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만 목사 성경세미나 / 둘째날 오전말씀
정용만 목사 성경세미나 / 둘째날 오전말씀
  • 김혜정
  • 승인 2004.06.08 17: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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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관념에서 벗어나야...

저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막연했는데 요한복음 1장을 읽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분명한 대상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말씀을 믿는 것이고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저는 말을 잘하지 못했습니다. 산에 올라가서 혼자 말하는 연습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고린도전서를 읽다가 하나님께서 모든 구변에 능하게 하셨다는 말씀을 읽고 믿음이 왔습니다. 내 스스로는 벗어날 수 없었는데 말씀이 내 생각에서 잡혀 있던 마음을 풀어 벗어나게 한 것입니다.

성경에 땅은 스스로 열매를 낼 수 없으나 땅이 씨를 품으면 싹이 나고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땅이라도 씨가 없으면 아무것도 나지 않습니다. 농부는 땅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육체라는 땅에 일하시길 원하십니다.
아무리 좋은 성격이나 마음이 있어도 하나님은 거기에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에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30배, 60배, 100배 열매를 맺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좋은 땅이라는 것은 말씀을 듣고 받을 수 있는 마음입니다.
교회 안에 성격이 온화하고,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복을 받는게 아닙니다. 성격이 나빠도 복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는 눈은 사람이 보는 눈과 다르고 하나님이 보는 세계는 사람이 보는 세계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착하고 성실한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기에 좋은 마음은 말씀을 듣고 받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요한복은 1장에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자신이 만났던 예수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기록하였고 선지자가 말씀한 메시야를 만났다.’ 라는 말을 듣고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 고했습니다. 나다나엘은 덮어놓고 믿는 사람이 아니였습니다.
성경에 메시야는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했기 때문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 고 했습니다.
나다나엘은 말씀을 믿는 사람이였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참 이스라엘 사람이고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간사한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생각, 주장을 따라가는 것은 사단에게 속은 생각의 세계를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간사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아름다운 사람은 교회 안에 말씀이 나타났을 때 그대로 믿는 사람.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이 호송될 때 호송관 율리오란 사람이 바울을 친절하게 대해주었습니다. 죄수임에도 불구하고 풀어주면서 친구에게 대접받게 허락해주었습니다. 바울을 신뢰하는 것 같고 친절하게 대하였으나 항해를 할 때 선장이나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었습니다. 나중에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바울의 도움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믿음은 좋은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만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절망적인 마음에 말씀이 들어가니까 소망이 생기고 생명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만난 마음이 하나님 앞에 좋고 간사치 않은 사람이다
간사한 사람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다해도 믿지 않은 사람이다.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든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하나님은 구하면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모든 자에게 응답하십니다.

열왕기하 2장에 엘리사가 여리고로 가는데 이성의 터는 좋으나 토산이 익지 못하나이다. 엘리사는 터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물을 고치려고 합니다.
세상에는 두개의 물길이 있습니다.
첫째는 ‘생각’이라는 물줄기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남의 말씀입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은 하나님을 거스릅니다.
하나님은 터를 고치시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품고 있던 육신의 생각을 바꾸기 원하십니다. 인간적인 생각과 관념을 넘어서 말씀 안에서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스르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을 따라가는 자체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흘러들어오지 않으면 지극히 인간적인 사단에게 쓰임을 받을 수 밖에 없고 하나님의 역사를 단절시킬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 속에서 예수님이 죽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악하고 추하다는 것은 거름이 많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일하실 수 있는 좋은 터라는 것입니다. 내가 성격이 안 좋고, 뭐가 안 좋다는 것은 변명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안 바꾸고 살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마음을 따르지 말씀을 안 따라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과 만나면 모든 것이 바뀌게 갖추어 놓으셨습니다.
사울의 신앙의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그가 에브라임 산지와 살리사 땅으로 두루 다니되 찾지 못하고 사알림 땅으로 두루 다니되 없고 베냐민 사람의 땅으로 두루 다니되 찾지 못하니라
그들이 숩 땅에 이른 때에 사울이 함께하는 사환에게 이르되 돌아가자 내 부친이 암나귀 생각은 고사하고 우리를 위하여 걱정하실까 두려워하노라 (삼상9:4-5) ]


사울은 관념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나귀는 땅을 밟고 다니는 짐승이니까 땅에서 찾다가 없으니까 포기합니다.
이것이 사울이 하나님앞에서 버려지는 이유입니다.
일어버린 암나귀는 하나님께로 갔을 때 찾아집니다.

[대답하되 보소서 이 성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존중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라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하나니 그리로 가사이다 그가 혹 우리의 갈 길을 가르칠까 하나이다(삼상 9:6) ]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땅에서 찾다가 즉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겁니다. 관념을 떠나지 않으면 절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을 넘어서 일하는 분입니다.
목적이 하나님을 얻는데 있다면 형편이 어려운 것은 문제가 안됩니다. 고난을 넘어본 적이 없으니까 어려움이 오면 어려움, 문제 속에서만 빠지지 고난 속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구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내가 부족해도 문제가 안되고 연약해도 문제가 안되고 하나님을 구하면 된다는 말씀을 수없이 들었는데도 자주자주 내 육신의 강한 생각이 말씀을 무시해 버립니다. 그것은 마치 짐짓죄와 같은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짓고 있는데 죄인이지...” 하면서 육신이 말씀을 무시하고 짓밟아 버리는 것입니다.
땅에서 의를 찾을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을 해결하신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있다는 겁니다. 신앙은 이 땅에서 하나님에게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육신의 기대에서 하나님에게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07-06-13 17:02:11 게시판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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