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었다가 살았으며 잃었다가 얻었기로
죽었다가 살았으며 잃었다가 얻었기로
  • 한명자
  • 승인 2013.10.15 18: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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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간증

 

 

 

 

 

 

 

 

 

 

 

 

 
부잣집의 가난한 딸
우리 엄마는 반 무당이셨다. 어릴 적에 아프다고 하면 둥근 박을 갈라 만든 바가지에 밥을 담아 칼을 함께 가지고 들어오셔서, 아파 누워 있는 나에게 침을 세 번 뱉으라 하시고 머리카락과 손톱을 세 번씩 잘라서 바가지에 담은 후 바가지를 쓱쓱 긁으면서 중얼거리셨다. 귀 기울여 들어보면 “지금 해주는 이 밥 먹고 아픈 아이에게서 속히 떠나가라” 하고 어르며 발끝으로 십자가를 그리시고, 칼을 집어던지며 “만약 이 밥을 먹고 떠나가지 않으면 칼로 배를 갈라 다시는 먹지도 못하게 할 거다” 하며 푸닥거리를 하셨다. 이상하게도, 엄마가 그렇게 하고 나면 심하게 아프던 배나 머리가 씻은 듯이 나았다.
나는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등대리, 아름다운 산골 마을에서 부잣집의 딸로 태어났다. 식구도, 논도, 밭도, 돈도, 가축도 많았다. 나는 공부를 하고 싶었고, 훌륭한 여자 변호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여자가 공부하는 것을 반대하셨다. 엄마와 올케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중학교는 마쳤지만 고등학교 진학은 포기하고, 부산에 살던 큰오빠 집으로 가서 방직공장에 다니며 돈을 벌기 시작했다. 마침 회사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루 세 끼, 한 달이면 식권이 90장 필요했지만 30장만 사고 60장 값은 저축했다. 공부할 돈을 모아야 했다.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면 배가 고플 수밖에 없기에, 밥에 간장과 고춧가루를 듬뿍 넣어서 아주 맵고 짜게 비벼 먹었다. 그러면 계속해서 갈증이 나 종일 물로 배를 채우면서 배고픔을 이길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우리 가족 중에서 내가 키가 제일 작다.
마음엔 아버지를 향한 원망이 쌓여갔다. 돈이 있으면서도 딸이라는 이유로 학교를 못 가게 막으신 아버지가 너무 미웠다. 내 힘으로 공부해서 훌륭한 변호사가 되어 아버지 앞에 떳떳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싶어서 고향집과 인연을 끊고 살았다.

특별 야간 학급의 1기생이 되어
수동으로 전화를 연결해주던 그 시절, 전화 교환원 자격증 시험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것보다 어려웠다. 난 그 자격증을 땄다. 그런데 중졸(中卒)이라는 이유로 매번 입사 시험에서 떨어졌다. 내 원함대로 되는 것이 없어서 자살을 시도했다. 알약 수십 개를 먹었는데,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죽음도 허락하지 않는 신이 야속했다.
직장생활을 하던 중, 박정희 대통령이 만든 ‘산업체 특별 학급’이란 고등학교 야간 학급에 1기생으로 입학해 늦깎이 여고생이 되었다. 처음 생긴 산업체 특별 학급이다 보니 매스컴과 방송사에서 앞다투어 취재를 나왔다. 우리 반 실장이었던 나도 교장선생님과 함께 생방송에 출연했다. 아들과 딸을 차별대우하는 아버지를 고발하고 싶었다. 그런데 방송 담당자는 ‘가난한 시골 농부의 딸로 돈이 없어서 학업을 포기하고 공장에 다니다가 대통령 각하의 크신 배려로 늦게나마 여고생이 되어 감사하다’고 말하란다. 다음날 경향신문에 실린 신문 기사를 보고 아버지가 우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집을 떠나야 했던 내 인생살이가 너무 가혹했기에 난 아버지를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용서할 수 없었다.

 
결혼하면서 시작된 전쟁
그토록 원하던 고등학교에 들어갔지만 공부보다는 연애하기에 바빴고, 결국 대학을 포기하고 결혼했다. 남편은 직업 군인, 장기 하사관이었다. 강원도 인제의 첩첩산중을 지나 ‘천도리’라는 곳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밥만 먹으면 체하고, 밀가루 음식을 먹으면 구토와 복통에 시달리며 두통으로 밤을 새워야 했다. 몸이 점점 야위어 갔다. 행복해야 할 신혼생활이 불행으로 치닫고 있을 즈음, 친정 엄마가 보내주신 부적 일곱 장이 내 생명의 은인이 되었다. 부적을 천장, 벽, 방바닥, 신발장, 베개 속에 넣은 그날부터 급체와 두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건강을 되찾아 평안한 날들이 잠시 이어지다가, 부대장님 댁에서 하는 성경공부 모임 때문에 우리 부부 사이에는 정신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육체의 고통에서 겨우 벗어나 제대로 행복하게 살아보지도 못한 채 시작된 종교 전쟁. 남편은 부적을 귀신이라며 없애라고 하고, 그것을 나는 나를 살려준 구세주처럼 믿었다.

내가 지옥에 가는 것이 사실이 되었다
남편이 성경공부에 더 깊이 빠지기 전에 건져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내 발로 모임에 참석했다. 열두어 명이 둥글게 둘러앉은 가운데 한 남자가 성경을 펴놓고 이야기했다. 성경은 사실이고, 지옥과 천국이 있단다. 죄가 있으면 지옥에 가고, 없으면 천국에 간단다. 잘못된 이야기를 찾아내려고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 자세가 바뀌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다. 아버지를 마음으로 미워한 것이 살인이란다. 내가 살인자가 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가는 것이 사실이 되었다. 여덟 시간째 계속 앉아 있었다. 꾸벅꾸벅 조는 사람도 있고, 중간에 나가버린 사람도 있고, 구원을 받았다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다. 난 가슴이 답답해 울고만 있었다.
성경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나는 그때 성경이 사실인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고, 예수님의 피로 우리 죄가 씻어졌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후로 일곱 장의 부적은 재가 되어 사라졌다. 나에게 복음을 전해준 교회에서 만든 ‘세모 스쿠알렌’도 팔고, 열심히 교회에도 나갔다. 부대원들을 우리 집으로 초대해 설교 말씀 테이프를 듣게 하며 작은 집회도 하면서 신나게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마음에 평안은 없었다.

정신없이 돈을 벌기 시작했다

 
다니던 교회에서 ‘1992년 7월에 구원받은 사람이 공중에 들림받는 휴거가 일어난다’고 했다.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아이들을 공부도 시키지 않고 전도하러만 다녔다. 하지만 1992년 7월은 그냥 지나가버렸고, 남은 건 한글도 아직 모르는 두 아들과 다시 시작된 부부싸움이었다. 우리 부부는 교회를 떠났다.
돈이 있어야 산다고 뒤늦게 깨달은 것처럼 정신없이 돈을 벌기 시작했다. 부대 잔반으로 개를 키우기 시작했다. 두 마리로 시작해서 수십 마리로 늘어나 농장이 되었다. 어미 개가 낳은 강아지들을 장에 내다 팔면 남편 월급보다 많았다. 그런데 우리 부부는 싸우고, 또 싸웠다. 돈도 잘 벌었는데 왜 그리 서로 죽일 듯이 미워했는지 모르겠다. 화장품 가게, 건어물 가게, 김구이 집, 군 복지회관 서빙, 보험, 다단계, 민박…. 여러 일들을 하며 돈이 불어나는 만큼 우리 부부의 가슴에 상처와 골도 깊어져 갔다. 민박집을 할 때는 여름 한 달 고생하면 남편 1년 연봉보다 많이 벌었다. 부동산에 투자해서 돈이 돈을 벌었다. 저축 수기를 써내 참모총장 표창도 받았다. 하지만 퇴근하는 남편의 군화 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울렁거렸다. 늘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삶이 이어졌다.

알코올 중독에, 우울증에, 의부증까지
남편이 제대해 울산으로 이사했다. 신정동에 ‘행복찾기’란 여성 의류 가게를 시작했다. 장사가 잘되어 돈도 제법 벌었다. 여기저기 땅도, 아파트도 투자 개념으로 사놓았다. 돈은 많아지는데 내 마음은 더 곤고하고 우울해져서 살기 싫었다. 알코올 중독에, 우울증에,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가게에 찾아오는 손님들이 하는 말을 듣다 보면, 돈이 많은 울산 사람들은 부도덕했다. 우리 남편도 밖에 나가서 그런 삶을 살고 있다고 믿어졌다. 의부증까지 더해진 것이다. 생각이 눈덩이처럼 커져서, 남편이 우리 가정을 버렸다고 느꼈다. 한평생 돈만 벌고 살아온 내 인생이 바보 같았고, 계속해서 죽음을 생각했다. 혼자 죽기는 억울해 남편 먼저 죽이고 죽어야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흘러갔다.
그 어둠에서 벗어나려고 남편과 함께 자전거도 타고, 노래방에도 가고, 운동도 하고, 여행도 가보았지만, 시작은 좋은데 끝은 꼭 싸움으로 이어졌다. 난 이혼을 결심했고, 남편은 정신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아 보자고 나를 설득했다. 이혼할 생각으로 무당을 찾아가니, 천생연분이라 남편이 절대 나를 놓아주지 않고 개가 닭을 잡아먹지 않고 괴롭히기만 하듯 괴롭힌다고 했다. 우리 부부 사이가 꼭 그랬다. 한 가지 길이 있다면 예수를 믿으라고 했다. 내 기억에 쓰라린 기억으로 남아 있는 교회, 그런데 무당의 이야기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교회는 예배를 몇 시에 드립니까?”
점점 심해지는 남편의 천대와 멸시를 이기지 못해, 자전거를 타고 4차선 도로 내리막길에서 눈을 꼭 감고 도로를 가로질러 달렸다. 하지만 어떤 차와도 부딪히지 않고 길 건너편 인도(人道)에 부딪혀 쓰러졌다. 타박상을 약간 입은 것 외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죽는 것도 안 되는구나!’
7년이란 긴 세월 동안 전화로, 그리고 만날 때마다 전도하던 올케 언니의 말이 생각났다.
“고모, 고모가 전에 받았다는 구원, 구원 아니야. 이론적인 성경 지식 말고 마음에 정확히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나야 돼.”
어느 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친정 엄마가 뇌졸중으로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았다. 가장 먼저 올케에게 전화해서 “언니, 우리 엄마 구원받았어? 천국 가셔?” 하고 물었다. 올케는 엄마가 기쁜소식선교회 수양회에 참석해서 구원받으셨다고 했다. 그 이야기에 다시 마음이 흔들렸다.
하루는 술에 잔뜩 취해 땅을 치며 통곡하고 있는데,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모습이었다. “돌아와 돌아와…” 찬송가를 부르짖었다. 나를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었다. 기쁜소식울산교회에 전화를 했다. “그 교회는 예배를 몇 시에 드립니까?”

살아서 맛보는 천국이 내 마음에 창조되었다
택시를 타고 기쁜소식울산교회를 찾아가 예배에 참석했다. 당시 담임 목회자로 계시던 김영교 목사님이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긴다’는 출애굽기 17장 말씀을 전하셨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손을 들어주시면 이 지긋지긋한 생활과 남편에게서 해방받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의 영적 상태를 진단받고 싶어서 목사님과 상담을 나누었다.
“구원받으셨습니까?”
“예, 받았습니다.”
목사님 앞에서 이사야 44장 22절을 비롯해 성경 구절을 줄줄 외웠다.
“아주머니, 38년 된 병자가 긴 세월을 누워만 있다가 걸어갔어요. 그런데 걸어다니며 살다 보니 힘들다고 다시 병석에 가서 눕겠습니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난 일어나 걸어간 적이 없구나! 내 마음의 주인은 여전히 나이고, 내가 왕이 되어서 내 인생을 끌고 가고 있었구나!’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차들이 무서웠다. 죽으면 지옥이기에.
목사님과 두 번째 만나 이야기하면서 레위기 4장 28~30절 말씀이 믿어졌다. 그리고 나니 전에 알고 있었던 이사야 44장 22절 말씀, 히브리서 10장 14절 말씀의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복음이 얽혔던 실타래가 풀리듯 풀렸다.
구원받은 후, 그토록 벗어나려고 해도 안 되었던 의부증, 우울증, 알코올 중독에서 온전히 벗어났다. 말씀만 믿었을 뿐인데…. 약으로도, 그 어떤 것으로 벗어날 수 없어서 죽음만 생각했는데, 새 힘이 생겼다. 신기했다! 형편은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는데, 내 마음에서는 찬송이 나오고 내 손에는 박옥수 목사님이 쓰신 책들이 매일 바뀌어 들려 있었다. 책에 담긴 내용들이 신기하고 달콤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그 어디나 하늘나라’란 찬송가사처럼 살아서 맛보는 천국이 내 마음에 창조된 것이다.

“청소부라도 좋으니 날 좀 천국 들어가게 해주세요.”
남편의 핍박이 심했다. 내가 술주정만 안 하면, 우울증으로 자살 기도만 안 하면, 의부증으로 의심만 안 하면 매일 행복하게 해주겠다던 남편이 더 심하게 어려움을 주었다. ‘전에 복음을 전한다던 교회에 빠져서 그 고생을 해놓고 또 그런 교회냐?’며 차라리 가까운 곳에 있는 아무 교회나 가라고 했다.
하루는 남편이 막내 선형이와 함께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네 엄마가 변했어. 신기하기는 해. 술도 안 먹고, 죽는다며 울지도 않고, 나를 의심하지도 않고, 얼굴에 늘 웃음이 가득하니…. 저렇게 좋으면서 나보고는 왜 교회에 가자고 안 하는 거야?”
“아버지, 엄마가 교회 가자고 하시면 가실 거예요?”
“아니, 죽어도 안 가지.”
“엄마가 그걸 아시니까 말 안 하는 거예요.”
남편은 울산으로, 부산으로 물건을 하러 다니면서 기도했단다.
“하나님, 천국 마당을 쓰는 청소부라도 좋으니 날 좀 천국에 제발 들어가게 해주세요.”
내가 구원받고 1년이 지난 후 남편도 마침내 구원을 받았다. 그 후로는 매일 함께 기도하고, 찬송하고, 성경을 읽었다. 가게에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구원받아 교회에 세워지는 사람들이 일어났다.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2011년에는 남편과 함께 류홍렬 목사님 내외를 따라 아프리카 4개국 월드캠프의 봉사팀으로 갔다. 그곳에서 한국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마음의 세계를 배우고, 말은 안 통해도 마음이 흐르는 것을 맛보았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복음을 위해 사시는 선교사님들의 삶을 보며 살아 계신 하나님을 더 느낄 수 있었고, 부엌에서 함께 봉사하던 검은 피부의 자매님들과 헤어질 때는 가지 말라고 하는 그들과 부둥켜안고 울기도 했다. 내 속에 없던 그들의 순수한 마음을 마음에 담아왔다. 부룬디에서는 캠프에 참석한 학생들과 땀에 옷이 젖도록 함께 춤추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백혈병인 건 알고 계셨죠?”
귀국하는 길에 말라리아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얻은 행복이 너무 커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동행했던 목사님들, 사모님들 가운데 나보다 말라리아 수치가 높게 나온 분들도 다 완쾌되었는데, 수치가 가장 낮았던 나는 병세가 점점 심해졌다. 6개월 동안 기침과 호흡곤란 증세가 약해졌다 심해졌다를 반복하며 나를 괴롭혔다. 어느 순간부터는 체중이 급격히 줄고 식은땀이 나고 무기력해지면서 가슴이 답답하고 몸에 멍이 자주 들었다.
2012년 4월 30일, 왼쪽 옆구리에 심한 통증이 느껴져 동강병원에 갔다가 바로 울산대학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고통이 너무 심해서 아무 생각도 없었다. 피를 빼가던 인턴이 “백혈병인 건 알고 계셨죠?” 하고 물었다. 내가 백혈병? 순간 머리를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TV 드라마에서 예쁜 모자를 쓰고 인생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여자 주인공이 걸리는 병. 그 병이 나에게 찾아온 것이다.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죽을 병인데…. 나는 오랫동안 남편에게 시달린 피해자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먼저 죽게 되어 남편이 나 때문에 피해를 받는구나. 진작 알았으면 잘해주고 살 걸….’
대체의학으로 고치기로 마음먹고 새벽 5시부터 밤 12시까지 운동요법, 약물요법, 식이요법을 병행했다. 치료를 시작한 지 7주가 지났을 때 사역자 이동이 있어 오성균 목사님이 우리 교회로 오셨다. 첫 부인회 때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나았다’고 씩씩하게 간증했다. 목사님은 병원에 가서 백혈구 수치가 좋아지고 있는지 검사라도 해보라고 권하셨다. 검사 결과, 그동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치는 악화되어 있었다.
문밖 출입을 못 할 정도로 몸이 쇠약해져 갔다. 물 한 모금 못 먹고, 왼쪽 옆구리부터 배꼽까지 장기들이 굳어 딱딱했다. 목사님은 병원 치료를 권하셨지만 나는 고집스럽게 내 방법을 택했다. 고통이 극심하면 하나님께 “빨리 데려가 주세요.” 하고 기도하다가, 고통이 줄면 “아까 한 기도 취소입니다. 하나님, 나 부지런히 전도했잖아요. 아직 두 아들과 며느리들, 오빠와 언니 가족들에게 복음도 못 전했으니 아직은 아니잖아요. 살고 싶습니다.” 하고 기도했다.
목사님은 다시 병원 치료를 권하셨지만 난 또 내 고집대로 경기도 가평에 있는 암 요양원으로 떠났다. 요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죽을 수도 있었지만 병원에 가기가 싫었다. 휠체어에 실려 요양원 방에 들어갔다. 그곳에 있는 암 환우(患友)들이 나를 보고 일주일 안에 죽어서 나갈 거라고 서로 이야기했다.
그동안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 내가 아픈 것을 숨겨왔는데, 오빠와 언니와 동생과 그 가족들이 보고 싶었다. 연락을 받고 찾아온 가족들을 보니 새 마음이 생겼다. ‘내겐 하나님이 계시잖아. 아직 이들에게 복음도 못 전했는데….’ 살기로 마음을 바꾸자 식사를 조금씩 할 수 있었다. 문 밖에만 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나갔다. 두 지팡이를 의지해서 걸었다. 다시 하나를 의지하고 걷다가, 그것도 버리고 혼자 걸었다. 등산도 했다. 방에선 늘 인터넷을 통해 박옥수 목사님의 말씀이 흘러나왔다.

“이미 다 이루어 놓으셨는데 이루어 달라고 했어.”
기독교 신자 환우들이 매일 저녁 기도하고 찬송하는 모임의 진행을 맡아 달라고 했다.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 50년을 목사로 활동하다가 폐암과 간암에 걸려 오신 73세 할머니. 그분은 죽음 앞에서 천국에 갈 확신이 없어 고통하며 ‘영적인 인도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단다. 할머니는 복음을 듣고 너무 많은 사람들을 잘못 인도했다며, “이렇게 쉬운 걸…. 이미 다 이루어 놓으셨는데 이루어 달라고 했어.” 하며 나의 두 손을 꼭 잡고 “선교사님, 고맙습니다!” 하셨다.
대학 교수, 한의사, 패션 회사 사장, 경산 시청 여직원, 홍콩의 여자 변호사, 중장비 회사 사장, 고등학교 여교사…. 많은 분들이 구원을 받고 기뻐했다. 요양원에서 가까운 기쁜소식춘천교회의 목사님과 형제 자매님들이 찾아와서 환우들과 교제해 주셨다. 박옥수 목사님의 여러 저서들이 요양원에 비치되면서 환우들을 빛과 평안으로 인도했다.

그리스도의 영이 죽을 몸도 살리신단다
하나님은 나에게 약속을 주셨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계시면 그 영이 죽을 몸도 살리신단다. 먼저 마음을 더듬어 내가 구원받은 때를 생각해 보았다. 구원이 확실했다.
‘나는 분명히 2011년 4월에 구원받았다. 그렇다면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이 내 몸도 살리시겠다!’
그동안 믿음이 아닌 것을 붙잡고 죽을 만큼 고생하며 어리석은 길을 걸었지만 하나님은 그런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내 마음인 것을 알게 하셨고, 말씀을 믿게 하셨다. 진작 목사님의 음성을 듣고 내 고집을 꺾었더라면 고생을 덜 하고 믿음을 가졌을 거란 마음이 들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세계인 것을 이제는 알 것 같다. 높은 마음, 옳은 마음을 다 버리게 하시고 은혜를 입을 낮은 마음으로 나를 바꾸어 주신 하나님이 감사하다.
건강을 되찾고, 지난 8월 27일에는 SBS의 <생방송 투데이>라는 프로그램의 ‘구사일생’이란 코너에 출연했다. 그 방송을 보고 가족들이 마음을 활짝 열었다. 그들 입으로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켰다고 한다. 잊고 살았던 지인들과도 연락이 되어 복음 전할 기회가 주어졌다. 모두 내가 믿는 하나님께 마음을 열었다.

다시 주어진 삶, 복음 전하며 맘껏 행복해 보련다
늘 돈만 벌고 일만 하던 우리 부부의 삶에 하나님이 많은 변화를 주셨다. 마음을 닫고 살던 사람들과 화해하게 하신다. 얼마 전에는 큰아들 내외가 사는 베트남 하노이에 여행을 다녀왔다. 아들이 그곳 선교사님과 연결되고, 며느리도 사모님과 교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추석 명절엔 친정 식구들과 마음을 나누었다. 작은아들 내외에게도 하나님이 일하심이 보여 감사하다.

 
그렇게 바꾸어 보려고 했지만 안 되었던 남편 이정수 형제는 이제 무서운 호랑이에서 너무도 부드러운 남편이 되어 나와 마음을 나누며 산다. 우리는 함께 복음 전하는 전도자가 되기 위해 마하나임 사이버신학교에 입학했다. 1학기를 마치고 2학기 수업을 받고 있는 중이다. 다시 주어진 삶, 복음 전하며 맘껏 행복해 보련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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