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가의 여인처럼 외로움도 목마름도 사라졌다
우물가의 여인처럼 외로움도 목마름도 사라졌다
  • 박선애 (독일, 기쁜소식뒤셀도르프교회)
  • 승인 2017.07.14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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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배와 질그릇

 한국 경제가 어려웠던 시절  외화벌이를 위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독일로 갔다. 그들이 이국땅에서
고초를 겪는 동안 한국은 경제 성장을 이루어 오늘에 이르렀지만
꽃다운 나이게 낯선 땅에서 눈물로 보내야 했던 이들의 마음에는 한恨이 가득하다.

누가 그 한을 풀어 줄 수 있을까?
 바로 예수님이셨다. 예수님 때문에 이제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박선애 자매의 간증이다.

학교를 포기하고 파독간호사로
나는 전주에서 6남매 가운데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갑작스레 가정형편이 어려워지자 부모님은 남동생을 계속 공부시켜야 한다는 이유로 나에게 학교를 포기하라고 하셨다. 한창 꿈 많던 여고시절에 학교를 그만둔다는 것이 너무 서러워 한없이 울었다. 당시는 간호사를 지원해 독일에 가는 사람들이 많은 때였다. 부모님의 권유로 나도 전주에 있는 어느 간호사 양성소에서 9개월 간 교육을 받고 1972년 20세의 어린 나이에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낯선 이국땅에서 시작한 간호사 생활. 너무 힘겨워 인내와 눈물로 현실을 감당해야만 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이 나를 무척 당황하게 했다. 호주머니에 항상 사전을 갖고 다니며 낯선 단어를 들으면 머릿속에 외워두었다가 화장실에 가서 사전을 찾아 익히곤 했다. 하지만 처음 하는 병원 일이 너무 벅찼기에 단어장을 찾아볼 겨를도 없이 발바닥이 불나게 뛰어다니며 환자의 시중을 들어야 할 때가 더 많았다.
근무시간은 하루 12시간. 이틀은 새벽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근무했고 삼일째는 저녁 6시부터 다음날 새벽 6시까지 근무했다. 그리고 하루를 쉬고 또 다시 12시간 낮 근무를 나가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때는 중환자실이 따로 없었다. 환자를 씻기는 간병인의 일도, 시체를 처리하는 일도 밤낮없이 간호사의 몫이었다. 어린 나이에 이국 땅에서 정신없이 심신이 시달렸다. 살이 썩어가는 환자의 악취와 오물 처리를 구역질로 감당하며 돈을 벌었다. 그렇게 번 돈은 겨우 조금의 식비만 남기고 한국에 있는 가족들의 생활비로 고스란히 송금되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송금한 돈으로 우선 빚을 갚는 데 쓰겠다고 하셨다.

 

주님을 향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1973년 새해가 되었다. 독일에 온 지 4개월이 지났을 때다. 심신은 지쳐 식욕을 잃었다. 소화도 되지 않고 환자의 변기를 씻을 때마다 구역질을 해 숨이 막혔다. 힘에 겨운 일을 해서 번 돈을 보내면 계속 빚을 갚고.... 돈이 이토록 소중한 것인가 회의가 들었다.
어느 날부터 불면증이 찾아왔다. 잠이 들면 악몽의 연속이었다. 어머니의 어두운 모습이 꿈에 자주 등장했다. 나는 기도가 필요함을 알았다. 생각지도 않은 주님을 향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나는 본래 천주교 신자였지만 성경을 읽지는 않았는데 성경이 읽고 싶었다. 한국에 부탁해 무게가 가장 가볍고 크기는 주먹만 하고 글씨가 깨알 같은 성경을 받았다.
어느 날 밤 성경을 읽어가다가 마태복음 11장 28절 말씀이 내 마음에 무척 와 닿았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더 열심히 성경을 읽었다. 마태복음 24장 42절의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마태복음 25장 13절의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2절의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등의 말씀이 마음에 남았다.
주님이 도적같이 올 것이니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잘못 이해해 나는 잠을 자지 않으려고 찬물로 세수하며 몸부림을 쳤다. 잠시 꾸벅 잠이 든 순간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예수님이 목자의 형상으로 나를 찾아오셨다. 어느 넓은 바다 해변에 푸른 물과 모래사장이 있는데, 수염이 약간 난 예수님이 망토를 걸치고 지팡이를 들고 땅을 바라보시며 나를 향해 오셨다. ‘아, 예수님이 계시구나. 예수님이 날 찾아오셨구나.’ 생각했다. 난 매일 아침 수녀님들과 수도원에 가서 미사를 드렸다. 수녀들이 이해할 수 없는 독어 미사문을 외울 때 나는 한국어로 외우고 있던 미사문을 속으로 따라했다.

행복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기도했지만
근무하던 병원에서 2년 임기가 끝나 수도원 병원에 들어갔다. 빚도 더 갚아야 하고 다하지 못한 공부도 하고 싶어 선택했다. 그렇게 보내다 6개월 후 다른 병원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 병원에서 남편을 만났다. 그는 환자였는데, 퇴원한 후에 찾아와 내게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어느 날 내게 청혼했다. 무척 당황스러웠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편지로 사실을 알렸고, 부모님은 그의 사진을 보내달라고 하셨다. 사진을 보신 부모님은 인상이 좋다며 결혼을 허락하셨다.
1976년 우리는 독일에서 아주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한 뒤부터는 기독교인인 남편을 따라 교회에 나갔다. 성경 공부도 열심히 했다. 2남 1녀를 두었고, 온 가족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아이들을 기르며  정식 간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간호사로 밤 근무를 하며 행복하게 가정을 꾸려 나갔다. 가정 형편이 점점 윤택해지고 아이들이 성인이 된 후로는 직장을 그만두고 신학교에 다녔다. 굉장히 행복했다. 이런 생활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기도했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그러나 영원하리라 믿었던 행복한 시절도 어느 날 끝이 났다. 성경에서 말씀하신 대로 나는 남편을 하늘처럼 믿고 섬기고 살았다. 그런데 그도 사람인지라 변해버렸다. 신학교 수업의 일환으로 해외 선교 실습을 하고 6주 만에 집에 돌아오자 남편이 갑자기 이혼을 요구했다. 만나는 여자가 있었다. 남편을 믿었던 만큼 배신감은 너무 컸다. 하나님도 원망스러웠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감에 빠졌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 아들과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다니던 교회 성도는 이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했다. 그토록 행복했던 결혼생활이 25년 만에 파탄이 났다. 이혼 과정에서도 수많은 법정 싸움이 있었다.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
살아야 했기에 다시 간호사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다시 행복해지고 싶다고 생각할 즈음 또 다른 시련이 다가왔다. 재혼을 생각하고 사람을 사귀었는데 그게 함정이었다. 두 번이나 사람에게 속았다는 사실에 더욱 괴로웠다. 내 속에서 솟구치는 분노와 화를 참을 수 없었다. ‘하나님, 왜 내게 이런 일들을 주십니까? 당신이 나를 창조하셨는데 제가 화를 참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나를 도와주세요. 나를 변화시켜주세요.’라고 기도했다.
 
내가 강도 만난 자였다니···
하나님을 믿으며 힘들게 살 바에야 차라리 불교를 믿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친구와 함께 불교대학에 입학할 날짜를 기다리며 방황하는 내 마음을 잡기 위해 스님의 말씀을 주야로 듣고 있던 시기였다. 그리고 간호사 일을 그만 두고 한국 마켓 주인이 같은 고향 사람이라 그의 부탁으로 마켓 일을 돕고 있었다. 평소에 마트에 오면 인사하고 이야기하며 지내던 한국인 유학생이 어느 날 내게 책 한 권을 빌려주었다.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책이었다. 저자가 누군지도 몰랐다. 그냥 읽어보고 싶어 받았다. 며칠 뒤에 그가 나를 한국에서 오신 강사님의 마인드 강연에 초대했고 나는 궁금한 마음에 따라갔다. 처음 듣는 마인드 강연이라 알쏭달쏭 했지만 무척 새로웠다. 둘째 날은 강연을 듣고 강사님과 상담했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말씀드리자 목사님은 내가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강도 만난 자라며 위로하셨다. 예전에는 전혀 깨닫지 못했던 성경 해설이었다. 그동안 나는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열심히 노력하며 신앙생활을 했는데 강사님은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이고 나는 강도 만난 자라고 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주막인 교회에 머물며 아픈 상처를 치료받으라고 하셨다. 내게는 아주 큰 위로의 말씀이었다. 그때부터 뒤셀도르프 교회에 나갔다.
유학생이 빌려준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을 다 읽었기에 당시 뒤셀도르프 교회에 계셨던 한대희 목사님에게 갖다 드렸다. 목사님은 내게 한 번 더 읽어보라고 하셨다. ‘한 번 읽은 책을 왜 또 읽으라고 하시지?’ 하며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하나님의 종이 하신 말이기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다시 읽기 시작했다.

 

‘아, 나도 죄인이구나’
4월 21일 새벽 5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을 읽는 중에 다윗 왕이 죄를 고백하는 말씀이 내 마음을 점령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리고 깨달음이 왔다. ‘아! 나도 죄인이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면 우리 인생은 모두 죄인이구나. 나를 배신한 그들만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나 역시도 죄인이구나.’ 주님의 마음으로 나 자신을 보았고 영안이 열려 이 말씀을 깨달았다. 나는 평생 희생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기에 내가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천주교에서나 신학교에서 죄에 대해 배워 알았지만 다 이론이었다. 나는 그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보혈이 내 죄를 다 씻었다. 내 마음에 큰 뿌리로 박혔던 모든 짐이 벗겨졌다. 마음에 아무 느낌도 없이 고정된 상태로 하루가 지났다. 머리도 생각을 멈추고 멍하니 하루가 지났다.
다음날 아침 명상의 시간을 갖는데도 멍했다. 스스로 이상하고 의아해서 다시 기도했다. “하나님, 만약 이 진공상태가 주님이 하신 일이라면 저에게 징조로 기쁜 느낌을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그러자 정말 내 가슴 안에 잔디의 새싹이 올라오듯 기쁨이 소록소록 올라왔다. 참으로 신비했다. 나중에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충만한 기쁨이었다. 텅 빈 상태에서 채워지는  기쁨이었다. 그 후로 내 마음을 짓누르던 짐이 다 내려졌다. 슬픔, 원망, 아픔, 미움, 시기... 내 마음에 한결 같은 기쁨이 충만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말씀처럼 내 마음은 구원의 확신과 기쁨으로 찼다.
지금까지 여러 교회들을 찾아다니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지만 이제야 진리를 만났다. 어느 때에는 시험이 오지만 그것이 누구의 생각인가 확인해 보고, 그 길에서 떠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기도하고 주님을 의지하면 평강과 기쁨이 마음에 머문다.

신기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들
2016년 4월에는 독일 마인즈에서 열린 성경세미나에 참여했다. 처음으로 그라시아스 합창단의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을 보았다. 난 그곳에서 아기 예수를 마음에 영접했다. 박옥수 목사님도 처음으로 뵈었다. 내가 읽은 책을 쓰신 분이라는 것이 목사님에 대해 내가 아는 전부였다. 인사드리고 싶어 가까이 갔는데, 목사님은 네덜란드 자매들에게 안수기도를 하시고는 난 그냥 두시기에 내가 목사님의 손을 끌어서 내 머리에 올렸다.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데 저는 왜 안수 안 해 주시느냐며 강제적으로 안수를 받았다.
2016년 7월에는 한국에서 열린 월드캠프와 마인드교육에 참여했다. 월드캠프 개막식은 부산 해운대 모래사장에서 열렸다. 장마철이라 비가 내리는데도 모두 행사장으로 갔다. 비가 내리는 길을 우산을 쓰고 바닷가로 가며 ‘이게 뭐하는 거지?’ 하며 단체 생활이라 따라갔다. 신기하게도 공연
10분 전에 비가 멈추고 조명장치가 돌아가고 연주자가 나오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나는 기적을 보았다. 그곳에서 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사람이 오늘날도 이땅에 존재하는 걸 실감했다. 성경에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오늘날도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오늘의 하나님이심을 알았다.
한국에서 마인드교육을 받고 독일로 돌아왔다. 나도 마인드교육 강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나이도 있고 초보자라 망설여졌다. 그런데 나를 전도한 유학생 자매에게 목사님이 ‘독일어를 잘 공부해서 뒤셀도르프에 마인드 학원을 만들어 강사로 일하라’고 했다. 올해는 얼마 전에 집회에 오신 박 목사님께서 새로 이사한 프랑크푸르트 교회에는 신학교를 세우라고도 하셨다. 나를 위한 신기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들이다. 우리들 마음에 소원을 주시고 이루시는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

 

내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듯 그들을 위로해 주고 싶다
독일에는 파독 간호사와 광부 협회 한인 단체 모임이 130개가 넘는다. 그들 가운데에는 마음 아픈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도 가족에게 버림받아 알코올 중독에 걸린 사람도 있고, 가슴 속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한을 가진 사람들도 많다. 내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듯 그들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감사하게도, 지난 5월에 교회에서 그분들을 위한 행사를 마련해주셨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한 친구는 그라시아스 합창단이 공연한 크리스마스 칸타타를 보고 “오늘 한국 사람으로서 제일 기쁘고 행복한 날이야. 합창단의 노래가 너무 좋았어. 독일에서 수많은 공연을 보았지만 독일 사람들보다 노래를 더 잘하는 합창단이 한국인이라는 것이 매우 자랑스러워.” 하며 감탄했다. 교회에서 준비해 주신 도시락을 먹으면서도 “이렇게 맛있는 도시락을 먹어본 적이 없어.”라고 감탄했다. 하나님이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에게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 주셔서 감사했다.
얼마 전에는 아는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기에 요즘 내가 행복하게 사는 이야기를 했더니 나를 따라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언니도 구원받아 간증하는 것을 보며 무척 감사했다.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을 위해 기도하다 보면 슬픈 눈물이 난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며 전도하는데 하나님이 그들에게도 일해주시기를 기도한다.

 

우물가의 여인처럼 진리를 만났다
독일에 와서 나는 성공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셨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많이 고생한 것도 아무 문제가 아니다. 때로는 내 생각 때문에 괴로울 때도 있지만 그때마다 내 생각을 멈추고 예수님의 말씀 안에 들어가면 다시 평안을 얻는다. 너무 외로워 땅을 치며 울었던 날들이 많았는데 이제 그런 외로움도 사라졌다. 목마름도 사라졌다. 우물가의 여인처럼 진리를 만났기 때문이다.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어린 시절, 들에 나가 놀며 나물을 캐고 들꽃을 뜯던 평화로웠던 그 시절을 떠올려본다. 그때처럼 평안하다. 하나님이 주신 평강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내 무거운 모든 짐을 내려놓고 쉴 수 있는 평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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