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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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정도(코트디부아르 아비장교회 선교사)
  • 승인 2016.06.28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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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수기 7회
 

생명보다 귀한 것
2003년 어느 날 좀처럼 꿈을 꾸지 않는 아내가 꿈을 꾸었다고 했다. 당시 선교학생이었던 도마 형제(현 디보교회 목사)가 꿈속에서 나에게 대들더라는 것이다. 도마 형제는 성격상 그렇게 할 사람이 아니었기에 아내에게 개꿈을 꾸고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고 핀잔을 주었다.
 이튿날 새벽기도 시간에 도마 형제가 보이지 않아서 선교학생들에게 도마 형제가 왜 안 보이냐고 물었더니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선교학교 숙소에 가서 도마 형제를 불러오라고 했다. 잠시 후 도마 형제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나에게 와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어제 저녁부터 아파서 잠을 못 자다가 새벽에 겨우 눈을 조금 붙였는데, 이렇게 아픈 나를 깨웁니까?” 형제는 몸을 획 돌려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도마! 도마!” 나는 도마 형제를 불러서 이야기를 하려 했지만 형제는 들은 체 만 체하고 갔다. 한 번도 그렇게 행동한 적이 없고, 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 형제이기에 어이가 없었다. 점심시간에 도마 형제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선교학교 숙소를 찾아갔는데, 도마 형제가 너무 미안해하면서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모르겠다며 연신 용서를 빌었다. 형제와 교제를 나누고 나오는데 아내가 말했던 꿈 이야기가 생각났다.
 1주일쯤 뒤 잠자던 아내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펑펑 울어서 흔들어 깨웠더니 나를 안고 다시 펑펑 울었다. 잠시 후 안정을 찾은 아내가 꿈 이야기를 했다. 꿈에서 코트디부아르에 전쟁이 일어났고, 한국대사관에서 대피하기 위해 공항으로 가라는 연락이 왔다. 아내는 도희와 두 명의 단기선교사들과 함께 공항으로 가려고 나를 찾았는데, 아무리 찾아도 내가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네 사람만 공항에 갔고, 공항에 마련되어 있던 군용 수송기를 타고 가나로 갔다. 가나 교회에 도착하여 코트디부아르 소식을 보기 위해 TV를 켰는데, TV에서 내 시체를 보았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가 박옥수 목사님과 사모님을 만나서 부둥켜안고 울고 있는데 내가 깨운 것이다.
 그리고 이틀 후 전쟁이 터졌다. 한국대사관에서 급히 공항으로 피하라는 전화가 왔다. 박옥수 목사님도 안전한 곳으로 피하라고 연락을 주셨다. 아내와 도희, 단기선교사 자매들이 공항으로 갈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생각해 보았다. 내가 선교학교에 있을 때 박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이 있다. 복음 전도자는 항상 세 가지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첫째, 언제나 복음을 전할 준비. 둘째, 언제나 떠날 준비. 셋째, 언제나 죽을 준비. 목사님은 당신의 삶을 통해 복음 전도자의 삶을 가르쳐 주셨다.
 한번은 박옥수 목사님이 미국 전도집회를 마치고 페루 집회에 강사로 가셔야 했다. 당시 목사님의 심장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페루에 가시는 것을 만류했는데, 목사님은 남미 형제 자매들이 기다리는 집회에 계획대로 가서 말씀을 전하셨다. 집회 첫째 날, 강대상 뒤에서 말씀을 전하려고 기다리던 목사님이 가만히 대기실로 내려가셨다. 목사님이 돌아오시지 않고 말씀을 전할 시간이 지체되자 페루 선교사님이 대기실로 가셨다. 박 목사님은 대기실에서 윗옷을 벗은 채 가슴을 두드리면서 “하나님!” 하고 울부짖고 계셨다. 부정맥으로 인해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면서 멈추기도 했기에 가슴을 치셨던 것이다. 목사님은 옷을 입고 다시 강단에 올라가셨는데, 힘들 때마다 청중들에게 기도해달라고 부탁하면서 마지막 시간까지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박옥수 목사님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기도했던 기억이 났다. 걱정도 했지만 한편으로 감사했다. 내가 삶을 보고 따를 수 있는 분이 계신 것이 큰 복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박 목사님은 생명보다 귀한 것이 있음을 보여주셨다. 복음과 교회는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이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어떤 결정이 복음과 교회에 덕이 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박옥수 목사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말씀을 기억할 수 있었고, 목사님과 마음으로 교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코트디부아르에 남아 있기로 결론을 내렸다. 아내와 도희, 단기선교사 자매 두 명은 공항에 준비되어 있던 군용 수송기를 타고 가나 교회로 갔다. 아내가 꿈에서 본 일이 현실에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살아 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꿈을 정말 잘 믿는다. 그래서 악몽이라도 꾸는 날이면 두려움에 잡혀서 헤어나지 못한다. 내 간증이 이런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을 본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렘 23:28)
 이 일이 있은 후 형제 자매들이 교회를 향해 마음을 활짝 열었고, 교회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공항 가는 길
2011년에 다시 전쟁이 터졌는데, 상황이 너무 심각해서 피할 수도 없었다. 그해에 아이티에서 열리는 전도집회에 참석하려고 비행기 표를 사두었지만 상황이 점점 심각해져 갔다. 아침과 저녁은 통행금지 시간이어서 이동이 불가능했고, 오고 가는 차량은 아예 없었다. 아이티로 출국예정일 전날 한국 교회에서 연락이 왔다. 가능하다면 아이티 집회에서 사용할 전도용 책자를 가지고 참석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불어로 된 전도 책자를 코트디부아르에서 제작했기 때문에 책자를 가져다주기 위해서라도 아이티에 가야 했다. 안데아 형제에게 여행이 가능한지 알아봐 달라고 했는데, 형제가 한참 동안 알아보더니 공항까지만 가면 비행기를 탈 수 있다고 했다. 무척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기에 아이티에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에 차를 점검했는데, 기름이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주유소가 모두 폐쇄되었기 때문에 가지 못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교회 근처에 사는 아꾸베 형제가 자신의 차를 몰고 와서 “목사님, 제가 공항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했다. 형제의 차에는 공항까지 갈 수 있는 정도의 기름이 들어 있었다. “형제님은 어떻게 돌아오려고요….” “목사님이 복음을 전하러 가시는데 가셔야죠. 저희들이야 어떻게든 되겠지요. 다른 걱정은 마시고 일단 타십시오. 그 다음 문제는 저희들이 알아서 하겠습니다.” 아꾸베 형제가 운전하고, 죠엘 형제가 동행했다.
 시내까지 가는 길에 차가 한 대도 다니지 않았다. 헌병대 곁을 지나는데 초소에서 우리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우리는 모두 한 손을 차창 밖으로 내놓고 천천히 차를 몰았다. 높은 건물 위에 있는 군인들이 모두 우리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렇게 시내를 통과할 무렵 트럭 한 대가 우리 차 옆을 지나가는데, 무장한 군인들이 엎드린 자세로 우리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시내를 빠져나와 다리를 건너는 중에 죠엘 형제가 갑자기 말했다. “목사님! 앞에, 앞에….” 총을 든 청년들이 차를 한쪽으로 대라는 신호를 보냈다. 차를 세우자 청년들이, 차에서 내려서 엎드리라고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밖으로 뛰어나가 포복했다. 당시는 전쟁의 양상이 기독교인과 무슬림 사이의 전쟁으로 전이되고 있던 때라 종교가 다르면 서로 죽이는 상황이었다. 청년들이 우리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너희들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제가 목사인데, 아이티에 전도집회가 있어서 공항에 가는 중입니다.”
 죠엘 형제 뒷주머니에 포켓성경이 있었는데, 한 청년이 그 성경을 보고 “예수 믿는 놈이 왜 이렇게 떨어?”라고 말하며 자신들은 무슬림이라고 했다. 건너편 길에는 10여 명의 청년들이 두 손을 들고 발가벗은 채 끌려가고 있었다. 한 청년이 말했다. “야, 다 죽이고 차는 우리가 쓰자.” 그런데 다른 한 청년이 반대하며 “죽이지 말고 그냥 보내줘”라고 했다. 두 청년이 잠시 말다툼을 하더니 반대하던 청년이, 차를 타고 빨리 가라고 했다. 우리는 급히 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에르만 형제가 시동을 건 채 핸들만 붙잡고 있었다.
 “형제, 빨리 가야 해.”
 “예, 목사님.”
 에르만 형제의 다리가 풀려 액셀 위에서 발이 미끄러지고 있었다. 차가 멈추어 있던 10초가 10년처럼 느껴졌다.
 공항 가까운 주유소에 이르렀는데, 주유소 맞은편에 세워져 있던 트럭 뒤에서 사람들이 선 채로 불타고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주유소에서 갑자기 청년들이 튀어나오더니 우리에게 내리라고 손짓했다. 차에서 내려 바닥에 엎드렸다. 바로 앞에 있는 타이어 안에서 사람이 불타고 있었다. 청년들은 우리 윗옷을 벗기고 몸을 뒤지면서 “야, 죽이고 차를 빼앗자”라고 했다. 하지만 신기하게 하나님은 그곳에도 우리를 돕는 자를 준비해 두셨다. 한 청년이 와서 우리에게 차에 타라고 하더니 빨리 가라고 했다.
 드디어 공항 진입로에 들어섰는데, 전방에 프랑스 군인들이 탱크를 세워놓고 길을 막고 있었다. 우리 차가 다가가자 차를 세우고 내리라는 신호를 했다. 그리고 한 사람만 오라고 손짓했다. 내가 가서 공항에 가는 이유를 설명했다.
 “지금 비행기가 운항한다고 생각합니까?”
 “예, 제가 알아본 바로는 운항한다고 들었습니다.”
 “아무튼 이 길로는 통행할 수 없으니 돌아서 가십시오.”
 돌아서 가는 길에는 대학생 기숙사들이 있는데, 당시 대학생들은 한국 사람이라면 이를 갈았다. 대학생들과 기독교인들은 정부군을 지지했고, 유엔과 프랑스군, 무슬림이 반군을 지지하는 상황이었는데, 유엔 사무총장과 유엔 특사로 코트디부아르에 파견된 분이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대학생들이 한국인을 그들의 적으로 인식했기에 한국 사람인 내가 그 길을 통과한다는 것은 참으로 암담한 일이었지만 다른 길이 없었다.
 기숙사 앞을 지나가는데 아니나 다를까 대학생들이 총을 들고 차를 세웠다. 또 다시 차에서 나가 땅에 엎드렸다. 학생들이 “너 뭐야? 한국 사람이야, 중국 사람이야?”라고 묻는데, 정말 난처했다. 형제들이 보고 있는 상황에서 살려고 중국 사람이라고 하자니 부끄럽고, 한국 사람이라고 하자니 죽음이 두려웠다. 대답을 하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때도 한 학생이 나타나 나를 도와주었다. “보면 몰라? 중국인이야. 어서 차에 타세요.” 학생은 다른 학생들과 잠시 승강이를 벌인 후 우리를 그곳에서 벗어나게 해주었고, 공항까지 세 개의 학생 검문소를 통과해야 했는데, 마지막 검문소까지 따라오면서 우리를 도와주었다.

“비행기는 없으니 돌아가세요!”
공항에 도착하여 몇몇 사람들에게 비행기가 운항하는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런데 모두 우리를 미친 사람 취급했다.
 “지금 전쟁 중인데 비행기가 다닌다니,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비행기가 운항한다고 누가 그래요? 도대체 어디에서 오신 거예요?”
 “앙그레에서 왔습니다.”
 “앙그레요? 그 먼 길을 통과해서 여기까지 왔다고요? 아무튼 비행기는 없으니 돌아가세요.”
 자동차에 기름도 없고, 온 길을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너무 위험했기 때문에 공항 근처에 있는 지역 교회에 가기로 했다. 지역 교회까지는 다섯 군데의 검문소를 통과해야 했다. 정부군 쪽 사람들과 반군 쪽 사람들을 번갈아 만나면서 지나가는데, 나는 어느 편을 만나도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어느 편을 만나도 문제가 안 되었다. 정부군 쪽 사람들을 만나면 내가 목사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반군 쪽 사람들을 만나면 한국 사람인 것을 강조했다. 네 개의 검문소를 무사히 통과해 다섯 번째 검문소에 다다랐는데, 문제가 심각했다. 바리케이드가 세 겹으로 쳐져 있었고, 감정이 무척 격해진 무슬림 청년들 수십 명이 보였다. 그들은 복면을 쓰고 칼을 들고 ‘머리를 잘라버리겠다’고 고함을 지르면서 차를 두드렸다. 이제는 정말 끝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다행히 한 청년이 나타나 우리를 도우려고 했지만 상황이 조금 달랐다. 한 사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죽이지는 않을 테니 돌아가!”
 “차에 기름이 없어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죽여주지.”
 그때 마침 다른 한 청년이 나타나 두 청년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걸고 수십 명의 청년들을 밀치며 바리케이드를 치우더니 길을 열어주었다.
 지역 교회에 도착하여 다음날부터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을 초청해 집회를 했다. 두 주간의 집회를 마치고 나니 상황이 조금 안정되어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주유소가 모두 문을 닫았는데, 한 형제가 어디서 구해왔는지 휘발유를 가져왔다. 돌아갈 때 역시 대학교 기숙사 검문이 위험했는데, IYF 티셔츠를 입고 복면을 한 대학생이 우리를 지켜 주었다.

“네가 만일 천한 것에서 귀한 것을 취할 것 같으면”
집에 돌아와서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보았다. 공항이나 여행사에 물어보지 않고 아는 사람에게 전화해 그 사람이 자기 생각을 말한 것을 듣고 사실인 양 내게 전해준 안데아 형제(그날 이후 안데아 형제의 별명이 거짓 선지자가 되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믿고 목숨을 걸고 공항에 간 나,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그런 나와 함께해 준 아꾸베 형제와 죠엘 형제. 이솝 우화에 나오는 바보나라 사람들보다 더 멍청한 짓을 한 것이다. 다행히 이렇게 멍청한 사람들에게 그들을 지키고 돕는 하나님이 계셨다. “하나님은 나의 돕는 자시라.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드는 자와 함께하시나이다.”(시 54:4) 위기의 순간들이 정말 많았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당시 정부에서 정부 편의 청년들과 대학생들에게 5천 자루의 총을 나눠준 데에다 교도소가 폭격으로 무너지면서 수천 명의 수감자들이 탈출해 시내를 활보하고 다녔고, 반군들도 강도, 살인을 거침없이 자행해 분위기가 험악했다. 비록 이러한 전쟁 가운데에서 여러 달을 지냈지만 정말 행복했다. 전쟁으로 인해 사람들이 모두 집안에 갇혀 두려움에 떨고 있었기 때문에 가정 집회를 하기 좋았고, 특히 아파트 같은 곳은 입구를 막아 놓아 밖에 나갈 수 없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유롭게 집회를 할 수 있었다. 형제 자매들이 매일 집회 소식을 보내왔다.
 교회는 피난처였다. 40여 명의 형제 자매들이 늘 모여서 낮에는 가까운 곳으로 전도하러 가고, 저녁에는 모임을 마친 후 마피아게임이나 윷놀이 등을 하면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한 동네에서 우리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무장한 군인들이 교회에 와서 ‘전쟁 중이니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조금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했다.
 “… 네가 만일 천한 것에서 귀한 것을 취할 것 같으면 너는 내 입같이 될 것이라…”(렘 15:19)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수 있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천한 것에서 귀한 것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전쟁 가운데 하나님이 준비하신 귀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교회를 지키시고 도우시는 하나님, 전쟁으로 마음이 갈린 사람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시간, 어떤 보석보다도 귀한 형제 자매들…. 코트디부아르에서 15년 가까이 지내는 동안 네 번의 큰 전쟁을 겪었다. 물론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아니면 얻을 수 없고 깨달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내가 싫어하고 천히 여기는 형편과 사람들일지라도 가만히 살펴보면 그곳에 정말 귀한 많은 것들이 숨겨져 있음을 알게 된다. 전쟁이 내게 그러한 시간들이었다.

 

몇 달 전 한국 수양회와 태국 월드캠프에서 사모님과 함께 꿈같은 시간을 보낸 것이 엊그제 같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으로 저희 가족, 단기선교사들, 형제 자매님들과 건강하게 하루하루 잘 지내고 있습니다.
회사와 은행,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았습니다. 총소리와 폭탄 소리가 끊이지 않지만 형편과 상관없이 매주 형제 자매님들이 모두 교회에 와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총소리가 들리는 중에도 교회와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자리를 뜨지 않고 말씀을 듣는 형제 자매님들이 정말 고마웠습니다. 아비장에서 이런 상황 중에 예배를 드리는 곳은 아마 저희 교회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청년들은 월드캠프를 위해 댄스 연습을 하고 구역별로 집회까지 하고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고 있습니다.
이번 주는 전쟁 상황이 더 심각해졌습니다. 지방의 도시들을 다 점령하고 내려온 반군과 정부군 간의 전면전이 아비장 시내에서 펼쳐졌습니다. 한 주 동안 전쟁의 도가니 안에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자기를 지지하는 모든 젊은이들과 대학생들에게 무기를 그냥 나누어 주어서 길거리에는 총을 든 수많은 군인들과 혼란을 틈타 강도로 변해버린 총을 든 젊은이들이 활보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골로 도망가고 시내가 썰렁합니다. 다행히 50여 명의 피난 나온 형제 자매님들이 저희들과 함께 교회에 있습니다.
어제는 참 많이 울었습니다. 3천 명의 죄수들이 교도소에서 탈출했고, 주유소와 슈퍼마켓이 털리고 강도로 변한 반군들과 총을 든 젊은이들이 민간인의 집에 들어가 물건을 빼앗아서 그 물건을 집주인의 차에 싣고 타고 가버립니다. 형제 자매들이 두려움 속에서 교회에 전화를 하고, 하루 종일 그들과 교제하며 지냅니다.
오늘은 저희 교회 짐차가 총을 든 젊은이들에게 강탈당했습니다. 우리 눈앞에서 사라져가는 차를 보는 저희들 마음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헬리콥터 소리와 총소리, 폭탄 소리가 나는 와중에 저녁식사를 준비하는데, 창문으로 총알이 튕겨 들어올 것 같아 심장이 몇 번이나 멈추는 것 같았습니다. 참을 수가 없어서 방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특히 시편 말씀으로 마음을 추스른 뒤 다시 밥을 했습니다. 밥과 풀소스
(장을 볼 수 없어서 밖에 나가 풀을 뜯어 와서 소스를 만들었다)가 준비된 저녁상 앞에서 아이들과 단기선교사들은 철없이(?) 맛있다며 밥을 먹는데, 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다시 방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날 밤 무장한 프랑스 군인들이 여러 대의 전차를 대기시켜 놓고 대문을 두드리며 프랑스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마치 그들은 자국민을 다 찾아가고 난 뒤 이곳을 폭탄으로 전멸시켜 버릴 것 같았습니다. 불안감에 나도 모르게 “도대체 한국 대사관은 뭐하는 거야!” 하고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습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던 하나님을 향한 불신이  폭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허락하신 약속을 믿지 않는 저를 보면서 또 한 번 울었답니다.
사모님, 얼마 전 태국 월드캠프에서 사모님과 보낸 시간들을 자주 생각합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금방 행복해져요. 함께 밥해 먹고 말씀을 들으면서 함께 울고 웃었던 시간들…. ‘내가 이런 은혜를 입어도 되나?’ 하는 마음에 정말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특히 새벽에 말씀을 들으면서 제 노트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하나님, 저도 말씀 외에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고 그것들이 발붙일 수 없는  마음으로 살게 해 주세요. 하루만이라도 좋사오니….” 그 하루가 바로 오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제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시 39:9)
‘하늘나라는 나의 현명한 판단, 좋은 것을 신청하지 않고 말씀만을 신청한다’고 하신 사모님의 이야기를 생각하는 동안 하나님이 저에게 약속하신 수많은 말씀들을 믿도록 하시는 걸 보았습니다.
어제는 선교학교 자매와 전도하러 나갔다가 진리에 굶주려 있는 분을 만났습니다. 세 시간 넘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분이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때는 총소리도 안 들리더라고요. 하나님이 이런 기쁨과 행복을 제게 주셨는데, 형편에 마음을 금방 빼앗겨버린 것 같습니다.
사모님, 저희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오늘 저녁에도 총소리와 폭탄 소리가 들리지만 편지를 쓰는 동안 사모님이 옆에 계신 것 같아 평안합니다. 그럼 건강하시고 안녕히 계세요. 
2011.4.1. 코트디부아르에서 김숙희 자매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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