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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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영준 (부산대연교회 목사)
  • 승인 2017.02.20 20: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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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길(제2강)
 

제2강

구원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가지신 목적의 출발점

우리 모습과 아무 상관없는 구원의 그림자, 피와 약속
성경에는 구원의 특징들이 여러 가지 나타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아주 중요한 것이, 구원은 구원받을 사람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나 현재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이야기가 유월절과 라합의 붉은 줄입니다.
출애굽기 12장에 유월절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거한 지 430년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이끌어내 가나안으로 인도하기 위해 애굽에 여러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하지만 아홉 가지 재앙이 애굽 땅에 임하는 동안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내린 열 번째 재앙은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장자長子를 죽이는 재앙이었습니다. 이 재앙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이 바로 유월절 규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나 짐승이나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들을 죽이기로 작정하셨지만, 그 목적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키려는 것이었기에 그들에게는 다가올 죽음의 심판을 피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 12:13)
천사가 죽음의 재앙을 내리려고 집집마다 다닐 때 보았던 것이 있습니다. 집안에 악한 사람이 있는지를 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음식을 먹는지를 본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집 문의 인방과 설주에 피가 발려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보았습니다. 피가 발려 있는 집은 넘어가고(유월하고), 피가 발려 있지 않은 집에는 들어가서 장자를 죽이는 재앙을 내렸습니다. 장자를 멸하는 것은 애굽 사람들에게 내려진 재앙이었지만, 장자인 어떤 애굽 사람이 이 사실을 알고 죽음을 피하기 위해 피가 발린 이스라엘 사람의 집에 숨어 있었다면 그도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라합이 구원받는 것 또한 유월절과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붙이셨기에 라합이 살던 여리고는 곧 무너질 성이었습니다. 그곳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죽을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성이 점령되던 날 모든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유일하게 기생 라합의 집에 있었던 사람들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라합이 여리고에 왔던 이스라엘 정탐꾼들로부터 약속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수 2:18)
“라합이 가로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수 2:21)

기생 라합의 집 창문에는 붉은 줄이 매여 있었습니다. 여리고 성이 멸망 당하는 날, 누구라도 붉은 줄이 매인 라합의 집 안에 들어가 있으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그 땅을 정탐한 두 사람에게 이르되 ‘그 기생의 집에 들어가서 너희가 그 여인에게 맹세한 대로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라’ 하매, 정탐한 소년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 부모와 그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고 또 그 친족도 다 이끌어 내어 그들을 이스라엘 진 밖에 두고 무리가 불로 성읍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사르고 은금과 동철 기구는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었더라.”(수 6:22~24)
두 정탐꾼이 여리고를 정탐하러 왔을 때 라합에게 했던 말이 있습니다.
“…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수 2:14)
인자하고 진실하게 대우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단순히 좋게 잘 대해 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잠 16:6)라는 말씀대로 인자와 진리로 죄를 사함 받는 것입니다. 인자와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라합이나 그 집에 있었던 어떤 사람이라도, 그가 어떤 죄를 지었고 어떻게 살았는지는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나타내는 ‘붉은 줄’을 창에 매단 집 안에 들어가 있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를 인자와 진리로 대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 행위에 달려 있지 않고, 오직 약속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애굽 사람인지 이스라엘 백성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격, 행동이나 태도, 어떻게 살았고 어떤 죄를 지었는지 등도 약속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약속한 조건만 갖추면 구원받습니다. 유월절에 문 설주와 인방에 피가 발린 집 안에 있느냐, 여리고가 함락될 때 창에 붉은 줄이 매여 있는 집 안에 있느냐가 구원의 조건입니다. 즉, 내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발려 있느냐가 구원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이유
하나님은 성경에 아주 구체적이고 쉽게 구원의 길을 설명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인도를 좇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의 공로로 죄를 씻음 받고 구원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를 구원받게 하셨을까요? 구원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가지신 목적이 아니라, 그 출발점입니다. 결혼식만 하고 결혼 생활이 없다면 결혼을 왜 하겠습니까? 결혼식 날 예뻐 보이고 싶고 그날 하루 행복하고 싶어서 결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결혼식은 사랑하는 사람과 오래도록 함께 지낼 수 있는 출발점이기에 기쁘고 행복한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영의 세계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영의 세계를 맛보며 살도록 해놓으셨습니다. 결혼식이 부부생활의 시작이듯, 구원은 영의 생활의 시작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은 두 번의 포로 생활
구원받았지만 영의 세계에서 살지 않고 여전히 이 세상에서 기쁨과 행복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어떤 이들입니까? 성경은 이런 사람들의 모습도 그려놓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 곧 구원받은 우리를 나타냅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크게 두 번의 포로 생활을 겪습니다. 첫 번째는 애굽에서 400년 간 겪은 포로 생활입니다. 두 번째는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를 이룬 후, 유다 왕국이 바벨론에 의해 점령당해 70년 간 겪은 포로 생활입니다. 첫 번째 포로 생활과 탈출은 구원에 대한 그림자이고, 두 번째 포로 생활과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삶에서 겪는 고통과 거기에서 벗어나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에도 어려움이 찾아오면 하나님을 찾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다 바로 아래서 바로를 위하는 일이었습니다. 벽돌을 굽고 흙을 이기고….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결국 바로를 위한 것입니다. 구원받기 전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모든 일들은 사탄의 권세 아래서 하는 일로, 결국은 사탄을 위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의 권세에서 건져내기 위해 강력한 역사를 보이셨습니다. 애굽의 모든 장자를 죽이는 심판과 유월절 역사를 지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영향력 아래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흘리신 피를 힘입어 죄의 권세,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성경은 우리에게 다른 부분을 가르쳐 주기도 합니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들게 노예 생활을 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400년 동안 애굽에 거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지내는데, 그들이 처음부터 힘들게 산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요셉으로 인해 편안히 살았습니다. 그들에게 어려움이 찾아온 시점은,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나타났을 때부터입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출 1:8)
“고역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역사가 다 엄하였더라.”(출 1:14)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 같은 고역을 해야 했습니까? 만일 그들이 계속해서 ‘요셉 때문에 이 나라가 잘사는 거야, 당신이 왕이 된 것도 요셉 때문이야’라는 마음으로 요셉을 나타내, 왕위를 계승한 왕들이 계속 요셉을 알고 요셉의 업적에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대했겠습니까?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났기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통이 시작되었으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셉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로,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을 때 사탄의 압제 아래서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 나라를 이룬 후, 솔로몬이 타락하여 나라가 사마리아를 수도로 하는 북왕국과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남왕국으로 나누입니다. 그 후로도 타락이 이어져, 앗수르의 손에 의해 북왕국이 멸망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리고 앗수르에 이어 일어난 바벨론에 의해 남왕국이 멸망하고 유다 백성들 역시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때부터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합니다. 그 당시에 활동했던 선지자가 다니엘, 하박국, 예레미야, 스바냐 같은 종들입니다. 포로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그들이 신앙을 지키며 형편과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서 기쁘게 살았던 모습을 성경에서 살펴보면 배울 점이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고 세속화 되어가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벨론의 손에 붙여 다시 포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는 고통은 이처럼 하나님을 떠난 데에서 찾아온 문제와 고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모든 고통이 끝납니다. 성경은 구원받은 후 영의 세계에서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 아니라 세속화 되어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속하면 완전히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결국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로 귀속시키는 일을 합니다. 하나님께 속하면 내 마음이 버려지고 완전히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그 길은 전에 가보았던 길이 아닙니다. 새롭게 이끌림을 받는 길입니다. 구원의 마지막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 66권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성도의 삶 속에 왜 이전과 다른 새로운 삶이 나타나지 않을까요? 많은 성도들이 이 부분이 이뤄지지 않아 계속해서 영적인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궁에서 자란 애굽의 왕자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이 하나님에게 선택받은 백성인 히브리 사람인 것을 깨닫습니다. 구원을 나타내는 그림자입니다. 그러자 모세는 곧 왕자에서 양을 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물고기를 잡으며 살았던 어부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기 삶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억지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이처럼 자연스럽게 예수님에게 이끌림 받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구원받은 성도라면 누구나 성경 속에 흐르는 하나님의 마음과 섭리를 찾아감으로써 이미 온전해졌으며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도가 시간계에 속한 이 세상이 아닌, 영원계에 속한 하나님에게 이끌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복음의 도구로서 꿈을 펼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삶을 펼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면 내가 나를 위하는 삶 말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시는 삶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 모두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주님만을 높이며 새로운 인생을 펼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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