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함께 내게 찾아온 행복
교회와 함께 내게 찾아온 행복
  • 이정도(코트디부아르 아비장교회 선교사)
  • 승인 2015.12.30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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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수기1

 

 

오랜 시간 앞만 보며 지내왔는데,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서 무척 감사하다. 때로 무엇을 잃어버려 돌아서서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 볼 때가 있다. 하지만 잃어버린 것이 없음에도 삶을 돌아보니, 많은 것들을 묻어 두고 살아가는 나를 발견한다. 올해 선교사 수기를 기고하면서 잊고 살았던 소중한 순간들을 떠올리며 되새김질하는 정한 짐승의 삶을 살게 되리라 믿는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던 나의 어린 시절
사람들은 누구나 태어난 날을 소중히 여긴다. 탄생을 축하하는 노래를 부르고, 파티를 열어 사랑을 표현하는 데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쓴다. 축복을 넘치게 쏟아붓는 날이 생일이다. 하지만 내가 태어난 날은 좀 달랐을 것 같다. 한 아내와 세 자녀의 가장이셨던 아버지가 우연한 계기로 나의 어머니를 만났고, 형과 내가 태어났다. 이런 일이 지금 내가 사는 아프리카에서는 특별하지 않지만 한국에서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한 일이다. ‘나’라는 존재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부담이 되지는 않았는지,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출생을 한 건 아닌지 생각하곤 했다.
 5학년 때까지 형과 어머니, 간혹 집에 오시는 아버지와 여러 곳으로 이사를 다니며 살다가, 갑자기 아버지의 본처와 그 가족들이 사는 집에 가서 살게 되었다. 어머니가 하시던 일이 잘 되지 않아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할 수 없어서였다. 하루아침에 내 생활기록부에서 어머니의 이름이 바뀌었고, 없던 형과 누나들의 이름이 기록되었다. 새 가족들이 내게 잘해 주었지만 갑작스러운 환경의 변화는 충격으로 다가왔고, 혼돈스러웠다. 이 모든 일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기에는 우리 형제는 너무 어렸다. 형이 이불 밑에서 우는 걸 몇 번 보았다. 아버지 집으로 이사한 후 1년을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겠다. 한번은 학교에서 시험을 보는데 처음 보는 문제들로 꽉 차 있어서 당황스러웠다. 5학년 때 성적이 모두 ‘양’ 아니면 ‘가’였다. 정말 아무런 생각 없이 1년을 살았다.
 1년 후 어머니가 형과 나를 데리러 오셨고, 우리 세 식구는 다시 전과 같은 삶을 살았다. 어머니와 살면서 심리적으로 안정되자 6학년 때는 모두 ‘수’를 받았다. 어머니와 사는 동안 마음은 편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늘 힘들었다.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어머니를 도와 계란빵 장사를 했다. 일이 힘들지는 않았지만 몹시 부끄러웠다. 장갑을 끼고 앞치마를 두르고 빵을 구워 파는 내 모습…. 친구들을 만나는 게 싫었고, 손님들이 나를 불쌍해하며 쳐다보면 수치스럽고 비참했다. 정부미를 타러 동사무소에 가는 일도 내 몫이었다. 사람들 틈에 끼어서 쌀을 배급받는 내 모습이 너무도 초라해 보였다. 가난이 너무 싫었다.

 “위선자!”라고 소리치며 나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어머니는 교회에 열심히 다니셨다. 새벽기도도 빠지지 않고 가셨고, 힘들게 번 돈을 모아 교회에 헌금했다. 학비를 낼 돈은 없어도 헌금할 돈은 항상 가지고 계신 것처럼 보였다. 수업료를 제때 내지 못해서 교무실에 자주 불려 다녔기에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6학년 때 어머니가 발목을 다쳐서 깁스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목발을 짚고 새벽기도를 나가셨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에도 어김없이 일찍 일어나셨다. 나는 누워서 ‘두 손으로 목발을 짚을 텐데 우산은 어떻게 들지?’라고 생각하다가, 벌떡 일어나서 우산을 들고 어머니를 뒤따라갔다. 어머니는 예상대로 비를 맞으며 가고 계셨다. 교회로 가는 길에는 계단이 있었는데, 빗물 때문에 계단이 보이지 않자 어머니는 앉아서 엉덩이로 내려가셨다. 내가 들고 있던 우산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교회에 도착해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울면서 기도하셨다. ‘뭐가 저리도 괴롭고 슬프실까? 무슨 죄를 그리도 많이 지으신 걸까?’ 내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오고갔다. 그날 어머니를 보면서 ‘예수님을 믿어도 저렇게 믿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녔던 나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죄책감에 시달렸다. 사춘기 시절 성적인 호기심과 욕구 때문에 괴로웠다. 남자로서 성장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죄책감 때문에 울면서 용서를 빌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사는 것이 힘들었다. 한번은 나도 새벽기도에 가서 마음으로 지은 죄를 떠올리며 울면서 용서를 구했다. 한참을 그렇게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며 ‘이건 아니야!’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기도를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른 교회에 다녀봐야겠다는 생각에 이곳저곳 찾아다녀 보았지만 모두 똑같았다. 천주교나 불교도 죄를 해결하는 과정은 거의 비슷했다. 지옥에 대한 두려움만 없다면 하나님과의 연결 고리를 끊고 싶었는데,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만 점점 커져갔다.
 나는 자주 거울 앞에 서서 “위선자!”라고 소리치며 나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사람들은 선하지도 않고 효자도 아닌 나에게 “착하다”고 칭찬만 했는데,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어머니를 도와 장사하는 내 겉모습만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더 내 속마음을 꺼내놓을 수 없었다.
 하루는 같은 반 친구가 자신이 저지른 나쁜 짓들에 대해 늘어놓았다. 여자를 추행한 이야기도 서슴지 않고 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악하고 더러운 불량아로 보이는 게 아니라 솔직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그날부터 친하게 지내며 나를 ‘위선’에서 구원해줄 구원자로 여겼다.
 한번은 친구가 여자들을 만나러 가자고 나를 부추겼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면의 나를 표출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겨져 기쁘게 친구를 따라나섰다. 하지만 도둑질도 해본 놈이 한다고, 사직운동장 공터에 가서 롤러스케이트를 신고 몇 분이 지나지 않아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여자들에게 말 한마디 걸어보지 못하고 깁스를 하고 집에 돌아와 누워 있으면서 요강에 대소변을 보는데, 미칠 것 같았다. 하나님이 이런 일을 벌이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감옥에 나를 가두고,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도 하지 못하게 만든 후 자기만을 섬기도록 강요하는 하나님인 것처럼 느껴져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어머니에게 대들 수 없어서 참석한 수양회
하루는 어머니가 어디에 다녀오시더니 “구원받았다”고 하며 기뻐하셨다. 어머니는 기도원이나 부흥 집회에 다녀올 때면 늘 충만해져서 오셨지만 금세 그 충만함과 기쁨을 잃어버리셨다. 우리 어머니는 으레 그러려니 생각했는데, 구원받았다고 하신 뒤에는 뭔가 좀 달랐다. 복음을 전해준 곳으로 교회를 옮긴다고 하셨다. 교회를 옮기는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형과 어머니는 교회 문제로 옥신각신하기도 했지만 나는 관심이 없었다.
 1988년 1월에 어머니가, 다리를 다쳐 집안에만 있는 나에게 수양회에 가자고 하셨다. 목발을 짚고 가는 것이 힘든 데다가 하나님이란 존재를 위해 내 마음에 조금의 공간도 남겨두지 않았던 터라 정말 가기 싫었다. 문제는, 수양회에 가기 싫지만 부러진 다리 때문에 어디론가 도망갈 수도 없는 것이었다. 수양회가 시작하는 날 아침에 당시 기쁜소식선교회 동부산교회의 박정수 목사님이 우리 집 앞에 승합차를 대놓고 나에게 이야기하셨다. “함께 가자!” 처음 보는 목사님 앞에서 어머니에게 화를 내며 대들 수 없어서 수양회에 참석했다.
 겨울수양회 복음반에서 예수님의 피로 내 죄가 사해졌다는 ‘복음’을 들었다. 모든 죄가 이미 씻어졌다는 사실보다 더 크게 와 닿았던 부분은 내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때까지 아무도 나에게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다’고 가르쳐 준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늘 율법을 지키면서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살았다. 매일 나를 정죄했고 기도할 때마다 울었는데, 처음으로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구원받은 후 동부산교회를 다녔다. 박정수 목사님이 우리 가정을 온 마음으로 섬겨주셨다. 형과 할머니도 복음을 듣고 구원받았다.
 나는 참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친구도 없었고, 누구와 마음의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다. 힘에 겨운 모든 것을 혼자 삼키며 지냈다. 그러는 동안 복잡하고 쓸데없는 생각들 속에 자주 잠겼다. 그런 내가 구원받고 교회 안에서 말씀을 들으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그날부터 복음 전도자가 되는 꿈을 꾸었다
구원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박정수 목사님이 다른 교회로 부임해 가시고, 지금은 주님 품에 계신 이용재 목사님이 오셨다. 이 목사님은 허리에 장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말씀을 전하셨다. 한번씩 목사님의 굳은 허리와 다리를 안마해 드릴 때가 있었는데, 온 몸의 체중을 실어 30분 이상 주무르고 나면 그제야 조금 부드러워지곤 했다. 목사님은 사람들에게 성경 말씀을 전하면서 굉장히 기뻐하셨다. 복음을 듣고 구원받는 사람들 또한 행복해 했다. 아무런 목적 없이 살아가던 나에게 복음 전도자의 삶은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아름다운 것으로 다가왔다. 그때부터 복음 전도자가 되는 꿈을 꾸었다. 당시 동부산교회 형제 자매님들은 복음만을 위해 살았다. 공부나 직장보다 신앙생활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때때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회사에 들어가 돈을 벌어 복음을 섬기는 이들도 있었다.
 한번은 친구 어머니가 그때까지만 해도 성적이 괜찮았던 나에게 특별한 제안을 하셨다. 학비와 생활비, 학원비, 대학 등록금 전액을 지원해 줄 테니 그 친구 집에서 살면서 친구와 열심히 공부만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학교 바로 옆에 있었던 친구의 집은 정말 크고 좋았다. 우리 집에서는 숨막히는 다락방에서 공부해야 했고, 밤에는 어머니의 앓는 소리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최고의 환경에서 돈을 받으면서 공부만 하면 되는 것은 좋은 조건이었지만, 친구 어머니에게 갈등 없이 말했다. “교회에 다녀야 해서 그럴 수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삶이 정말 행복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친구 어머니가 교회에는 토요일과 일요일에 가면 되지 않느냐고 하셨지만, 교회에 매일 가야 해서 그럴 수 없다고 말씀드렸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젊은 형제 자매들이 신학교에 들어가서 믿음을 배워 전도자가 되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살았다.

 

 

‘하나님이 부르셨다면 고치시기 위해 부르셨겠지.’
1989년에 대학 입학시험을 치르고 원하는 대학에 지원했다가 떨어졌다. 대학에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날 목사님이 나에게 남부산교회 예배당 공사장에 가서 일을 도우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남부산교회에 가서 부엌 공사 일을 하다가 그만 허리를 다치고 말았다. 골반 뼈가 튀어나온 게 만져졌다. 벽에 기대지 않으면 앉을 수도, 일어설 수도 없어서 고통스러웠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다음날, 목사님이 대덕 수양관 건축 공사 현장에 봉사하러 가라고 하셨다. 목사님은 내가 다친 걸 모르고 계셨다. 당시 내 마음에서는 하나님과 교회와 하나님의 종은 ‘삼위일체’였기 때문에 목사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허리가 아프다는 이야기는 할 필요도 없었다. 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종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믿었기에 내 사정을 알고 모르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수양관 건축 공사 현장에는 일하는 형제들을 위한 숙소가 마련되지 않아 거창교회에서 대덕까지 왕래하며 일을 했다. 제일 먼저 굴삭기가 대덕산에 올라가서 벌목 작업을 했다. 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공사를 진행할수록 허리 통증이 심했다. ‘이러다 불구자가 되는 거 아니야? 결혼도 못했고, 자식도 없는데….’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이내 다른 마음 하나가 올라와 나를 붙들었다. ‘내가 불구자가 되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 순간을 피해가도 불구자가 될 거야.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불구자가 되지 않아!’ 내가 하나님이라도 불구자를 불러서 일을 시키지는 않을 거란 마음이 들었다. 하나님이 부르셨다면 고치시기 위해 부르셨다는 확신이 들어 편안하게 일할 수 있었다. 공사 현장에서 일한 지 1주일쯤 지났을 때 콘크리트를 배합하는 일을 했다. 허리 통증 때문에 약간 주저되기도 했지만 물러서지 않고 계속 일했다. 6개월이 지났을 때 허리 통증은 더 이상 없었고, 골반 뼈는 여전히 튀어나와 있었다. 8개월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허리를 짚었는데, 뼈가 만져지지 않았다. 완전히 들어가 제자리를 찾은 것이었다. 놀라웠다.

 

 

목사님이 신학교에 갈 준비를 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은혜를 입혀주신 것이 무척 감사했지만, 이상하게 내 마음에 하나님과 교회와 하나님의 종이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세워졌다. 하나님을 믿는 내 믿음이 누구보다도 크고, 내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덕에서 그렇게 1년 반을 지내다가 입대했다.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군대를 복음으로 뒤집어엎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간 곳은 수도방위사령부였다. 자대에 배치 받고 군 생활을 시작했는데, 쉽지 않았다. 한 선임병이 내가 술 담배를 하지 않고 가요도 부르지 않는다고 집요하게 괴롭히며 때렸다. 실탄을 장전한 총을 내 입에 넣고 협박하기도 했다. 핍박을 받아가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복음을 전했지만 한 사람도 내가 전하는 말씀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절망이 찾아왔고, 결국 복음 전하는 것을 포기했다. 내 욕심으로 복음을 위해서 살려고 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살 궁리를 하자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먼저 자동차 정비사 자격증을 땄다. 그리고 대학의 자동차 관련 학과에 들어가기 위해 입시 준비를 했다. 말년 휴가를 나와 대입 시험 접수를 하고 제대한 후 바로 시험을 쳤다. 시험이 끝난 후에는 자동차 정비 공장에 취직했다. 취직하고 나서야 교회가 생각나서 교회에 갔다. 그런데 교회에서 말씀을 들으니 복음을 향한 마음이 다시 일어났다. 목사님은 외국어를 배우라고 하셨다.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러시아 선교를 위해 기도했던 터라 자동차 학과를 마음에서 접고 러시아어과에 입학했다. 입시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수업료를 면제받고 대학에 다닐 수 있었다.
 동부산교회 예배당에서 몇몇 형제들과 함께 살면서 학교에 다녔다. 새벽 4시 반에 일어나서 아파트 단지에 주차된 수십 대의 자동차를 닦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난 후, 자전거를 타고 버스비가 싼 곳까지 가서 학교로 가는 버스를 탔다. 시간이 없어서 아침은 거의 굶고 다녔다. 점심도 돈을 아낄려고 굶었다. 교회로 돌아와 저녁 모임을 마친 뒤에야 밥을 먹을 수 있었는데, 밤에 교회 공사나 일이 있으면 잠자는 시간마저 줄어들었기 때문에 너무 힘들고 피곤했다.
 1학기를 마치고 방학이 되어 러시아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양회와 주일학교 봉사자로 참석해야 해서 할 수 없었다. 방학이 끝나고 학교를 다녀야 하는데, 지난 6개월의 삶을 또 다시 반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무도 내 학교생활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고, 나도 대학에 다니는 게 의미가 없다고 느껴져서 그 해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직장을 잡았다. 회사에 다닌 지 1년쯤 되었을 때 당시 동부산교회에 계셨던 장영철 목사님이 나를 부르셨다. 장 목사님은 내게 신학교에 갈 준비를 하라고 하셨다. 꿈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니 정말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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