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이런 말씀으로 전도 받지 못했다
한 번도 이런 말씀으로 전도 받지 못했다
  • 이보배(기쁜소식청양교회)
  • 승인 2016.12.05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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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간증

 

안식일의 규례를 지켜야만 구원받는 줄로 믿고 30년 넘는 세월을 살았다. 어느 날 율법을 지킬 수 없는 나 자신을 발견하며 깊은 회의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은 기적적으로 나를 건지셔서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안식을 찾게 해주셨다.

 

 

나는 1952년 충남 홍성에서 4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오빠와 셋째 남동생이 죽고 나와 6살, 9살 터울로 두 명의 동생이 태어났다. 아버지는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큰 부상을 입으셨기에 어머니가 시집살이를 하며 온갖 집안 살림을 맡으셔야 했다. 나는 어머니에게서 따뜻함을 느끼지 못하고 자랐다. 어머니는 나의 작은 실수도 용납지 않으셨고, 무슨 일에든 트집을 잡아 혼을 내고 때리셨다. 남동생이 잘못을 했어도 항상 아들 편을 드셨기에 동생들도 나를 무시했다. 아버지는 자상한 분이셨지만 어머니는 내게 차갑고 무서운 분이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미워하며 살았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일이 있다. 어머니는 시장에 가시고 나는 밖에서 깨진 그릇 조각을 주워와 집에서 혼자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시장에서 돌아오신 어머니가 다짜고짜 나를 때리셨다. 내가 아버지 밥그릇을 가지고 놀다가 깨뜨린 줄 아신 것이다. 잠시 후 방문을 열고 상 위에 아버지 밥그릇이 있는 것을 보신 어머니는 “어? 그릇이 여기 있었네?”라고 하실 뿐이었다. 나는 동생들을 돌봐야 하고 집안일을 해야 했기에 초등학교만 졸업했다. 친구들처럼 공부하고 싶어서 야간에 무료로 공부를 가르쳐 주는 곳에 나갔지만, 하루 종일 일하고 나면 너무 피곤해 수업에 빠지는 날이 많았다.
 일곱 살 무렵부터 동네 아이들과 어른들의 손을 잡고 교회에 다녔다. 집에서 엄마에게 구박만 받다 보니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는 교회가 좋았다. 찬송가를 부르고 예수님을 생각하면 행복했다. 교회가 10리나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멀다 하지 않고 다녔다. 내 마음을 위로해 주는 곳은 교회뿐이었다.

진리를 찾기 위해 갔던 안식교회
어머니가 계신 집을 빨리 떠나고 싶어서 읍내 미용학원에 다니며 기술을 배워 미장원에 취직했다. 홍성, 대천, 예산 등으로 미용실을 옮겨 일할 때마다 근처에 있는 교회에 다니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어느 날 몸이 너무 아파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자궁에 이상이 있다고 했다. 어머니는 내가 아이도 낳지 못할까 걱정이 된다며 결혼을 서두르셨고, 스물세 살에 중매로 결혼해 대전으로 이사했다. 남편은 잘 생기고 성격도 좋은 사람이었다. 결혼 후 1년가량은 열심히 다녔던 교회도 멀리할 만큼 신혼재미에 빠져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남편이 밖으로 돌기 시작했다. 남편의 마음을 돌이켜 보려 했지만 남편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마음이 어려워지자 다시 교회를 찾았다. 미용실 일을 마치면 어두컴컴한 예배당에 엎드려 남편이 바람을 피우지 않게 해달라고 울면서 철야기도를 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 앞에 옵니다.” 내 죄가 많아서 하나님이 어려운 일을 주신다는 생각이 들어 입이 닳도록 찬송가를 부르고 회개하며 기도했다. 할렐루야기도원, 오산리기도원, 용호산기도원 등 유명하다는 곳은 다 찾아다녔다. 그러나 남편은 여전히 여자를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어머니의 사랑도 받지 못했는데, 남편의 사랑도 받지 못하는 여자가 된 내 신세가 너무 서러웠다.
 세상에 의지할 데가 없자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더욱 커졌고, 성경도 보기 시작했다. 레위기를 읽으면서 율법에 관심이 생겼다. 한날은 미용실에 비디오를 빌려 주러온 아저씨와 이야기를 했다. “레위기 11장을 읽다 보니 음식을 가려먹는 이야기가 다 나오네요? 요즘도 이런 교회가 있나?” 아저씨는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예요!”라고 하며 아주 열심히 설명했다. 안식일은 원래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인데,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안식일을 일요일로 바꾸었기 때문에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잘못됐다고 했다. 아저씨 설명을 듣다 보니 ‘그럼 성경에 나오는 안식일을 지키는 교회가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안식교회 목사님이 미용실에 찾아왔다. 진실된 말씀을 듣고 싶었기에 목사님의 말씀이 아주 좋게 들렸고, 그 뒤로 7년간 열심히 안식교회에 나갔다.

구원받기 위해 열심히 율법을 지켰다
안식교회는 어떤 율법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서로 자기가 정통이라며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에 이왕이면 율법을 제대로 지키는 교회에 가야겠다고 생각해 박명호파 안식교회로 옮겼다. 그 교회는 세상과 분리된 산속 깊은 곳에서 오직 안식일과 율법을 지키기 위해 성도들끼리 큰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안식일인 금요일 해질 무렵부터 토요일 해질 무렵까지는 예배 외에 일체의 일을 하면 안 되기 때문에 금요일 아침부터 분주하게 그날 먹을 밥과 반찬을 미리 다 준비하고 집안 청소며 빨래 등 모든 일을 했다. 그리고 금요일 저녁 해가 뉘엿뉘엿해지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안식일을 시작했고, 다음날 새벽 4시에 예배에 참석하고 아침을 먹고 9시에 다시 예배를 드렸다. 중간에 잠깐 쉬는 시간 외에는 다시 점심을 먹고
 2시에 기도 모임을 하고 저녁을 먹고 예배를 드렸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징계를 받기 때문에 세상이 무너져도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모든 일상이 안식일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결혼식과 장례식은 물론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해도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다 보니 가족과 친척들과 자연스레 인연이 끊어졌다. 안식일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어려움은 감수했다.
 또한 남편이나 아내 중에 한 사람만 안식일 교인인 경우에는 ‘짝믿음’이라고 부르며 이혼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도 남편에게 안식일만큼은 꼭 지켜달라고 당부했지만 신앙에 관심이 없는 남편이 안식일을 지킬 리 만무했다. 박명호파 안식교회에 들어가고 2년 뒤 나도 이혼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성도들끼리 함께 사는 모습이 처음에는 무척 좋았다. 새벽 4시 기도회로 하루를 시작하고, 모든 성도들이 열심히 일해 번 돈을 다 모아 공동으로 물품을 구매하고 나눠 썼다. 먹을 것은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했다. 고기류는 부정하여 먹지 않고 곡물과 야채, 견과류, 과일 등을 먹었다. 다른 교회보다 율법을 잘 지킨다고 생각하니 누구보다 거룩해지는 것 같았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열심히 봉사하며 살았다.
 그러나 지켜야 할 율법이 많은 만큼 어기면 따라오는 징계가 많았다. 새벽 기도 참석 여부를 항상 체크하고, 자주 빠지면 경고를 받아 금식하고 벌금을 내고 14일간 특별 교육을 받았다. 또 일반 직장에 다닐 수 없기 때문에 주로 육체 노동일을 했는데, 돈을 벌기 위해 마을 밖을 나가거나 다른 이유로 마을을 벗어나는 경우가 있으면 꼭 담당자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또 안식일에 집으로 돌아올 수 없어서 다른 지역에서 예배할 경우에도 꼭 보고해야 하는 등 일거수일투족을 다 관리받았다.

‘내가 아무리 지키려고 애써도 율법을 다 지킬 수 없구나.’
어느 날 박명호의 비리가 언론에 보도되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혼란을 겪으며 흩어졌다. 마을을 떠나는 사람도 많았다. 박명호는 자신이 이 시대의 예수라고 신격화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낳았다고까지 설교했다. 진리와 너무 먼 말씀을 전하는 것이 이상했다. 그 집단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처음 마을에 들어올 때 재산을 다 드렸기 때문에 나갈 때는 빈손으로 나가야 했다. 가진 것도 하나 없고 가족 친지들과 인연도 다 끊어진 상황이기에 어디로 가야 할지 너무 막막했다.
 내가 본격적으로 탈퇴를 고민한 것은 2년 전의 일이다. 그동안 율법을 지키면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살았는데, 점점 고통스러웠다.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율법을 알면 알수록 지켜야 할 것이 점점 늘어났고, 지킬 수 없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마음에서 미워하면 살인한 자요, 음란을 품으면 간음한 자라고 하는데, 내 마음에는 수시로 미운 마음이 올라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특히 안식일에 형제 자매들과 만나면 다른 형제 자매를 헐뜯고 욕하는 일이 많았다. “아이고, 저 형제는 왜 저러는 거지? 저 사람은 왜 저래?” 미운 마음을 이야기하고 뒤돌아서서는 용서해달라고 기도했다.
 무엇보다 나를 짓눌렀던 것은 바로 어머니를 미워한 죄였다. 어려서부터 구박만 받고 자랐기에 나는 단 한 번도 어머니가 좋다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말끝마다 나를 무시하고 구박하신 어머니가 너무 미웠고, 기도할 때마다 그 죄를 회개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율법 때문에 20년 동안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수백 가지 율법을 지키며 안식일을 섬겼지만 내 마음에 올라오는 생각들은 도저히 다스릴 수 없었다. ‘이게 아니구나. 내가 아무리 애써도 율법을 다 지킬 수 없구나.’
 나를 힘들게 한 또 하나는 마음의 어려움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고민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서로 감시자가 되어 사는 삶이 너무 괴로웠다.
 내가 있었던 안식교회에서는 녹화된 박명호의 설교를 듣고, 그가 쓴 11권짜리 책만 보기 때문에 성경을 시시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진리를 알고 싶은 마음이 있어 성경도 갖고 다니며 읽었다. 죄 때문에 고통이 심해지면서는 성경을 더 가까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다 이루었다”고 하셨는데, ‘예수님이 불완전한 분이셨는가? 박명호는 왜 자신이 예수라고 하는 거지?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시는 분인가?’ 점점 의심이 갔다.

“보배야, 우리가 속았다”
마을을 떠나고 싶어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을 즈음 가장 친했던 친구 ‘오사랑’이 퇴출당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큰 충격이었다. 그 친구는 아주 충성되게 일했던 사람으로, 인터넷에 게재된 박명호에 대한 안 좋은 기사를 삭제하는 일을 했다. 궁금해 알아보니, 인터넷 기사들이 실제 사실인 것을 알게 되어 회의를 느끼다가 기쁜소식선교회의 박옥수 목사님이 전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진리를 만났다. 남편과 같이 말씀을 들으며 가장 믿을 만한 부부에게 전도했는데, 그들의 신고로 추방당했다고 했다. 추방당한 사람과는 일절 상종하지 않는데 우리는 친했던 사이라 내가 그 친구에게 연락했다.
 “사랑아, 어떻게 된 거니?”
 “보배야! 보배야! 우리가 속았어. 기쁜소식선교회 박옥수 목사님이 우리가 구원받는 일이 다 이루어졌대.”
 “야, 맞다. 내가 요한복음 읽었는데, 다 이루었다고 나오더라. 나도 일 년간 고통하며 말도 못 하고 있었는데....”
 “기쁜소식울진교회 목사님께 부탁할 테니 너도 얼른 나와.”
 바로 나가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이 눈치를 채면 빈 몸으로 강제 퇴출되기 때문에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친구가 소개해준 기쁜소식울진교회 문민식 목사님을 만나, 2015년 1월에 처음으로 기쁜소식선교회 겨울수양회에 참석했다. 금요일부터 안식일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목요일 하루만 참석했다. 그 뒤로 다시 수양회에 이틀 참석했지만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 때문에 불안해서 그러했는지 말씀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때 내가 수양회에 모시고 갔던 어머니는 마음이 열려 말씀을 듣고 구원을 받으셨다. 어머니는 “여기 말씀이 맞다.”고 하셨지만 나는 오로지 ‘사이비집단을 나가야 한다’는 마음만 가득했기 때문에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2016년 2월 기쁜소식울진교회 목사님의 도움으로 30여 년 만에 박명호파 안식교회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내가 사마리아 여자구나’
동생의 도움으로 충남 청양의 한 마을에 정착했다. 이사를 도와주신 목사님께는 감사했지만 더 이상 율법에 매여 살기 싫어서 어떤 교회에도 다니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예수님을 버릴 수는 없기 때문에 마음으로만 믿고 살기로 했다. 친구 사랑이는 기쁜소식문경교회에 나가며 예전에 전도사로 활동한 경력 까닭에 ‘초교파 목회자 세미나’에 다니고 있었다. 기쁜소식선교회에서 성경세미나가 있을 때마다 나를 계속 초대했다. 그러나 교회에 다닐 생각이 없다 보니 말씀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올 가을에도 사랑이가 서울에서 갖는 성경세미나에 오라고 수차례 전화했다. 내가 절대 가지 않겠다고 하자 초교파 목회자 세미나에 참석하자고 했다. 예전에 일요일에 예배드리는 교회를 알고 싶어서 몰래 감리교사이버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전도사 자격증을 딴 적이 있었다. 그런 나를 생각해 주는 친구의 마음이 느껴져 참석했다. 첫날 집회 장소에 가니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표어가 무대에 붙어 있었다.
 ‘저 말씀을 받아들이면 내가 이 교회의 율법에 얽매이겠구나.’라는 생각 때문에 말씀은 듣지 않고 졸기만 했다.
 그런데 두 번째 날은 달랐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에 대해 말씀하실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지며 말씀 하나하나가 내 가슴에 와 닿기 시작했다.
 “가서 네 남편을 데려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요4:16~18)
 ‘아, 내가 사마리아 여자구나!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까 하며 참 남편을 찾으려고 30년 세월을 보냈는데, 내가 바로 사마리아 여자구나!’ 하는 마음이 든 순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듯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어느 누구보다 믿음 생활을 잘하려고 발버둥 쳤지만 결국은 율법을 지키고 지키다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신앙을 그만두어야겠다고 포기한 내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하나님이 내 강퍅한 마음을 하나하나 벗겨내셨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었구나.”
다음 날인 수요일 오전 집회를 마치고 오후에 초교파 목회자 세미나에 참석한 중국인 현지 사역자들과 한국의 몇몇 목회자들이 기쁜소식강동교회로 갔다. 사랑이와 나는 행사에 참석하지 않고 버스 안에서 말씀에 대해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강성채 목사님이 버스에 오셨고, 사랑이가 목사님께 나를 교제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내가 사는 청양에서 사역하는 목사님이었다. 강 목사님은 로마서 3장 23~24절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하는 말씀과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사하기 위해서 당신의 피를 땅에 있는 성소에 뿌리지 않고 하늘에 있는 성소에 뿌리셨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 말씀들이 내 마음에 고스란히 심겨지며 내 죄가 다 사해진 사실이 믿어졌다.
 그때부터 성경 세미나에서 박옥수 목사님이 전하시는 말씀이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어떻게 하면 율법을 더 잘 지킬 수 있을까?’ 하여 가족 친지도 등지고 모든 것을 버리고 살았는데,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이미 다 사하신 사실이 너무 놀라웠다. 
 모세의 율법에 나온 제사법을 따라 드리는 소와 염소의 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지만 예수님이 하늘 성소에 단번에 뿌린 피로 말미암아 내가 값없이 구원을 얻었다는 말씀을 들으며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사가 흘렀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었다니...” 하며 연신 놀랄 뿐이었다.
요한복음 1장 29절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다.”라는 말씀의 뜻도 알게 됐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으로부터 인간의 죄를 다 넘겨받으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셨기에 내 죄가 하나도 남김없이 용서됐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발은 땅을 딛고 있지만 마음은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내가 구원을 받았고, 영생을 얻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그동안 성경을 수백 번 보았지만 박옥수 목사님이 말씀하신 성경 구절들이 내 눈에는 한 번도 띄지 않은 것이 너무 이상할 뿐이었다.

 

나를 위한 성경세미나 잔치
구원을 받고 나서는 나보다 먼저 구원받은 분들이 많은 사실에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서울, 대전, 충청도, 강원도 등 여러 곳에서 살았지만 한 번도 이런 말씀으로 전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위해 하나님이 성경세미나라는 잔치를 열어주신 것이 감사했다. 그라시아스 합창단의 노래를 듣노라면 구름을 타고 하늘에 가 있는 것 같았다. 매시간 전해진 주옥같은 목사님의 말씀이 새롭고 신기했다.
서울 성경세미나가 끝난 뒤 광주에서 열린 성경세미나와 목회자 모임에도 참석해 말씀을 듣고 간증도 했다. 광주 성경세미나를 마칠 때 박옥수 목사님이
“여러분, 장시간 말씀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셨지만 나는 그 시간이 10분도 안 지난 것처럼 금세 지나갔다.
 죄 사함을 받은 뒤 내 마음에 변화가 찾아왔다.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사라졌고,  불쌍한 마음이 든 것이다. “어머니가 나를 모질게 대하신 것도, 남편이 외도를 한 것도 다 사탄의 힘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었구나.” 나 때문에 고생한 딸과 아들, 그리고 이혼은 했지만 옛 남편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다.
 좀 더 일찍 젊은 나이에 복음을 들었다면 더 오래 복음을 전하며 살았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을 만난 뒤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한 것처럼, 이제 나도 율법을 지켜서 구원 얻으려는 사람들과 예수님은 바라보지 않고 신유, 방언, 치유의 은사를 받는 것이 믿음인 줄로 아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살고 싶다.
 전에는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 내가 봉사하고 착한 일을 했는데, 이제는 값없이 내 죄를 사해주신 것이 감사해 봉사하며 살고 싶다. 같은 봉사지만 하늘과 땅 차이가 아닐 수 없다. 기쁜소식선교회를 만나게 해주시고,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50년 이상 목회하시면서 참된 복음을 변함없이 지켜 오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예수님만을 자랑하시는 박옥수 목사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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