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져버린 예루살렘 성, 느헤미야의 눈물과 웃음에 함께한다
무너져버린 예루살렘 성, 느헤미야의 눈물과 웃음에 함께한다
  • 박옥수 (기쁜소식강남교회 목사)
  • 승인 2017.10.31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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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강단 | 기쁜소식선교회 산하 기관 직원 워크숍 말씀

 

 

 

 

 
   

1. 느헤미야의 눈물

우리 교회는, 복음의 역사들이 힘있게 일어나고 있는 면을 보면 소망이 넘칩니다. 하지만 반대 면을 보면 아주 어둡습니다. 비행기가 비행 각도를 조금 틀어서 나중에는 정반대 방향으로 날아가도 비행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느끼지 못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교회 안에 육신을 용납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고, 지금은 많은 성도들이 육신을 좇아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우리나라에서 오래 전에 복음을 전하던 교회들이 무너져, 지금은 그 교회들에서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선이 애매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지고 가셨다는 사실을 지식으로 알고 있을 뿐입니다.
지나친 염려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죽고 우리 교회에서도 복음의 선이 무너지면 여러분의 자녀와 손자들은 세상 어디에서 소망을 찾겠습니까? 만일 기쁜소식선교회마저 타락해 이 땅에서 복음이 사라진다면 사람들이 어디에 가서 복음을 듣고, 어디에 가서 생명을 얻겠습니까? 그 일을 생각하면, 너무나 답답하고 안타깝고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만을 믿는 마음으로 사는 성도가 몇이나 있습니까?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 산다고 생각하지만, 가슴이 너무 아픈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없습니다. 구원받았다는 사실로 마음이 교만해져서 태만하게 삽니다. 마음을 꺾지 못해 육신을 좇아 살면서도 ‘이렇게 살아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들이 교회에 가득합니다. 이러면 여러분도 망하고, 교회도 망합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고 성문들이 불탔을 때 느헤미야는 울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이런 상황 앞에서 느헤미야처럼 슬퍼하거나 괴로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대부분 ‘구원받았으니 잘 되겠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것 자체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교회 역사상 구원받은 교회가 40년을 존속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도들이 육신적으로 살면서도 지옥에 가지 않으니까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구원받아 감사로 가득했던 순수한 마음을 버리고 육신의 욕망을 좇는 성도가 교회에 많아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사는 데에 부담을 느끼지만, 육신대로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힘을 얻어 나중에는 다 육신을 좇아 사는 것입니다.
사탄이 우리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형제 자매들에게서 그리스도를 향하는 순수한 마음을 빼앗아서 성도들이 변질되고 부패했습니다. 믿음으로 달려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없고,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슬퍼하고 괴로워해야 하는데, 사탄에게 속아서 태연합니다. 교회가 무너져 가도, 여러분은 배만 고프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기에 편한 마음으로 일합니다. 이런 교회의 내일을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고 성문들이 불타고 남은 백성은 능욕을 당하는 일 앞에서 느헤미야는 울고 괴로워하고 금식하며 회개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지만 느헤미야는 가슴이 너무나 아팠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무너진 것에 대해 하나님이 느끼시는 아픔을 느헤미야도 느꼈기 때문입니다.

 

 

2. 예루살렘 성은 왜 무너졌는가?

예루살렘 성이 무너진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은 믿음으로 살지 않았다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지낸다고 해도 믿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무엇을 해도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룻기에 나타난 대로,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간 엘리멜렉과 말론과 기룐이 죽습니다. 믿음을 떠나면 하나님을 떠나고, 그 결국은 죽음입니다. 기쁨도 죽고, 미소도 죽고, 소망도 죽고, 사랑도 죽고, 행복도 죽고, 다 죽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을 등지고 자기 길을 따라 간 결과를 느헤미야 1장 3절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저희가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하는지라.”(느 1:3)
성이 훼파되고 성문들이 불탔기에 적들이 마음대로 들어와서 예루살렘에 거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능욕했습니다. 여러분 마음에서 성이 무너지고 성문들이 불타면 악한 사탄이 여러분 안에 마음대로 들어와서 여러분을 능욕합니다. 여러분이 어려움과 환난을 겪습니다.
무엇 때문에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고 성문들이 불탔습니까? 적이 쳐들어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가서 담대히 싸웠다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셔서 대적을 능히 파하셨습니다. 여리고 성이 아무리 견고해도 그것을 무너뜨리는 것이 하나님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여리고 성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을 향해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간담이 녹았습니다. 그런데 성도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잃으면 반대로 성도가 간담이 녹습니다. 대적들로 인하여 두려워하고, 슬퍼합니다.
“…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느 1:5)
느헤미야는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하나님을 믿었다면 예루살렘 성이 무너질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예루살렘 성의 문들이 불탈 수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그 사실을 알았기에, 훼파되지 않아야 할 성벽이 무너지고 소화되지 않아야 할 성문이 불타서 백성들이 능욕을 당하는 것을 보며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고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런 여러분 속에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실 수 있습니까? 만일 이제 여러분이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버리고 자신의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향해 달려나간다면 이 시대 최고의 사람이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찾습니다.

 

3. 나를 보내어 그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

느헤미야가 울면서 돌이키자, 바로 2장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왕이 느헤미야에게 말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 이십 년 니산월에 왕의 앞에 술이 있기로 내가 들어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의 앞에서 수색이 없었더니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느 2:1~2)
느헤미야가 대답했습니다.
“나의 열조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색이 없사오리이까?”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느헤미야가 하나님께 묵도하고 이야기했습니다.
“나를 유다 땅으로 보내어 그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
“네가 성을 중건하고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아닥사스다 왕이 느헤미야를 예루살렘 총독으로 보내 무너진 성을 중건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 성경을 읽으면 가슴이 뜁니다. 느헤미야는 슬퍼하며 돌이키는 마음을 가지고 가만히 있었는데, 왕이 말을 걸어서 예루살렘 성을 쌓는 일이 이루어져 가는 것이 정말 신기합니다. 느헤미야의 마음이 하나님과 같은 마음이 되니까, 그가 원하는 대로 예루살렘의 총독으로 가서 그가 원하는 대로 예루살렘 성을 중건했습니다. 그것이 느헤미야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복음의 길을 걸어가 보십시오. 상상할 수 없이 복되고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위해 몸을 제물로 드리지는 못해도 ‘하나님, 내 마음에서 육신의 소욕들을 다 불태우고 당신의 뜻을 좇아 걸음을 내딛겠습니다’ 한 후, 하나님이 느헤미야에게 행하셨던 것처럼 여러분에게 행하실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찬란한 하나님의 뜻이 있고, 영광스런 일이 아름답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여러분이 쓰임 받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뜻과 함께한다!’라는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러면 육신의 소욕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믿음으로 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사는 여러분을 볼 때 저는 화가 납니다. 믿음으로 달려가기를 거부하고 육신에 빠져 있는 여러분을 보면 불쌍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데 하나님이 왜 돕지 않겠습니까? 천 가지, 만 가지로 돕습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하고 육신의 욕망을 좇아간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사탄에게 속아서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육신을 좇아 살았던 길에서 돌이켜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로 마음을 정하고 그 길을 걸어간다면, 하나님이 여러분 앞에 어떤 길을 여실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장차 일어날 역사들, 큰 축복과 은혜를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4. 예루살렘 성을 쌓은 사람들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은혜, 이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하고 큰 축복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아주 소홀히 여깁니다. 툭하면 불평하고, 조금 어려우면 견디지 못하고, 교회를 떠나고….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육체를 버리시고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은혜를 입었는데, 못 먹고 못 입고 좀 가난하게 살면 안 됩니까? 복음을 위해 살다가 죽으면 되지 않습니까?
어차피 살다가 죽을 텐데, 영광스런 복음을 위해 나를 드리는 것이 무엇이 문제가 됩니까? 주님을 위해 나를 드려서 영원한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데, 잠을 좀 덜 자면 어떻습니까? 주님 때문에 욕도 얻어먹고, 배도 고파 보고, 추위도 견뎌 보고, 멸시나 위협도 당해 보고…. 이 땅에 있는 동안 이런 귀한 복을 누리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비참하게 죄의 종이 되고 마귀의 종이 되어 사는 것보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사탄이 여러분을 두렵게 하여 여러분이 복음을 위해 담대하게 살지 못하고 벌벌 떨면서 사는 모습이 너무 불쌍합니다. 생각하지 않고 육신의 욕구나 마귀가 넣어주는 생각에 그냥 이끌리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죽임을 당하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우리가 서른 살에 죽거나 마흔 살에 죽어도 할 말이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 죽겠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처음에는 주저되기도 하겠지만, 그렇게 살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영광스럽고 복되게 해 주십니다. 무엇이 두렵습니까? 어려움 좀 겪어도 괜찮습니다. 여러분 마음의 세계가 정돈되어 있지 않아서 거짓된 생각에 속아 두려움에 잡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주님의 귀한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을 다시 쌓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52일 만에 거룩한 예루살렘 성이 다 쌓였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거룩한 성이 쌓이니까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할 수 있었습니다. 느헤미야 3장에는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룩한 예루살렘 성을 쌓은 사람들이 하나하나 등장합니다.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그 다음은 여리고 사람들이…, 그 다음은 이므리의 아들 삭굴이…, 어문은 하스나아의 자손들이…, 그 다음은 학고스의 손자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이…, 그 다음은 므세사벨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이…, 그 다음은 바아나의 아들 사독이…”(느 3:1~4)
사람들이 느헤미야와 함께 예루살렘 성을 쌓아가는 이야기가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 다음은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자 할로헤스의 아들 살룸과 그 딸들이 중수하였고”(느 3:12)
여자들도 성을 쌓는 일에 함께했습니다. 그런데 5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들은 그 주의 역사에 담부치 아니하였으며”
복음의 역사를 이루는 데 여러분의 이름은 빠지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아무개는 성을 쌓다가 도망갔고, 아무개는 욕망을 따라 흘러갔고…. 이런 기록이 영원히 남을 텐데, 그것이 얼마나 수치스럽겠습니까? 반대로, 복음을 위해 산 것은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럽겠습니까!

 

 

5. 모든 방해를 이기고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을 비웃으며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말하여 가로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필역하려는가? 소화된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섰다가 가로되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느 4:1~3)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을 건축할 때 산발랏과 도비야 등이 집요하게 방해했습니다. 사탄은 복음을 위해 사는 우리가 실망하고 낙망하도록 우리 마음을 집요하게 공격합니다. 사람들이 대부분 여기에 속습니다. 복음을 위해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려울 것 같고, 우리가 하는 복음의 일들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복음의 길을 포기하고 인간적인 길로 걸어갑니다. 그러면 바로 사탄에게 이끌립니다.
어떤 싸움이든 최종 승리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복음을 위한 싸움은 결국 우리가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사탄이 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싸움을 포기하고 피하고 숨습니다. ‘나는 안 돼’ 하고 주저앉습니다.
사탄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주로 공격하는데, ‘너, 육신적이잖아. 세상 좋아하잖아. 그런데 하나님이 너에게 역사하겠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늘 “너는 어쩌면 그렇게 깨끗하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가 깨끗하게 씻어졌기 때문입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이 ‘너, 육신적이고 정욕적이잖아. 그런 너에게 하나님이 역사하겠어?’라고 할 때, 성경 말씀으로 반격해야 합니다.
우리가 육체를 입고 세상에서 사는 동안 육신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식욕이 있기에 밥을 먹고, 성욕이 있기에 결혼을 합니다. 그런 것으로 문제를 삼는다면 걸리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우리가 육신적이라는 것으로 공격할 때 안타깝게도 많은 성도들이 자신은 복음을 위해 살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을 갖습니다. 마음이 무너져버립니다. 그처럼 ‘자기 보기에 옳은 대로’ 판단하는 것이 ‘사탄이 넣어 주는 생각을 따라’ 판단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 판단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근거로 판단해야 합니다.
잘못한 일로 인해서 사탄에게 송사를 당해서는 안 됩니다. 사탄이 여러분의 약함을 들고 와서 송사할 때 ‘사탄아, 난 온전하다. 내가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님이 내 죄를 씻으셨다. 예수님의 피는 내 죄보다 크기 때문에 내가 지은 죄는 눈보다 희게 씻어졌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 속에 살아 역사하신다. 사탄아, 물러가라!’ 해야 합니다. 다시 송사해도 ‘내가 연약한 것은 네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안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 그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문제가 된다고 하려면 나를 온전케 하신 하나님에게 따져라’라고 하며, 담대하게 믿음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로 여러분을 죄에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죄에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이 죄에 매이면 사탄의 종이 됩니다. 복음의 일들 앞에서 자유로운 마음으로 담대하게 달려나가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 글은 2017년 9월 기쁜소식선교회 산하 기관 직원 워크숍에서  박옥수 목사가 전한 말씀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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