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설교]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 글 | 임민철(기쁜소식부산대연교회 목사)
  • 승인 2022.04.18 09: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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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호 기쁜소식
갈라디아서 강해(17편)

 

 

갈라디아서 5장 1절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자유를 누려야 할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시 옛날처럼 종의 멍에를 메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죄인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한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습니다. 그 전에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인간은 다 아담의 후손으로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 죄 아래서 태어났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고 했습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올 때 사망도 같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니까 죄가 있다는 말은 죽어 있는 상태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죄가 있다고 하면서도 자신이 죽어 있다는 사실은 모릅니다.
죽어 있으면 죄에 종노릇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 힘도 없기 때문에 죄가 끄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상한 삶을 삽니다. 죄인이라고 말하면서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합니다. 죄인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죄인은 죽은 사람입니다. 죽은 사람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죄인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가르칩니다. 그렇게 살 수 있으면 문제가 없지만, 살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짐이 되고 부담이 됩니다.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죄의 종으로 사는 것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했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6장 17절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 자유로운 사람으로 태어난 것 같지만 죄의 종으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죄에 끌려다니게 되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노력하면 죄를 짓지 않고 말씀대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죄에 종노릇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로마서 7장 14절에서는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는 우리가 죄로 죽어 있을 때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인 사탄을 따랐다고 했습니다. 우리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1~3)
우리가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면 죄의 종으로 살게 됩니다.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둑질하는 것만 죄로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다 죄라는 것입니다.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인 사탄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아담과 하와를 꾀어 하나님을 떠나 죄의 종이 되게 했고, 그 후손인 모든 인간의 마음에 역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을 꿈으로 여기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죄입니다.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고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님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히브리서 2장에서 알 수 있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4~15)
예수님이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첫 번째 이유는, 사망의 세력을 잡은 사탄을 없애기 위함이었습니다. 사탄은 거짓말을 해서 인간을 죄로 끌고 갔고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님에게는 사망이 역사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망이 역사하는 우리와 똑같은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육체로 우리 죄를 담당해 죄의 삯인 사망을 지불하셨고, 부활하여 사망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다시는 우리가 사망에게 종노릇하지 않아도 되게 하셨습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5)라는 말씀대로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두 번째 이유는, 죽는 것이 무서워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풀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죽은 인간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 인간을 위하여 예수님이 육체를 입고 오셔서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도 당신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셨고, 당신과 함께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를 죽음에서 자유하게 하고, 죄에서 자유하게 했습니다.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데에서 자유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누가 종 된 삶을 삽니까?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뜻을 등지고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하셨는데, 사탄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속였습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된다고 속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아담과 하와가 생각했습니다. ‘뭐라고? 우리가 하나님같이 돼? 그래서 하나님이 그 실과를 못 먹게 한 거야?’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그들이 그처럼 사탄에게 속아서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사탄이 우리 마음을 죄악으로 끌고 갈 때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곳으로 끌고 갑니다. 죄에 매였다는 말은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려고 하는 데에 매여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사람은 죽는 것이 두려워 일생에 매여서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에 종노릇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탄의 길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죄의 종이 된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우리를 새롭게 살려내셨습니다. 
골로새서 2장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2)
우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6장에서는 이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롬 6:3)
예수님이 언제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하시자 요한이 처음에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자 요한이 세례를 주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때,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 인간의 모든 죄가 예수님에게 건너간 것입니다. 우리가 그 예수님과 함께 세례를 받아,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되고 함께 부활하고 함께 하늘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장사되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아나고
죄로 인하여 죽은 우리가 어떻게 거듭날 수 있습니까? 그 일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2)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장사되었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아났습니다. 우리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죄로 인하여 죽어 있던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세례를 받음으로 하나가 되어서,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되고 함께 살아난 것입니다. 죄로 죽었던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났습니다. 이것을 거듭났다고 말합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죄로 죽었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살리신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습니다. 또한, 우리를 거스르고 대적하는 의문儀文에 쓴 증서를 없애버려 우리를 더 이상 정죄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어 승리하셨습니다.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 2:13~15)
십자가에서 우리 죄가 씻어졌고, 우리가 죽음에서 벗어나 더 이상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며 살지 않아도 되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종은 멍에를 멥니다. 농부들이 수레를 끌거나 쟁기질을 하기 위해 소의 목에 멍에를 얹고 코뚜레를 뀁니다. 그러면 소가 꼼짝을 못 합니다. 시키는 일을 해야만 합니다. 사람도 일생이라는 멍에, 죄라는 멍에를 메고 그것에 종노릇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거기서 자유케 하려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니 다시 종의 멍에를 메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히브리서 4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히 4:14)
우리에게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대제사장입니까?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예수님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셔서 우리 약함을 다 이해하여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는 없습니다. 한 번도 죄에 넘어지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이유는, 우리는 넘어졌지만 예수님은 넘어지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에 넘어지지 않고 우리 약함을 다 아시는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길이 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길이요”라는 말이 영어로는 “I am the way”입니다. 여러 길 가운데 하나라는 말이 아니고, 길이 하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예수님만이 길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살 길이 없지만 우리를 체휼하고 넘어지지 않는 예수님이 우리 대제사장으로 계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종의 멍에를 메고 종노릇하면서 살았습니다. 욕망에 종노릇하기도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서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는 짐도 지고 살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이 없습니다. 짐은 우리가 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시 68:19) 이것이 다윗의 간증입니다. 다윗도 어려움이 있고 져야 할 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즐거웠던 이유는, 그의 짐을 날마다 지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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