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께 피하는 자
여호와 하나님께 피하는 자
  • 이정도(코트디부아르 아비장교회 선교사)
  • 승인 2016.03.28 10: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선교사수기
 

일곱 번 갈아타고 열네 시간, 가나 가는 길
코트디부아르에 가서 한 달쯤 지났을 때 사역자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가나에 가야 했다. 처음 가보는 길인 데다 차를 일곱 번 갈아타면서 열네 시간을 가야 했는데, 영어와 불어를 할 줄 모르는 내가 가나까지 가는 것은 큰 도전이었다. 아내와 딸 도희는 아무 걱정이 없어 보였다. 새벽 다섯 시부터 분주하게 움직여서 열다섯 개의 검문소를 통과했다. 당시 나라 정세가 좋지 않아 검문이 무척 심했다. 오전 열 시경에 코트디부아르 국경을 통과했는데, 들은 대로 여러 대의 차가 손님을 태우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일단 가나 ‘타코라디’라는 곳까지 갈 생각으로 30인승 승합차를 찾았다. 그때 한 승용차 운전기사가 15,000세디를 부르기에 한국 돈으로 4,000원 정도 되는 요금이라서 생각보다 싸다고 생각하며 얼른 차에 올라탔다. 승용차에 우리 세 식구만 타고 갔는데, 낡고 불편한 승합차를 탈 수 있는 돈으로 승용차를 탄다고 생각하니 정말 좋았다. 차비가 너무 싸서 타코라디가 가까운 곳인 줄 알았는데, 세 시간이나 걸렸다. 아내와 도희는 차 안에서 편안하게 잠을 잤다.
 타코라디 정류장에 도착해서 기사에게 15,000세디를 주었더니 돈이 적다고 했다. 기사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니, 기사가 ‘one fifty thousand’(150,000세디)라고 한 것을 내가 ‘fifteen thousand’(15,000세디)로 잘못 들었던 것이다. 정류장에 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어 우리를 둘러쌌다. 300명은 되어 보였다. 기사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질러댔고, 나는 “I am sorry(미안합니다)”를 반복하면서 서 있었다. 정류장에 있던 모든 운전기사들이 합세하여 나에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고, 잠시 후 경찰들이 와서 자초지종을 물었다. 내 대답은 간단했다. “I don’t know English(저는 영어를 모릅니다). I have no money(저는 돈이 없습니다).” 경찰이 내 대답을 듣고 기사에게 소리쳤는데, ‘이 사람이 영어를 못 하니까 네가 설명을 잘 했어야지’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때 분위기가 아주 살벌해서 경찰의 도움과 보호가 아니었다면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아내와 도희가 한쪽 구석에서 바닥에 신문을 깔고 점심을 먹고 있었다. 경찰이 우리를 ‘아크라’로 가는 차가 있는 곳까지 안전하게 태워주었다.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가 목도하였느니라.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신 29:3~4)
 언어를 모르니 벙어리와 귀머거리가 따로 없었다. 보이는 것이 있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를 코트디부아르로 보내신 분이 내가 언제 어디에서 어떤 문제를 만나는지 듣고 보고 알고 계셨기에 문제될 것은 없었다. 형편을 보는 눈과 귀가 없는 것이, 위험을 당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셔서 함께하셨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이적과 기사를 목도하면서 사는 삶이 정말 복되었다. 아크라로 가는 길에 달리는 차창 밖으로 하늘을 쳐다보니 푸른 하늘에 구름이 떠다니고 있었는데,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는 구름처럼 보였다.

아내의 출산,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아내가 둘째를 낳아야 할 때가 가까워지면서 어떻게 출산 준비를 해야 할지 막막했다. 만삭인 아내가 하루는 복음을 전하고 싶다며 밖으로 나가자고 졸랐다. 아내는 당시 불어를 거의 못 했기 때문에 밖에 나가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는데, 하나님이 그 마음을 주신 것 같았다. 정처 없이 걷다가 한 집이 예뻐서 구경 삼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집에 몇 주 전에 우리 교회 앞을 지나다가 “이곳이 교회입니까?” 하며 들어왔던 ‘시세’라는 분이 살고 있었다. 우리는 반가워서 잠시 말씀을 나누었다. 시세는 3대째 이슬람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말씀 듣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한번은 시세가 자신이 과거에 의사였다며 아내의 출산을 돕고 싶다고 했다. 시세가 우리를 여러모로 도와주었다.

 

출산 예정일이 14일이나 지났는데도 아내에게 진통이 없었다. 새벽에 성경을 읽는데, 빌립보서 4장 6절 말씀이 마음에 남았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염려되고 걱정되는 게 많아서 기도하고 있는 나에게 하나님이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하셨다. ‘감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생기는 마음인데….’ 이미 해결된 일을 두고 걱정하는 것 같았다. 그날 낮에 인터넷으로 박옥수 목사님의 말씀을 들었다. 버퍼링 때문에 한 시간 동안 10분도 제대로 못 들었지만, 짧은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연결되기를 바라는 박 목사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오후에 아내에게서 말라리아 증상이 나타났다. 아내는 저녁 무렵에 두려워하며 울기도 했다. 밤새 잠을 못 자서 몸은 힘들었지만 새벽에 읽었던 빌립보서 말씀에 우리 마음을 연결시켜 보니 아내와 내 마음에 있던 염려가 사라지고 감사로 채워졌다. 그날 밤 말씀이 우리 마음을 지켜주었다. 새벽 다섯 시에 아내는 진통을 시작했고, 병원에 도착해서 10분 만에 순산했다. 병원비를 다 낼 수 없었지만 은혜를 입어 퇴원할 수 있었다.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데,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택시비가 턱없이 모자라서 택시기사들이 태워주지 않으려 했다. 세 번째 잡은 택시가 다행히 태워주었지만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 좋지 않다며 큰길에 내려주고 가버렸다. 작은 양산으로 아내와 아기를 가리고 빗물로 덮인 길을 더듬어 간신히 집에 도착했다.
 부엌에 들어가 보니 쌀통의 쌀이 거의 바닥이 나 있었다. 남은 쌀로 겨우 밥을 조금 하고 미역국을 끓였다. 미역 말고는 넣을 것이 없었지만 그래도 최고로 맛있게 끓인다고 끓여서 아내에게 주었는데, 맛이 없다고 잘 먹지 않았다. 아내는 다시 말라리아를 앓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사먹으라고 적어준 약은 돈이 없어서 살 수 없었다. 아내는 고열로 3일 가까이 신음했고, 나도 며칠 동안 잠을 못 자서 지치고 배가 고팠다. 박옥수 목사님이 많이 생각났다. “목사님, 목사님은 이럴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목사님이 들으셨는지는 모르지만 마음으로 참 많이 물었다. 틈틈이 읽는 이사야 말씀이 힘이 되었다. 이 전에 태어날 아이와 관련해 내야 할 서류가 있어서 시세에게 처리비용을 맡겼는데, 법이 바뀌어서 돈을 돌려받았다. 그 돈으로 필요한 것들을 살 수 있어서 정말 감사했다.

 

선교사에게 생명을 얻는 일보다 더 큰 일은 없다
아내가 출산하고 2주 뒤 새벽에 내가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쓰러졌다. 형제들이 찾아와서 병원에 실려 갔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가 나 때문에 비를 맞으며 여기저기 뛰어다니다 다시 말라리아에 걸려 쓰러져 있었다. 이튿날 새벽에 예레미야 45장을 읽었다. 예레미야가 바룩에게 말했다. “네가 일찍 말하기를 ‘슬프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치 못하다.’ 하도다 하셨고”(렘 45:3) 바룩은 그 당시 예레미야와 마음을 같이하며 말씀을 기록하고 그 말씀을 전하는 유일한 종이었는데, 하나님이 그에게 고통을 허락하시고 그 고통 위에 슬픔을 더하셨다. 바룩에게 무엇이 고통이었을까? “또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나의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나의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이러하거늘 네가 너를 위하여 대사를 경영하느냐? 그것을 경영하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그러나 너의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로 생명 얻기를 노략물을 얻는 것 같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렘 45:4~5)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이 말씀을 이해하도록 만드는 일들이 일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건강하지 않았던 아이가 더욱 더 아프기 시작했다.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를 보았다. 태어난 지 20일이 지났지만 이름조차 없는 아이였다. 너무 힘든 시간들이었다. 아이를 다정히 불러 볼 여유조차 없었다. 병원에 다녀왔지만 아이의 병은 점점 더 심해졌고, 그날 저녁 나는 또 쓰러졌다. 배가 너무 아팠다. 나뭇가지를 주워서 수없이 배를 찔렀는데, 배를 찌르는 고통조차 느낄 수 없었다. 화장실에서 토하고 뒹굴다가 기절하고 말았다. 새벽에 정신이 조금 들었는데, 아내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숨을 쉬지 않았다. 미친 듯이 아이를 안고 병원을 찾아갔다. 아이의 심장에 여러 번 충격을 주었지만 아이의 몸은 이미 싸늘해져 있었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 그 병원에 바로 입원했다가 이틀 후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성경을 던지고 박옥수 목사님의 사진도 던졌지만 내가 던질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과 목사님의 삶이었다. 병실에 누워 있던 나에게 아내가 박 목사님이 전화로 하신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김 자매, 아기는 이미 죽었어. 냉정해. 나도 죽고, 너도 죽고, 이 선교사도 죽어. 사람은 다 죽는 거야.” 아마도 이 마음이 지금까지 목사님을 이끌어서 복음의 길을 갈 수 있게 한 것이 아닐까 싶다. 목사님에게는 그 어떤 일도 크지 않았다. 죽음마저도 그냥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현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내게는 복음보다 큰 일이 있었다. 더 이상 복음을 위해 살지 못하도록 할 수도 있는 큰 일이 나에게는 존재했다.
 바룩은 고통스러웠다. 하나님이 심으신 것을 뽑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바룩에게 말씀하셨다. “너를 위해 대사를 경영하지 말라.” 생명을 얻는 일보다 더 큰 일로 여겨지는 일이 있다면 모두 버려져야 할 육체에 속한 것들이다. 아무리 하나님이 하셨고, 하나님이 심으신 일들이라 하더라도 생명을 얻는 일보다 더 크게 내 마음에 자리 잡아 복음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마저 잃게 한다면 다 육인 것이다. 하나님이 육에 속한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으시고 뽑고 허물겠다고 하셨다. 복음을 전하는 일보다 더 큰 일은 없다.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문제가 일어나더라도, 그 어떤 것을 잃어버리더라도 생명을 얻는 일을 포기하게 하는 일은 하지 말고 받아들이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베냉의 권영 사모님이 돌아가시고 한국에서 장례식을 치른 다음날, 박옥수 목사님은 사택에서 선교사님들과 모임을 가지시면서 베냉의 김광운 선교사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네가 슬퍼하는 것을 오늘까지는 받아주겠네. 하지만 내일부터는 용납하지 않겠어.” 그날 나는 ‘선교사는 아내를 잃어도 울 권리조차 없는 사람이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 선교사에게 생명을 얻는 일보다 더 큰 일은 없다. 그 일이 어떤 일이든지 간에….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진짜 그런 것 같다. 21일간 이름도 없이 우리 곁에 있었던 아이였지만 마음 한구석에 남아서 내 마음을 낮추어주곤 한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예배당을 옮길 때의 일이다. 형제 자매들과 한 달이 넘도록 예배당을 구하러 다녔지만 교회로 쓰기에 적합한 집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동네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서 혼자 나갔다가 정말 좋은 집을 발견했다. 부동산 중개업체가 관리하는 집이어서 그곳 사람과 함께 집을 구경했다.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넓은 거실과 선교학교 숙소와 복음반 강의실로 사용할 만한 방이 있었고, 도로변에 위치한 크고 실용적인 집이었다. 하지만 가격이 비쌌다. 월세가 600달러나 되어서 400달러까지 깎아보려고 했는데, 부동산에서 500달러 이하로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집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에 돌아와 기도하는데, 기도할 때마다 그 집이 떠오르고 다른 집을 봐도 그 집만 생각났다. 
 새벽에 기도하는데 문득 ‘그 집에 주인이 살고 있다면 근처 미장원에 주인 아주머니의 전화번호를 아는 사람이 분명히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곳 사람들은 이웃의 개인정보를 절대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그런데 미장원은 좀 달랐다. 미장원에서 전화번호를 받아서 주인 아주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주인 아주머니 역시 집세를 깎아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며칠 동안 찾아가 은혜를 구했더니 우리의 요청을 받아주었다. 준비된 돈은 없었지만 선교회 본부의 지원을 받아 집세를 지불하기로 하고 그 집으로 이사했다.
 그때부터 부동산 중개업체에서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집주인을 고소하겠다고 협박했다. 자신들과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우리와 계약했다는 게 이유였다. 나에게도 경찰에 고발하겠다는 협박 편지를 한 달이 넘도록 1주일에 세 통씩 보냈다. 제법 규모가 큰 외국계 부동산 업체여서 체계적으로 압박을 가해왔다. 그때까지 집세도 못 낸 데에다 계약서도 쓰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주인이 집을 비워달라고 했다. 은혜를 구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이사간 집에 인터넷을 설치하는 일이 시급했다. 인터넷은 한국 교회의 마음을 흘러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기에 나에게는 정말 중요한 문제였다. 인터넷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화국에서 전화선을 연결해주어야 하는데, 집 계약서가 없으면 전화국에 연결 신청을 할 수 없었다. 기도가 되었다. 한 형제가 동사무소에서 서류를 만들면 그 서류로 전화연결 신청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감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형제가 일곱 장 분량의 서류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서명하라고 했다. 형제에게 서류를 작성하는 데 비용이 얼마나 들었냐고 물어보았다. 인지대 외에 약간의 돈을 동사무소 직원에게 주었다고 했다. 합법적인 서류가 아니기에 뒷돈을 좀 주어야 한다고 하는 형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제님, 저는 한 번도 형제님에게 이런 식으로 일하는 것을 가르쳐 드린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박 목사님으로부터 이런 방법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렇게 일할 수 없습니다. 지금 나에게 인터넷이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더 잘 아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일하실 것입니다.” 형제 앞에서 일곱 장의 서류를 찢어버렸다.
 하나님은 신실하게 일하셨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절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일하셨다. 형제가 다녀가고 이틀이 지난 후 방에 있던 아내가 소리치며 나왔다. “여보! 여보! 전화벨이 울려!” 방에 들어가서 조심스럽게 전화기를 들었다. 신호음이 ‘띠’ 하고 울렸다. 그날 예배 시간에 전화가 연결된 간증을 하자 형제가 내게 다가와서 “선교사님,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그로부터 한 달 반 가까이 인터넷을 공짜로 사용했고, 그 후 전화가 끊겼다. 그리고 정확히 사흘 뒤에 주인과 집 계약서를 작성했고 다음날부터 전화를 연결해 다시 사용했다. 그때 누가, 왜, 어떻게 전화선을 연결시켰다가 끊었는지 아직까지 아무도 모른다. 분명히 아는 사실 한 가지는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행하셨다는 것이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34:8~10)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성경 지식을 많이 안다는 뜻이 아니다. 식탁에 차려진 국 안에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 보면 알 수 있고 냄새도 맡을 수 있지만, 맛보지 않으면 국에 대해 평가할 수 없다. 이처럼 하나님의 맛을 보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어떻게 하나님의 맛을 볼 수 있는가? 하나님을 맛보려면 하나님께 피해 보면 된다. 성경은 그렇게 말한다. 수많은 방법이 있어도 하나님께 피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는 것 같다. 삶 속에서 필요를 느끼는 것은 부족하기 때문인데, 여호와를 찾으면 부족함이 사라진다고 하셨다. 집을 얻고 전화를 설치하고 인터넷을 사용한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하나님의 맛을 본 것이 정말 감사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