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교회 안에 있는 내가 행복자구나
[라이프] 교회 안에 있는 내가 행복자구나
  • 글 | 장미정(기쁜소식산청교회)
  • 승인 2024.02.05 13: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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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호 기쁜소식
성도 간증

1986년 5월 17일, 나는 그날을 잊을 수 없다. 내가 거듭난 날이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고, 친구들을 따라 작은 모임에 갔다가 복음을 들었다. 1986년 하반기에 내가 사는 산청에도 교회가 세워졌다. 입당 예배 때 박옥수 목사님이 오셔서 말씀을 전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당시 산청여고 학생들이 구원받는 귀한 역사가 일어났다. 우리는 틈만 나면 모여서 전도하고 기도하였다. 우리는 교회에 나가면서 많은 핍박을 받았다. 성경이 찢겨지는 것은 당연하였고 머리끄덩이 뽑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떤 친구는 엄마가 학교를 자퇴시켰고, 또 다른 친구 엄마는 경찰을 대동하고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때에 우리들의 인사는 샬롬(평안)이었다. 만나도 샬롬, 헤어지면서도 샬롬.
그렇게 1년이 지나가고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나는 대학에 가고 싶어 공부를 핑계로 예배에 빠지는 일이 많았고, 얼마 뒤에는 아예 교회와 멀어져버렸다. 나는 예수님을 잊고 살았다. 결혼하고 아들들을 낳았고 남부럽지 않게 잘살았다. 간간이 교회 소식을 들었지만 내 마음에는 예수님의 방은 없었다.
세월이 흘러 40년이 지났다. 강산이 몇 번은 바뀌고도 남을 긴 세월이 지나 나는 50대 중년이 되었다. 아들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남편과 함께 일하면서 힘든 일이 찾아왔다. 나는 남편 회사에서 행정 업무를 맡았다. 남편은 아들들과 같이 일하다 보니 많이 힘들어했다. 때로는 싸우기도 했다. 상황이 점점 심각해졌다.
남편과 아들들이 크게 다투고 난 어느 날은 한 아들이 자기 길을 찾아가겠다며 집을 떠났다. 1년이 못 되어 아버지는 아들을 다시 불렀다. 이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되었고, 너무 힘들어 점집도 찾아갔다. 매출도 떨어지고 코로나 팬데믹까지 겹치면서 내 마음은 점점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잠들면서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사는 건 너무 힘들다’는 생각이 내 마음에 자리를 잡았다.
2021년 7월, 사무실에 모르는 분이 찾아왔다. 기쁜소식산청교회 사모님과 진정애 자매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나를 찾아왔다. 사는 이야기도 하고 때로는 성경 말씀도 전해주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사모님과 자매님이 오지 않으면 기다려졌다.
그해 8월쯤에는 ‘하나님 살아 계신다면 저에게 일을 좀 주세요. 그럼 이분들 말씀 믿어 볼게요’ 했는데, 정말 큰 공사를 수주했다. 내가 교회와 연결되면서부터 우리 사업도 점점 좋아졌다. 신앙 서적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사모님과 성경공부를 하면서 말씀이 새록새록 새롭게 내 마음을 적셔주었다. 흐려졌던 구원에 대한 확신도 되살아났다. 너무 감사했다.
2022년 4월, 기쁜소식산청교회 최용석 목사님이 오셔서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가나 혼인 잔치 말씀을 해주셨다. 하인들이 예수님 말씀 그대로 했을 때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다고 하시면서 “자매님, 이젠 교회에 와서 신앙해야지요.”라고 하셨다. ‘그래, 나도 목사님 말씀 그대로 따라가 보자’라는 마음이 생겼다.
그날 저녁 나는 용기를 내어 남편에게 ‘이제 나도 교회에 가고 싶다. 이제 신앙을 하며 내 남은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다음날 남편이 나를 교회 마당까지 태워주었다. 이렇게 나는 40년 만에 교회로 돌아왔다. 교회에 돌아오면 내 원함대로 탄탄대로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40년 전에는 교회가 시장 근처에 있어서 오고 가기 수월했는데, 지금은 예배당을 옮겨서 차가 없으면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목사님이 그리스도인의 본업은 복음이라고 하며 나에게 운전을 배우라고 하셨다. 마음을 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운전면허증은 가지고 있었지만 운전을 해본 적이 없어서 두려웠다. ‘꼭 운전을 안 해도 살아가는데 왜 내가 운전을 배워야 하지? 그렇지만 목사님 말씀대로 한번 해보자.’라고 마음을 바꾸었다.
학원에서 연수를 받고 운전을 배웠다. 그렇지만 도로에 나가는 것이 너무 두렵고 힘들었다. 목사님에게 부탁드려서 교회 차를 졸졸 따라다니며 새롭게 운전 연습을 시작하였다. 산청군 관내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전도도 하고, 심방도 가고….
그렇게 3개월쯤 지나고 나니 운전이 수월해지고 재미가 있었다. 그러다 교회 마당에서 밭으로 떨어지는 큰 사고가 났다. 차는 폐차했지만 다행히도 난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았다.
재작년 12월에는 기쁜소식선교회의 10대 뉴스 경품이벤트에서 3등으로 당첨되는 행복도 있었다. 경품 응모 마지막 날, 목사님이 교회 형제 자매들이 초청된 단체 카톡방에 선교회 10대 뉴스 응모 공지를 올려주셔서 그것을 보고 그대로 했을 뿐인데 커다란 TV를 받았다. 공장에 있는 남편 사무실에 설치해 놓고 보고 있다.
교회로 돌아온 후, 때때로 교회와 반대되는 내 마음도 올라오지만 목사님과 사모님 이끌어 주시는 그대로 따라가 보니 길이 만들어졌다. 주변의 많은 지인들은 일감이 없어서 어렵다고 하는데, 우리 회사는 큰일이나 작은 일이나 일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작년에는 최고로 많은 매출을 올렸다. 요즘 나는 박 목사님이 ‘예수님과 함께하면 천 가지 만 가지를 도와주신다’고 하신 말씀을 조금은 알 듯하다.
지난 12월에는 박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 오셔서 말씀을 전해주셨다. 1986년 헌당 예배에서 처음 뵙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 박 목사님은 38년 된 병자 말씀을 전해주셨다. 내가 바로 38년 된 병자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병자가 ‘맞네! 이분은 뭔가 다르네! 나더러 일어나 걸어가라 하시네. 38년 동안 들어보지 못한 이 말대로 하면 밑져봐야 본전 아닌가? 일단 해보자’ 했을 때 일어나 걸어갈 수 있었던 것처럼, 신앙이 이와 같다고 하셨다. 예배 후에 박 목사님은 나에게 “예수님, 우리 자매님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살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안수 기도를 해주셨다.
그렇다. 하나님은 당신의 몸 된 교회를 통하여 일하시고 당신의 종들을 통하여 일하시기에 종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따라가면 언제나 새롭고 산 길이 열렸고 하나님의 역사의 보따리가 놓여 있었다. ‘교회 안에 있는 내가 바로 행복자구나!’ 이 사실을 맛보게 하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영광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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