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사십이 되매...사십 년이 차매...
나이 사십이 되매...사십 년이 차매...
  • 박영준(부산대연교회 목사)
  • 승인 2016.06.28 14: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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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삶

40년이 찼을 때 ‘이제 되었다’ 하시며
사도행전 7장에는 모세의 인생이 그려져 있습니다. “나이 사십이 되매…, 사십 년이 차매…” 성경은 이처럼 40세까지의 모세, 40세부터 80세까지의 모세, 그리고 80세 이후의 모세로 그의 인생을 구분 짓고 있습니다. 나이 40이 되는 것은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되는 것이지만, 40년이 찼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시간 동안 모세를 만드는 시간을 채워 가셨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40세가 되었을 때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히브리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 하려고 하지만 문제만 일어납니다. 애굽 사람을 죽이고, 그를 모래에 숨기고, 도망가고…. 모세가 하는 일을 보면, 그가 하나님을 찾지 않고 자신이 중심이 되어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일이 실패로 끝나고 그는 광야에서 40년을 보냅니다. 그리고 40년이 찼을 때 하나님께서 ‘이제 되었다, 나와라’ 하시며 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일하십니다.

“말씀을 좇아 나아갔지만 못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80세에 모세를 부르셔서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하십니다. 모세가 그 말씀을 좇아 발을 내디뎠을 때 문제가 찾아옵니다. 바로의 마음이 더욱 강퍅해져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히브리 사람들도 등을 돌리며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너 때문에 오히려 고역이 더 심해지고 어려움을 더 당한다. 전에는 짚이라도 주면서 일을 시켰는데, 이제는 짚도 주지 않으면서 같은 수의 벽돌을 만들어내라고 한다.”
 바로의 술사들도 모세가 행하는 이적들을 행하여 바로의 마음을 더욱 닫게 만들었습니다.
 이때 모세는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앞에 항복합니다. “당신의 말씀을 듣고 나아갔지만 이제는 못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나에게 등을 돌리고 바로는 강퍅해졌습니다. 저는 이 일을 못 하겠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출 6:1)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너보고 이끌어 내라는 것이 아냐. 내가 할게. 너는 내가 일하는 것만 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이 말씀을 받은 후 비로소 ‘내가 하는 게 아니네요. 하나님께서 하시겠네요’라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실패를 통해 기대를 하나님께로 옮기고

 

모세가 가진 마음이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약속하셨지만, 그 약속을 모세가 이루려고 했을 때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아픔과 고통만 있었습니다. 모세가 그 약속을 다시 하나님께 넘기며 자신은 못 하겠다고 했을 때,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이루시면 되겠습니다’라는 마음을 갖게 되고,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힘과 의지를 완전히 빼내길 바라시는 것입니다. 온전히 하나님만 일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약속하셨지만, 이것은 나보고 하라는 것이 아니야. 내가 일하면 수고와 괴로움뿐이고, 하나님께서 일하시겠구나.’ 이 마음이 형성된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며 쉴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75세 때, 아들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99세 때까지 아들이 없자, 아브라함은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주실 거라고 여겼지만 안 주시자 자신이 그 약속을 이루려고 한 것입니다. 그 후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아이를 낳을 수 없는 형편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죽어 있던 사라의 태를 통해 이삭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힘이 1퍼센트라도 섞이는 것을 싫어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실패하는 일을 통해 우리 기대를 하나님께로 옮기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고린도 교회에서 성도들이 나뉘고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성도끼리 싸워 법정에 서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고린도 교회를 향해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전 1:8) 사도 바울은 자신이 비워지는 단계를 통과했기 때문에 인간의 허물과 실수와 연약함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성도를 견고케 하신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아볼로가 있었지만 어려운 문제들 앞에서 교회를 이끌 수 없었는데, 바울은 편지만으로도 교회를 변화시켰습니다.
 안드레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여야 하는 상황 앞에서 자신의 판단과 생각이 있었지만 자기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결정권을 자신이 갖지 않고 예수님께 넘깁니다.
 지금 내 생각과 경험이 옳은 것처럼 보여서 그것을 의지하여 나아가다 보면, 얼마 동안은 문제 없이 잘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곧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거기에서 실패를 맛보고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서 떠나게 하는 도구, 십자가
거듭난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받은 약속의 말씀을 다시 하나님께 돌리고 하나님만 일하시는 위치에 들어가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쉽고 평안한 신앙생활이 시작됩니다. 이 위치에 가기 위해서는 통과해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가 하려고 했지? 그건 안 돼’ 하고 보여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을 믿는 마음을 발견하고 거기서 떠나게 하십니다.
 나에게서 떠나고 나를 끝내게 하는 도구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예수님의 상징으로 보지만, 사실 십자가는 내가 죽은 곳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십자가에서 자신이 죽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이 끝난 것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깁니다.
 요셉이 치리자가 되었을 때 애굽 왕이 요셉에게 모든 것을 맡겼고, 7년 흉년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서도 예수님이 주관하실 때부터 행복과 즐거움이 넘쳤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성경의 원리와 원칙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이 기쁘고 행복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세계에 들어가면 아침에 눈을 뜰 때 소망스럽고 밤에 눈을 감을 때 감사가 넘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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