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랏 산에 머문 방주
아라랏 산에 머문 방주
  • 이헌목 (기쁜소식양천교회 목사)
  • 승인 2015.02.06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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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삶

모원단장母猿斷腸
고사성어 중에 모원단장母猿斷腸이란 말이 있습니다. 진晉 나라의 환온桓溫이 촉나라를 치려고 배를 타고 양자강을 지나다 숲 속에서 새끼 원숭이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러자 새끼를 잃어버린 어미 원숭이가 정신없이 배를 쫓아왔습니다. 배가 양자강 상류로 올라가 강폭이 좁아져 뭍과 가까워지자 비통하게 울며 쫓아오던 원숭이가 얼른 배에 올라탔습니다. 그런데 백리가 넘는 길을 쫓아온 어미 원숭이는 배에 오르자마자 죽고 말았습니다. 병사들이 이상히 여겨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니, 창자가 토막이 나 있었습니다.
창자가 끊어질 만큼 고통스러움을 단장斷腸이라 하는데,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6·25전쟁 때 남편이 포로로 끌려가는 광경을 노래한 것으로, 거기에 “철사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 맨발로 절며 절며”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 치려 하여도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맨발로 울며 ‘단장의 감람산 길’로 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 아들 암논이 그의 이복누이 다말을 강간하고, 그 일로 압살롬이 이복 형 암논을 살해한 후 도망가는 일이 생겼습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을 인하여 슬퍼했지만, 그 후 돌아온 압살롬은 반역하여 다윗을 칼로 치려고 했습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을 피해 도망가야 하는 비참한 일을 당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들의 칼을 피해 도망가는 다윗의 마음에는 단장의 고통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셀라).”(시 3:1~2)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아들까지 반역을 일으켜 자신을 죽이려 하고, 도망가는 자신에게 시므이가 돌을 던지며 저주하고….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울며 다윗 성을 떠나는 그 상황에서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시 3:3)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시 3:5)라고 고백할 뿐 아니라, “천만인이 나를 둘러 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시 3:6)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극심한 어려움 중에도 자신의 생각을 믿지 않고 하나님만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실 분이라고 믿고, 그의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을 세워놓은 것을 봅니다. 
성도들이 어려움을 당하면 ‘내가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한 일들이 있는데 왜 이런 어려움을 주십니까?’ 하거나, 자신이 무얼 잘못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정죄와 자책 속에 빠져 신앙마저도 저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불신 속에서 교회를 대적하는 경우도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오직 하나님의 마음만을 세웠습니다. 그랬기에 형편은 맨발로 쭟겨 가는 비참하고 절박한 상황이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붙드신다는 마음으로 평안히 잘 수 있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삶 속에서도 문제와 질병 등 어려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느냐입니다. 문제에 휩쓸려 자신의 판단을 따라 원망하거나 한탄하지 않고, 다윗처럼 어려움 앞에서 형편을 뒤집을 수 있는 믿음, 즉 쫓겨 도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승리한 것으로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다윗은 잇대가 자신과 함께 가겠다고 했을 때에도 절박한 상황임에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네 부하들을 데려고 압살롬에게 돌아가라’고 했으며, 제사장들이 법궤를 가지고 왔을 때에도 도리어 성으로 도로 메어 가라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방법을 붙들지 않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형편을 이기는 믿음, 곧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이 자신을 다시 인도하실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형통한 자, 요셉
성경에서 고난을 당한 인물로 요셉을 뺄 수 없습니다. 요셉은 치리자가 될 것이라는 꿈을 꾼 후 형들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그리고 결국 형들에 의해 이스마엘 노예 상인들에게 팔려, 도망가지 못하도록 묶인 채 맨발로 끌려가는 ‘단장의 애굽으로 가는 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요셉에 대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창 39:2)라고 했습니다. 형편은 누가 보아도 ‘고통스런 자’인데, 성경은 그를 ‘형통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셉도 마음에서 자신에게서 올라오는 소리에 젖지 않고,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이 나를 도우셔!’ 하고 중심에 하나님이 보시는 시각을 세웠습니다. 요셉 역시 고통을 형통으로 바꿀 수 있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의 ‘형통’은 외부의 조건에 있지 않고, 구원받은 성도의 마음에
‘임마누엘’ 하심이 ‘형통’의 조건입니다. 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는 성도들은 어떤 문제 앞에서도 그것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형통하다는 말을, 자기 주위의 있는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자신의 영역에서 성공의 길을 걷는 상황을 보고 사용합니다. 그러나 형통은 그런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임마누엘’에 있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할 때에도,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을 때에도 요셉은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아라랏 산에 머문 방주
창세기 8장 4절을 보면 “칠월 곧 그 달 십칠일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라고 했습니다. ‘아라랏’이란 말에서 ‘아라’는 ‘저주’를 의미하고, ‘랏’은
‘뒤집히다’의 의미라고 합니다.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문 7월 17일은 놀랍게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과 일치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을 마음에 모신 거듭난 성도에게는 저주나 심판이, 죽음(지옥)과 정죄(죄책감)가 더 이상 앞에 놓여 있지 않습니다.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듯이, 성도는 저주나 죄의 심판이나 가책이 머물 수 없는 ‘아라랏 산’에 거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윗이 대적을 피해 도망하여 ‘단장의 감람산 길’을 갈 때에도 마음은 ‘아라랏 산’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 다윗, 그리고 바울은 단장의 어려움을 당할 때 그 마음이 ‘아라랏 산’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이미 아라랏 산에 머물러 있습니다. 어떤 단장의 고통과 슬픔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뒤집혀 축복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속에서 치르는 싸움들은 우리가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미 이겨 놓으신 것을 믿음으로 승리를 누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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