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핍박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실감케 한 간증이 되고
[라이프] 핍박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실감케 한 간증이 되고
  • 글 | 김범섭(브라질, 기쁜소식상파울루교회 선교사)
  • 승인 2024.02.05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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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호 기쁜소식
선교사 수기 2편

그저 열심으로만 믿던 나를, 하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내 성격과 기준도 내려놓도록 이끄셨다. 복음을 전하며 핍박도 받았지만, 핍박은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실감하는 간증이 되었다. 하나님은 연약하고 형편없는 나를, 예수의 피와 말씀을 힘입어 담대하게 살게 하셨다. 

 

구원받고 처음 ‘나’를 부인하는 법을 배우고
구원받은 뒤 하나님의 은혜로 다니던 교회에서 나와 대전에 있는 한밭중앙교회(현 기쁜소식한밭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영적인 삶이 무엇인지 모른 채 그저 열심히 믿으려고만 했던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방을 만들어가셨고, 가장 먼저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가르쳐주셨다.
구원받기 전에는 율법 아래서 옳고 그름의 잣대로 살아왔고 학창 시절에는 반듯한 규칙 속에 길들어 있던 나의 삶, 그리고 내 성격과 기준은 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데 많은 걸림돌이 되었다. 그런 내 눈에는 교회 안에서 형제 자매들이 하는 행동들이 사랑이 없어 보이고 차가워만 보였다. 
그런 나의 마음을 하나님은 불편하게 여기셔서 교회 안에서 오해받는 일을 허락하셨다. 그 일 앞에 나는 너무 억울했다. 심지어 나의 떳떳함을 말하고자 교회에서 마지막 간증을 한 후 조용히 떠날 생각까지 했다. 그때 내게 복음을 전해주셨던 선배 형제님은 성경 한 구절을 보여주며 ‘김 형제가 그 일 앞에 정말 아무런 사심이 없고 거리낌이 없었다면, 하나님이 보상해 주실 것’이라고 교제해주셨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이 말씀을 접하면서 내 마음에 처음으로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범사凡事는 모든 일을 뜻하니, ‘네 마음에 맞는 일이든 맞지 않는 일이든 100% 하나님으로 인정하라’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내 길을 지도해주신다고 보증해주시는 말씀이었다. 인생에 처음으로 ‘나’를 부인하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며 조금씩 조금씩 영적인 눈이 뜨여졌다. 그 순간은 어렵고 힘든 시간 같았지만, 말씀대로 하나님은 그 모든 일을 선으로 바꾸셨고, 나를 통해 새로운 사람들이 연결되어 구원받는 일로 보상해주셨다.

마음에 말씀과 함께 찾아온, 나도 모르는 담대함
1985년에 구원받고 그해 겨울 서울 CCC 수양관에서 열린 수양회에 휴가를 얻어서 참석했다. 듣는 말씀들이 너무나 새롭고 내 영혼에 큰 울림이 되어 내 마음과 삶을 바꾸어 갔다. 박옥수 목사님이 저녁 시간에 전하시는 말씀을 듣던 중에 히브리서 10장 19절 말씀이 내 마음 깊이 약속으로 새겨졌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나는 원래 성격이 유하고 여리고 약해서 두려움이 많고 소심한 사람인데, 이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면서 나도 모르는 담대함이 삶을 이끌어가는 게 놀라웠다.
구원받고 제일 먼저 찾아온 어려움은 가족들의 핍박이었다. 아버지는 유교 사상을 지니신 무신론자, 어머니는 감리교회 집사님, 큰누님은 천주교인이셨고, 둘째 누님 외 나머지 형제들은 신앙에 큰 관심 없이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내가 구원받고 나서 교회를 분리하고 복음을 전하자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이 ‘아들이 잘못된 신앙에 빠졌으니 큰일난다’는 식으로 우리 부모님에게 겁을 주었다. 부모님은 나에게 대노하셨다. 특히 어머니는 내 얼굴을 보려고 하지도,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마음을 단단히 닫으셨다.
어느 날 기생 라합의 가족이 구원받은 이야기를 듣고 내 마음에도 믿음이 생겼다. 아무런 믿음을 줄 수 없었던 기생 라합의 말을 듣고도 그의 가족이 다 구원받았는데, 나도 그저 교회 안에 포도나무 가지처럼 붙어만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 가족을 구원해 주시겠다는 믿음이 생겼다. 

‘내 죄가 흰 눈같이 씻겼다’며 감격해 우신 어머니
시간이 흐르고 하나님은 우리 부모님에게 먼저 일하셨고, 가족 중 처음으로 어머니가 구원을 받으셨다. 아버지가 독자셨고, 나도 6남매 중에 장남이었기 때문에 어머니에게 나의 존재는 특별했다. 어머니는 딸만 셋을 낳으셨던 차에 넷째인 내가 아들로 태어나줘서 집에서 쫓겨남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하셨다. 그런 만큼 나는 어머니 마음에 크게 자리잡은, 소중한 아들이었다.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강대상에서 당신의 아들을 비난하는 소리를 계속 들으면서 어머니 마음이 좀 상하셨던 차에 내 생일이 다가왔다. 아들 생일에 미역국을 끓여주시려고 충주에서 대전에 있는 내 자취 집에까지 오셨다. 그때까지도 어머니는 마음 중심에서 우리 교회를 믿지 못하셨기에 주일에는 나만 혼자서 주일 예배에 가고 어머니는 자취 집에 남아 계셨다. 
하루는 내가 출근하면서 그 당시 선교학생이던 양정학 목사님에게 ‘우리 어머니와 복음 교제를 해달라’고 내 자취 집 방문을 부탁드렸다. 퇴근해서 집에 와보니 어머니가 구원받으셨고, 감격해 우시면서 ‘마음의 죄가 흰 눈같이 깨끗하게 씻겼다’고 간증하시며 감사해하셨다. 어머니가 구원받고 충주로 돌아가신 후에 하나님이 청주에 교회를 세워주셨다. 그때부터 부모님은 이전에 다니시던 교회에서 분리하셨다. 동네 사람들의 핍박에도 버스를 타고 거의 2시간이 걸리는 기쁜소식청주교회에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러 다니셨다. 

가족을 위해 때를 따라 도우신 하나님의 손길
내게 더욱 놀라웠던 것은 아버지가 구원받은 것이다. 아버지는 영적인 부분에 정말 관심이 없던 분이셨다. 유교 사상에 젖어 계신 아버지는 양덕만 목사님과 처음 교제하실 때에도 족보 이야기만 하실 만큼 대화가 안 되고 구원받기가 어려웠던 분이셨는데, 하나님이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주신 것처럼 아버지의 마음도 열어주셔서 복음을 받아들이셨다. 그리고 주일마다 어머니와 함께 충주에서 청주로 꾸준히 교회를 다니셨다. 
그 후로는 내 밑에 동생들, 그리고 누님 세 분도 다 구원받으셨다. 라합의 온 가족과 친척들을 구원하신 것처럼, 지금은 하나님이 온 가족과 친척들을 구원받고 복음의 방주와 같은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셨다. 
처음에는 내게 호적을 파가라고 할 만큼 핍박도 있었고 어려움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은 나의 열심과 상관없이 가족들을 한 명 한 명 구원받게 하셔서 교회 안으로 이끌어주셨다. 가족이 구원받으면서 충주에서도 한두 명씩 구원받은 사람들이 교회와 연결되었고, 하나님 은혜로 충주에도 교회가 개척되었다. 그 후 하나님은 우리 가족을 중심으로 당신의 몸 된 교회를 아름답게 만들어가셨다. 
나는 장남이었지만 부모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해드린 것이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오직 교회 안에서 복음만 섬기고 살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부모님을 돌보아주셨다.  수십 년 동안 교회 안에서 복되고 영육 간에 강건한 삶을 살아가게 해주셨다. 아버지는 구원받으시고 꾸준하게 교회 안에서 지내시다가 작년에 97세를 일기로 주님의 품에 안기셨다. 때를 따라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부모님의 삶에도 또 가족들의 삶에도 함께해 복음으로 말미암아 참된 행복을 얻게 해주셨다. 

‘회식이냐, 집회냐?’ 말씀 앞에 마음을 정하고
나는 직업 군인으로 대전 공군부대에서 교관 생활을 했다. 군대라는 특수 환경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 때문에, 또는 회식 같은 술자리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알게 모르게 핍박을 받았다. 나는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것도 듣는 것도 다 싫어하는 사람인데,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핍박이 점점 더 커져만 갔다. 한번은 군목이 찾아와서 ‘계속 복음을 전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더니 결국은 ‘무능력 교관’이라는 누명을 씌우는 바람에 강제로 대구 부대로 전출당했다. 구원받기 전에는 아주 가깝고 친하게 지냈던 군목이었는데 내가 구원받고 복음을 전하면서 사이가 나빠졌고, 결국은 나를 다른 도시에 있는 부대로 쫓아낸 것이다. 
그 일로 낯선 부대에 근무하게 된 나는, 새 부대에서는 사람들과 별다른 마찰 없이 조용히 지내고 싶은 마음이 올라왔다. 그러다 ‘새로 왔으니 분명히 환영 회식을 하자고 할 텐데, 회식이 교회 모임이랑 겹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되었다. 
‘어쩔 수 없는 거야. 나를 위해서 하는 회식인데 안 갈 수 없잖아?’
나는 당연히 회식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교회 모임이 없는 목요일이 좋겠다고 말해 목요일로 회식이 잡혔다. 하지만 회식 날 저녁, 나는 동대구교회에 다니고 있었는데, 대구중앙교회의 김선영 형제에게 전화가 왔다. 박옥수 목사님이 대구중앙교회에 방문하면서 예정에 없던 특별 집회가 열려 특송을 해야 한다며 퇴근하면 대구중앙교회로 바로 와야 한다고 했다. 나는 동대구교회 합창단 단원이었는데, 그 시간에 회식에 가야 할지 교회에 가야 할지 결정해야 했다. 
‘원래 회식에 가려고 했는데, 왜 하나님은 이런 일을 허락하신 걸까?’ 
그러던 중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는 말씀이 떠올라 교회에 가기로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회식에 가지 않았을 때 일어날 일에 대해 염려도 되었지만, 신기하게도 내 발걸음은 말씀에 이끌려 교회 모임으로 향했다. 
집회에 참석해서 충만한 마음을 가지고 집에 돌아와 보니, 주인집 할아버지가 나를 보자마자 어디 갔다 왔는지 물으셨다. 할아버지는 우리 집에 군인들이 몰려와서 난리가 났었다고 하셨다. 군인들이 말하길 
‘회식 자리에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아 대대장이 화가 나서 선임 상사의 뺨을 쳤다’고 했다. 그제야 제정신이 들어오면서 아차 싶었다. 다음날 출근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불안했던 당시의 내 마음은 ‘하나님, 오늘밤에 저를 데려가시면 좋겠습니다’ 하는 심정이었다. 

핍박 속에 일어난 구원의 역사, 복음의 일꾼들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해서 사무실에 들어갔더니, 바로 전화벨이 울리고 중대 본부로 오라는 호출 명령이 떨어졌다. 중대 본부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노발대발한 선임 상사 선배님이 나를 모질게 구타하기 시작했다. 뺨을 얻어맞고 눈에 불꽃이 튀는데도 아픈 줄 몰랐다. 군홧발로 배를 차이면서도 ‘내가 맞을 짓을 했지’ 하며 그 상황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참으로 놀랍게도 내가 한창 맞고 있을 때 먼발치에서 지켜보던 군인이 하나 있었다. 아버지가 장로였던 그는 군에 입대해서 신앙과 멀어졌던 차에 내게 일어난 일을 지켜보게 되었다. 얼마든지 ‘저런 사람들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욕을 먹는다’고 마음을 닫을 수도 있었는데도 그는 오히려 내게 마음이 열렸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는 그때 구원을 받아 지금은 우리 선교회의 사역자가 되어 같이 복음을 섬기고 있다. 
한번은 박 목사님에게 복음을 들으셨던 우리 부대 군목님이 전화를 주셨다. “내가 보니 군종병이 아직 구원받지 않았는데, 와서 복음을 전해줄 수 있는가?” 하시는 것이었다. 이후 군종병이 구원받으면서 부대 군종실은 우리 모임 장소로 바뀌었고, 그 일은 다른 장병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 군종병도 지금은 일본에 선교사로 파송받아 복음을 섬기고 있다.
하루는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근무하는 형제에게 박옥수 목사님의 설교 카세트테이프를 전해주려고 식당으로 갔다. 그때 마침 점심을 먹으려고 왔던 다른 형제가, 내가 테이프를 건네주는 장면을 보았다. 그 형제는 교회를 피해 군대로 도망와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지내던 김도현 하사였다. 그는 마음에 찔림을 받아서 돌이켰고, 우리 모임에 합류하면서 믿음을 다시 회복했다. 그 또한 현재 아르헨티나에서 힘 있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어 같은 남미 땅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구원받은 형제들이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모임을 가지면 늘 주변에 우리를 감시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셨기에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때로는 모임 장소 주변으로 비가 오는데 우리가 있는 곳은 비가 내리지 않아 신기해하기도 했다. 이렇게 한 명 두 명 모이면서 모임은 점점 더 커져갔고, 형제들과의 만남과 교제는 너무 행복한 시간이 되었다. 이후로도 교회와 연결되어 구원받은 형제들은 복음만을 위해 살려고 선교학교에 들어갔고, 나처럼 전도자가 되고 선교사가 되었다. 

예수님의 피와 말씀으로 담대하게 살게 하신 하나님
부대 안에서의 삶은 핍박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실감할 수 있는 간증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근무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틈나는 시간에 잡지를 보거나 졸고 있을 때 나는 성경을 많이 읽곤 했다. 자신들은 <선데이서울> 같은 잡지를 보는데 내가 성경을 보는 게 못마땅했던 선배들은 나를 일 많은 다른 부서로 보내곤 했다. 이 일로 내게는 또 너무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내가 가기 전까지는 비행기 결함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부서가, 내가 부서를 옮긴 뒤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온해지고 결국 나는 또 시간이 남아서 성경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계속 나를 시기해서 또 다른 부서로 나를 옮기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아예 부대 산하 부서가 아닌 검사관이라는 아주 높은 위치에 두셨다. 그전까지 나를 괴롭혔던 사람들이 이젠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사인을 받아야 본인들 업무에 지장이 없는 자리였다. 그렇게 하나님은 나를 검사관의 위치에 올려주셨고 군생활을 마칠 때까지 나를 보호하시고 은혜를 입히셨다. 나는 마음도 연약하고 형편없는 사람이었는데, 예수의 피를 힘입고 말씀의 힘을 입어 담대한 삶을 살게 하신 하나님이 너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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