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들을 빛나는 사람으로 만드셨나?
누가 이들을 빛나는 사람으로 만드셨나?
  • 담당 김소리 기자
  • 승인 2017.01.05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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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기 단기선교사 간증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이 중요하구나!

조강선(브라질 단기선교사)

나는 우리 집에서 늦둥이로 태어나 사랑을 많이 받았다. 특히 아버지가 나를 정말 많이 예뻐해 주셨다. 가족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지만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방황하기 시작해 중학교 3학년 때 부모님께 학교를 자퇴하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때 회초리를 드셨는데, 대들면서 아버지를 밀쳤다. 노는 게 좋아서 가족이 없어도 불행하지 않을 것 같았다.
집을 나가서 건물 화장실이나 계단에서 자도 집에 가기는 싫었다. 한번씩 집에 가서 큰돈을 훔쳐 가지고 나와서 매일 PC방에서 게임을 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집에 있기 싫어서 1주일에 하루만 집에서 잤다. 그렇게 사는 게 잘못하는 것인 줄 알았지만 게임을 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다. 주위 사람들이 나를 붙잡아 주려고 하면 필요 없으니 상관하지 말라고 했고, 사람들과 지낼 때도 서로 이득 되는 게 무엇일까를 따졌다. 오랫동안 그렇게 살았다.
나에게는 누나가 한 명 있는데, 누나도 평범하게 살지는 않았다. 그런데 누나가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 단기선교를 다녀오더니 ‘행복했다’고 표현했다. 누나의 이야기를 듣고 나도 20대에 1년쯤은 해외에 다녀오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단기선교를 지원해, 브라질로 갔다.
브라질에 도착했는데, 기대했던 것과 달라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간 지 3일 만에 선교사님을 찾아가 한국에 가겠다고 하자, 선교사님이 브라질에서는 15년 동안 단기선교를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간 학생이 한 명도 없다고 하셨다. 브라질에 정말 1초도 더 있기 싫었지만, 부모님이 돌아가는 것을 반대하시고 선교사님도 3개월만 지내 보고 그래도 가고 싶으면 그때 보내 주겠다고 하셔서 참고 지냈다. 내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겠다는 마음으로 3개월을 지냈는데, 그 기간이 지옥 같았다.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뿐이었고 마음은 한국에 가 있었다. 선교사님과 형제 자매님들을 무시하며 살았다.
3개월이 지났지만 마음은 여전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문제로 가족들과 싸우고 친구에게서 돈을 빌려 돌아가는 비행기 티켓의 날짜를 바꾸었다. 주위 사람들이 나에게 장난 식으로 ‘비행기가 가다가 떨어질 거야, 몸을 다칠 거야, 자동차 사고를 만날지 몰라’라고 했다. 내가 내 생각을 고집하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이 그것을 싫어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나는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루는 한 현지 목사님이 오래 전 어느 단기선교사가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 단기선교사가 형의 결혼식 때문에 일찍 귀국해야 했는데, 선교사님이 형제에게 크리스마스를 현지인들과 보내고 단기선교를 마무리하고 가라고 하셨다. 형제는 선교사님의 마음을 받아 계획을 변경했고, 형의 결혼식은 늦추어졌다. 그 후 그 단기선교사가 귀국하던 날, 형이 공항에 마중 나와 안아주었다는 것이다.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오히려 고마워하는 형에게 사연을 물었더니, 크리스마스 전에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갔더라면 당시 신혼여행지를 휩쓸고 간 해일을 피하지 못했을 거라고 했다는 것이다. 현지인 목사님은 나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하나님을 믿고 8월에 열리는 리우 올림픽 때까지 있다가 가라고 하셨다. 나는 1년을 채우고 갈 생각은 없었지만,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비행기 티켓의 날짜를 원래대로 변경했다.
그 후 인디언 마을에 예배당을 지어 그곳으로 갔다. 처음에는 예배당을 나무로 짓는다고 했는데 시멘트로 짓고 있었고, 공사 기간을 15일 정도로 예상했는데 한 달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올림픽이 시작되었는데도 나는 인디언 마을에 있어야 했다. 숙소에서는 바퀴벌레가 내 몸 위를 기어다녔고, 천장에는 박쥐가 날아다녔다. 뱀과 전갈도 자주 보았다. 하지만 인디언 마을의 사람들은 그러한 환경을 문제삼지 않았다. 그들은 작은 일에도 웃었다. 사소한 것에 행복해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작은 일에 행복해 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깊은 밀림 속으로 시멘트를 가져가서 물과 시멘트를 섞는 일이 힘들었지만, 힘들수록 고마운 일들이 많이 생겼다. 그곳에서 먹는 라면은 정말 맛있었다. 샴푸가 생겨서 씻을 수 있는 것도 감사했다. 그렇게 두 달을 지내고 나니 ‘아, 이제 상파울루 교회에 가면 불평할 일이 없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비록 올림픽은 보지 못했지만 더 가치 있는 시간을 보냈기에 행복했다.
상파울루 교회로 돌아가 지내다가 깜짝 놀랐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다시 불평하고 있었다. 별로 어렵고 힘든 상황도 아닌데 짜증을 내는 나를 보면서 깨달은 것이 있었다.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이 중요하구나! 그래서 교회가 있는 거구나!’
히브리서 10장 14절에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은 나에게 온전하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겁내고 계시는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아버지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위해 또 많은 것을 준비하셨음을 안다. 내 눈으로 보면 내가 변하기 힘들지만 마음에 믿음이 생겼다.
요즘은 엄마가 해주시는 밥을 정말 먹고 싶다. 브라질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주고 따듯하게 대해 주는 것을 보면서 엄마의 밥이 제일 따듯한 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꿈도 생겼다. 나는 하루에 열 시간 이상 공부해도 실패하는 나라에서 나 같은 사람이 살아남을 공간은 없다고 생각해 대학을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시대를 원망하며 어둡게 살았는데, 지금은 다르다. 나에게 하나님이 계셔서 ‘할 수 있다’는 마음이 생겼다.
인디언 마을의 사람들을 보며 ‘조금만 생각하면 더 잘살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런 눈으로 나를 보면 나도 배워야 하는 사람이다. 조금 더 배우고 생각하면 행복할 수 있겠다는 마음에, 더 배우고 싶다. 캐나다에 가서 하고 싶은 공부가 있다. 배우고 한국에 돌아와서 적성에 맞지 않는 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은 꿈이 있다.
요즘은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 이것저것 배우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간다. 브라질에서 배우는 즐거움을 알았다. 나를 이렇게 이끌어 주신 하나님과 브라질 교회에 감사드린다.

 

 

아쟈쿠쵸 시에 전도 여행을 갔을 때 시모나 사모님과

입을 열었을 때
하나님이 일하셨다

탁재룡(페루 단기선교사)

나는 영어를 배우고 싶어서 단기선교지로 미국을 지원했는데, 비자를 받지 못해 4월에 페루로 왔다. 페루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데에다 스페인어도 들어본 적이 없어서 걱정을 많이 했고, 다른 단기선교사들보다 두 달이나 늦게 도착해서 더욱 부담스러웠다. 모든 것이 낯선 상황에서 한국과 유일하게 같은 것은 하늘이었다. 그래서 한국이 생각나면 하늘을 쳐다보곤 했다. 어느 날인가 그날도 하늘을 보며 걷고 있었는데, 발에 뭔가 ‘툭’ 하고 걸리는 느낌이 들어서 봤더니 개똥이었다. 페루 거리에는 개들이 무척 많고 개똥 역시 많다. 그날 개똥을 찬 후로는 하늘을 보지 않고 땅을 보며 걸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지내며 페루라는 나라를 알아갈 무렵 선교사님이 단기선교사들을 모두 지방 도시로 보내셨다. 나는 현지인 형제 두 명과 함께 ‘아레끼빠’라는 곳으로 갔는데, 당시 스페인어로 ‘먹고 싶다, 화장실에 가고 싶다, 졸리다’ 정도의 말밖에 할 줄 몰랐기에 ‘아레끼빠에서 단기선교사로서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아레끼빠에 도착해 대학교에서 한국어 아카데미를 소개하고 홍보하는 일부터 했다. 스페인어를 못 하는 나는 홍보용 소책자를 들고 웃기만 했는데, 한국 드라마와 K팝의 영향 때문인지 신기하게 사람들이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에 마음을 열고 우리가 하는 홍보에 관심을 보였다. 한국어 아카데미를 시작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오지는 않았지만 몇몇 학생들이 수업에 참석해서 ‘어떻게 오게 되었느냐’고 물으니 페이스북을 통해 알았다고 했다. 내 노력이나 실력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보내 주신 학생들과 한국어 아카데미를 시작한 것이었다.
아레끼빠에서 현지인 전도사님과 가게와 집들을 찾아다니며 전도했는데, 한번은 전도사님이 나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다. 나는 전도사님께 “전도사님, 저는 복음을 전할 줄 몰라요.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지만 복음을 전해본 적이 없고, 스페인어도 잘 못하잖아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스페인어로 그렇게 말할 줄 몰라서 그냥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형제님 댁을 방문했다. 어떤 말씀을 전해야 할지, 어느 성경 구절을 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고민하다가 ‘아무 이야기나 하자’는 마음으로 요한복음을 폈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 29절에 이 말씀이 있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나는 이 말씀을 중심으로 사전을 찾아가며 복음을 전했다. 전도사님이 부연 설명을 해주며 도와주셨다. 사람들이 얼마나 이해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형편없는 내가 부족한 언어 실력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도전했다고 생각하니 기뻤다.
어린이 캠프를 준비할 때였다. 캠프를 홍보하러 다니던 중에 전도사님이 나에게 “이번 캠프에서는 네가 말씀을 전해야 해.”라고 하셨다.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전도사님이 계시는데 왜 내가 말씀을 전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도사님께 아무리 이야기해도 나에게 하라고 하셨다. 어쩔 수 없이 캠프에서 사흘 간 전할 말씀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못 하기 때문에 잘하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준비했다. 사람들에게 물어서 단어를 찾고 문법에 맞는 말로 준비하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전도사님이 그런 나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준비하면 시간 안에 준비할 수 없어. 너는 외국인이잖아. 페루에 온 지도 얼마 안 되었고. 천재가 아닌 이상 스페인어로 정확하게 말할 수 없어. 말이 되든지 안 되든지 그냥 담대하게 말씀을 전해. 새끼 독수리가 처음부터 멋지게 날개를 펴고 나는 게 아니야. 어미 독수리가 새끼 독수리를 몇 번이고 떨어뜨려서 나는 걸 가르치지.”
전도사님은 팔로 날갯짓하는 흉내를 내면서 이야기해 주셨다. 또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시 81:10)라는 말씀도 전해주셨다.
전도사님이 해주신 말씀을 의지하여 캠프를 준비했고, 드디어 캠프가 시작되었다. 사흘 동안 전할 말씀을 주제별로 준비했기에 나름대로 자신도 있었다. 첫째 날에는 ‘죄인인 인간’에 대해 이야기할 계획이었고 둘째 날에는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 셋째 날에는 ‘믿음이 없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지라도 우리는 영원히 온전한 의인’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기로 했다. 그런데 첫째 날 “어린이 여러분, 안녕하세요?”라고 입을 열었는데,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할 말이 기억나지 않고 긴장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멍하니 서 있다가 결국 현지인 형제의 도움을 받아 말씀을 이어갔고, 가까스로 마무리하고 내려왔다.
방에 들어왔는데 좌절이라는 좌절은 다 몰려왔다. 나 때문에 모든 게 망했다는 생각이 들어 실망하고 있는데, 어느 형제가 와서 빨리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 나가 보니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장면이 내 눈에 펼쳐졌다. 나는 말도 잘 못하고 더듬거리다가 내려왔는데, 아이들 입에서 첫 번째 주제인 ‘나는 죄인이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그때 시편 말씀이 떠올랐다. “…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정말 하나님이 말씀대로 일하신 사실이 보였다. 나는 부족하고 못하는 사람이지만 입을 열었을 때 하나님이 일하셨다. 단지 입만 조금 열었을 뿐인데…. 갈수록 많은 아이들이 캠프에 왔고 나중에는 자리가 모자랄 정도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껏 복음을 전했는데, 아이들이 죄가 씻어져 없다고 하며 기뻐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께 감사할 수 있었다.
내가 말씀을 잘 전했더라면 감사한 마음이 적었을 것 같다. 정말 할 수 없는 나이기에 하나님이 말씀대로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행복을 맛볼 수 있다

김희연(미국 단기선교사)

아이티 영어캠프 중에 자원봉사자들, 학생들과 (왼쪽에서 두 번째)

미국 단기선교사들은 아이티의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소망을 주려는 취지로 진행되는 아이티 영어캠프에 참여하는데, 워크숍 때부터 아이티에 가기 싫었다. 무더운 날씨와 부담 때문이었다. 아이티에 가기 전날까지 마음이 변하지 않아 울고 싶었다. ‘이런 마음은 봉사하는 사람의 마음이 아닌데…. 어떻게 하면 기쁘게 갈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LA 교회 전도사님을 만나 이야기했는데, 전도사님이 “캠프에서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여호수아 1장 9절을 외워봐.”라고 하셨다. 성경 말씀을 외워본 적도 없고 가기 싫은 마음도 여전했지만 내 마음을 뒤로 하고 아이티에 도착했다.
아이티의 날씨는 그야말로 ‘크레이지 핫crazy hot’이었다. 답답한 도로 속에서 제멋대로 다니는 차들, 힘없는 눈동자의 검은 사람들,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폐가들…. 지진 후 몇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상상 이상의 그림이 눈앞에 펼쳐졌다. 숙소로 가는 길에 IYF센터에 들렀다가 현지 아이들을 만났다. 방과 후에 할 일이 없는 아이들이 노랫소리가 들리는 IYF센터로 찾아왔던 것이다. 아이들은 처음 보는 아시아 사람의 쭉 펴진 머리카락과 일자로 찢어진 눈이 신기했는지, 우리에게 모여들어 머리카락을 만지고 현지인 머리처럼 만들어 주기도 했다. 또 우리가 하는 댄스 동작을 보고 우스꽝스럽다며 좋아했다. 아이티에 가기 싫어했던 나와 달리 아이들은 순수하게 우리를 맞아 주었다.
첫 번째로 캠프를 가진 학교에서 하나님이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어 주셨다. 학교는 정말 작았다. 이게 학교인가 싶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아이들은 꽤 많았다. 단기선교사들이 아이들을 안내해서 교실로 이동시켰고, 돌아다니는 학생들을 자리에 앉혔다. 하루 종일 아이들과 함께하는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전쟁이었다. 슬금슬금 자리를 빠져나가기도 하고 자기들끼리 장난을 치는 어린이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말이 안 통하니 더욱 그랬다. ‘우리가 소망을 전하고 도와주러 온 건데 왜 이렇게 안 따라 주지?’ 하는 마음이 들면서 처음 만났을 때 순수함 자체였던 아이들에 대한 이미지가 점점 깨져 갔다.
특히 우리 반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여자 아이 키에라가 나를 화나게 했다. 키에라는 수업 시간마다 나갔다 들어왔다 하면서 분위기를 흐렸고, 노랫소리만 들리면 나가서 놀자고 떼를 썼다. 열네 살 키에라는 힘도 무척 셌다. 하루는 키에라가 교재를 잃어버리고 다른 교실에 앉아 있었는데, 그날따라 내 짜증 지수는 최고였다. 우리 반 학생들이 모두 어디론가 사라지고 두 명만 나를 따라오는 걸 보니,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쉬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는 나에게 LA 교회 전도사님이 다가와 나무라셨다. 처음에는 원망스러웠다. 아이들은 제멋대로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데, 전도사님마저 혼을 내셨기 때문이다. ‘내가 무얼 잘못했을까?’ 전도사님이 하신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날 이후 힘든 상황이 올 때마다 전도사님이 해주신 말씀을 떠올렸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 1:9)
말씀을 외우고 다시 외우고 기억했는데, 신기하게 이전과 다른 마음이 올라왔다. ‘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구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네.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하라고 하셨는데, 한번 해보자.’ 이 마음으로 캠프를 진행했는데, 학생들과 이야기하면서 처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생각을 뒤로 하니 비로소 다른 세계가 보였다.
아이티의 아이들은 소망 없이 지내고 있었다. 뛰어노는 게 행복의 전부라고 알고 있는 그들의 마음을 모른 채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키에라의 마음도 전혀 몰랐다. 키에라에게 “수업을 방해할 거면 여기 있지 말고 혼자 나가서 놀아!”라고 했는데, 이상하게 키에라는 계속 수업에 나왔다. 나 같으면 안 왔을 것이다. ‘쟤는 뭐가 좋아서 캠프에 계속 오는 거지? 숨겨둔 꿀단지라도 있는 건가?’라고 생각하며 키에라의 행동들을 떠올려 보았다. 학생들이 모여 반을 정할 때와 수업을 진행할 때, 수업을 마친 후에도 키에라는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 내 옆에 붙어 앉아 같이 놀자고 떼를 썼다. 생각해 보니, 키에라의 꿀단지는 바로 나였다. 내가 좋아서 따라다녔는데, 눈치채지 못하고 짜증을 낸 것이다. 키에라의 마음을 알고 나니 너무 미안했다. ‘어린 키에라가 나에게 자신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거구나. 그동안 내가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무시하며 살았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키에라를 통해 나밖에 모르는 내 모습을 보게 되어 부끄럽고 감사했다.
캠프 마지막 날 우리 반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었는데, 그때 키에라가 나에게 했던 말을 잊을 수 없다. “매일 방해하고 화나게 해서 미안해. 나는 희연이를 정말 좋아해. 여기 와줘서 고마워. 내년에도 또 와줄래?” 키에라가 그렇게 예쁠 수 없었다. 마음을 몰라서 막무가내로 이끌려 했던 나를 이해해 준 키에라, 나에게 다가오기 힘들었을 텐데 끝까지 다가와 준 키에라 덕분에 나는 여호수아 1장 9절을 수없이 외웠다. 그리고 그로 인해 내 마음으로는 만날 수 없는 사랑의 마음을 만났다. 아이티 영어캠프가 내 마음에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라는 말씀을 새겨 주었고, 새로운 경험을 하게 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행복을 맛볼 수 있다. 키에라와 마음으로 만나니 그 아이가 가진 사랑이 나에게 따뜻하게 전해져 왔다. 아이티는 내가 상상했던 그 이상의 것을 가진 나라다. 볼품없는 모양을 하고 있지만 그 속에 따뜻함이 묻어 있는 나라다. 갑자기 닥친 재난에 많은 것을 잃고 열악한 환경에서 자랄 수밖에 없는 아이들. 그 아이들에게 영어도 가르쳤지만 예수님 안에 있는 참 소망을 전한 것이 감사하다. 나에게 따뜻한 마음을 선물한 아이티 학생들에게 소망을 전하며 살고 싶다.

 

'노 소이 나다'만 배워 가라

박지수(페루 단기선교사)

 

페루에 온 지 벌써 9개월이 지났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9개월 동안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일들을 간증하고 싶다.
나는 아버지가 목사님이어서 태어날 때부터 기쁜소식선교회 안에 있었다. 교회에서 놀고 자라고 내 인생 전부가 교회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오랜 시간 교회와 함께했다. 그런데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세상을 향하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났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일들도 하고 싶고, 여러 부분에서 마음의 선이 사라져 갔다.
대학교 1학년을 마칠 즈음에는 단기선교를 미루고 군대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갖은 변명을 만들어 아버지를 설득해 단기선교를 미루었는데, 하루는 기쁜소식남양주교회의 임태산 목사님이 나를 부르시더니 올해 단기선교를 가라고 하면서 교제해 주셨다. 임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내 마음을 돌아보았다. ‘내가 계획한 인생을 살면 정말 행복할까? 목사님이 이끌어 주시려 하는 삶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결국 나는 내 계획을 정리하고 페루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군대에 가는 것으로 마음을 정했는데, 하나님이 한번 일하시니 내 계획이 완전히 바뀌었다.
페루에 도착해서 처음에는 굉장히 힘들었다. 한국에서의 삶과 페루에서의 삶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한국을 그리워하며 지내고 있는데, 선교사님이 단기선교사들을 부르시더니 ‘쎄로데빠스코’라는 곳으로 가라고 하며 그곳에서 성경세미나를 준비하라고 하셨다. 선교사님은 쎄로데빠스코 지역이 고산지대라 머리가 아플 수 있고 심하면 숨도 잘 못 쉬고 쓰러질 수도 있다는 말을 덧붙이셨다. ‘얼마나 높은 곳이기에 저렇게 심각한 충고를 하실까’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해발 고도가 4,400미터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4,400미터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라고?’ 안데스산맥이 있어서 남미에 고산지대가 많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높을 줄은 몰랐다. ‘한라산이 2,000미터가 안 되는데…. 내가 과연 그 높은 곳에서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앞섰다.
긴장하고 간 것 치고는 첫날을 무사히 보냈다. 그런데 다음 날부터 두통과 어지럼증이 시작되었다. 새벽에는 추위 탓에 잠을 잘 수 없었다. 화장실에 가려고 몸을 일으켰는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서 그날은 하루 종일 누워 있었고, 이후부터 조금씩 적응이 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복음을 전하러 다니고 IYF 홍보도 하고 나중에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에도 출연했다. 해발 고도 4,000미터가 넘는 곳에서 3분을 걸으면 한국에서 30분을 뛴 것처럼 느껴졌는데, 그곳 아이들은 축구도 하며 건강하게 지냈다.

감자를 발효시켜 죽처럼 만든 '또꼬시'    

한번은 현지 전도사님이 건강에 아주 좋은 음식을 먹게 해준다며 길거리의 포장마차 같은 곳에서 ‘또꼬시’라는 음식을 사주었는데, 감자를 발효시켜 죽처럼 만들어 먹는 건강식이었다. 또꼬시에서는 아주 고약한 냄새가 났다. 두리안보다 더 독했다. 맛은 얼마나 단지 혀가 따가울 정도였다. 페루 또꼬시의 고약한 맛은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쎄로데빠스코에서 수도로 돌아가면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왜 나를 페루에 부르셨고, 왜 쎄로데빠스코로 보내셨는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갈 수 없는 곳이고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기에, 돌아보면 그곳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밥을 먹는 동안 하나님을 가깝게 느낄 수 있었다.
페루 선교사님이 항상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다. “노 소이 나다 No Soy Nada”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뜻이다. 페루에서 지내는 동안 매순간 이 문장이 생각났다.
단기선교사 삶이 쉽지는 않다. 기본적으로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밤 11시까지 쉬지 않고 활동하고, 일들이 생길 때마다 시간표도 자주 바뀐다. 예배당 5층 공사를 돕는 일도 있었고, 페루 월드캠프가 다가오는 시점이라 매일 캠프를 홍보하러 다닌다. 그렇게 지내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임을 배웠다. 지금은 “한국에 돌아갈 때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문장만 가지고 갈 수 있다면 다 배운 것이다.”라고 하신 선교사님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하나님은 내가 페루에서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기를 바라셨다.
한번은 가장 가깝게 지내는 전도사님과 교제했는데, 전도사님이 내가 하는 말을 듣고 크게 책망하셨다. 말씀을 듣지 않고 그저 문제없이 잘 지내려고만 하는 내 모습이 드러났던 것이다. 그날 이후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게 무엇인지 물었는데, 여러 분들이 대답해 주고 교제해 주었다. 1년 동안 지내면서 현지인들과 부딪쳤던 일이나 겪었던 문제들이 한순간에 풀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구원받은 의인이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데….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지? 내가 원하는 것들을 하고 육체의 사소한 욕구들을 채우기 위해 사는 것인가? 박지수는 죽었어. 내 안에 예수님이 계셔. 이제 예수님이 내 삶을 사시는 거야.’
페루에 오기 전의 마음, 페루에서 지내고 있는 마음, 그리고 미래의 내 마음까지 파노라마처럼 볼 수 있었다.

     지방 도시 꾸스코를 방문했을 때 현지인들과

나를 부르신 하나님이 내 삶을 이끌고 계신다. 그 사실을 잊고 내가 무엇인가 해보려고 그동안 헛발질을 하고 있었다. 내 의지가 아무리 강해도 하나님을 이길 수는 없다. 하나님이 이끄셔서 내가 페루에 와 있듯이 하나님이 일하시면 나는 꼼짝도 못하는 사람이다.
남은 단기선교 기간 동안, 그리고 한국에 돌아가서도 나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며 인도하실 것이기에 마음이 편하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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