거운 짐에서 자유를 얻었던 것이다. 이후 루터는 학생들에게 ‘죄인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대가 없이 의롭게 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 모든 죄를 사함받는다’고 가르쳤다. 루터의 신학은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성경’으로 요약된다.
“죄를 속하기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드리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바울로부터 배우십시오.”
루터는 처음에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했다. 그러나 철학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고, 틈틈이 해오던 성경 연구가 점점 심화되고 확장되면서 신학교수가 되었다. 그는 학자로서뿐만 아니라 설교자로서도 활동하면서 즐겨 설교했다. 그로 인해 비텐베르크 성(城)에 속해 있는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고, 나중에는 성내에 있는 마을 교회의 목회자까지 겸임했다. 그의 설교는 진리에 대한 그의 열정과 적절한 표현, 깊은 성경 지식으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루터는 구원받은 후 사람들에게 복음을 이야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쳤다. 그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우리가 지켜야 할 법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의 죄를 속하기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드리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바울로부터 배우십시오” 하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