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어갈 소망의 땅, 독일
선교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어갈 소망의 땅, 독일
  • 박민희 편집장
  • 승인 2015.04.01 15: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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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교회를 찾아서/ 독일 교회

 
기쁜소식선교회에서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 독일. 하지만 교회들이 아직 연약하다. 복음을 전하려고 여러 모양으로 다가가지만 독일인들이 자신의 테두리에서 좀체 벗어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이 시작되어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던 나라지만 이제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에서조차 떠난 탕자와 같은 나라. 굶주린 그들의 마음에 다가갈 길을 찾지 못해 선교사들은 안타까움이 컸는데, 2015년 들어 그 길이 열리고 있다. 바로 마인드 강연! 풍요 속에서 사는 이들이 마인드 강연을 들으며 마음을 열고 속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열린 그 마음에 복음을 전할 소망으로 선교사들은 가슴이 설렌다.

담을 넘은 첫 번째 가지
1988년, 서대문교회에서 목회하던 권오선 목사는 기쁜소식선교회의 선교를 담당하고 있었다. 선교사가 아직 한 명도 파송되지 않은 때였다. 선교 경험이 전혀 없었기에 무얼 해야 할지 모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선교에 대한 말씀을 교회에 허락하셨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창 49:22) 가지는 스스로 담을 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곁에 있는 샘물을 빨아들여 가지에 공급해 줌으로써 담을 넘는 것이다. 주님의 마음을 품은 교회의 힘으로 선교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1989년에 해외여행 제한이 완화되고, 그 해 6월 10일에 기쁜소식선교회의 첫 번째 선교사가 파송되었다. 처음으로 담을 넘은 가지는 권오선 목사 가정, 선교지는 독일 베를린이었다. 권 목사 가족은 여권을 준비한 후, 독일 체류 비자가 필요한지도 모른 채 독일로 향했다. 무엇이 준비되어서가 아니라 교회의 힘이 그를 담 밖으로 밀어낸 것이다. 동•서독을 나누는 ‘베를린 장벽’이 건재하던 냉전시대의 중심 도시 베를린. 복음이 전파되면서 이 장벽도 무너진다.
 권오선 선교사 가족과 동행한 박옥수 목사는 베를린에 일주일을 머물렀고, 그 시간 동안 대여섯 한인韓人 가정이 연결되어 교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후 박 목사의 인도를 좇아 한인들이 기쁜소식선교회 독일 지부 법인을 만들었고, 이어 선교사 체류 허가를 받아 권 선교사 가정이 정식으로 선교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권 선교사는 “하나님! 독일 전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곳곳에서 성경공부를 하고 싶습니다”라고 기도했다.
 1992년 12월, 독일 현지인 선교를 위해 권 선교사는 베를린에서 마인츠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성경공부 모임들이 일어나 독일인들이 구원받기 시작했다. 또한 난민수용소에서 ‘영어 성경공부’가 시작되어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이 구원받았다. 그곳에서 구원받은 가나 사람 로버트가 괴팅겐으로 가면서 괴팅겐의 가나 사람들이 복음과 연결되었다. 1994년, 독일 수양회를 마치고 박옥수 목사가 괴팅겐의 가나인 모임에 초청받아 주일 예배 때 말씀을 전한 것을 시작으로 괴팅겐 성경공부가 시작되었다. 매주 금요일 권오선 선교사가 마인츠에서 300km를 오가며 모임을 인도했다. 1년 정도 지났을 때 모임의 인도자였던 사무엘 형제(현 괴팅겐교회 장로)가 “우리 모임이 기쁜소식선교회에 속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를 위해 선교사님을 보내 주십시오!” 하고 간청했고, 1995년 3월에 괴팅겐에 선교사가 파송되었다.
 1995년 여름, 사무엘 형제와 테레사 자매 부부는 케냐를 방문하려는 박옥수 목사에게 “가나를 방문해 우리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십시오!” 하고 여러 번 간청했다. 박 목사는 그들의 간청을 거절할 수 없어 일정을 바꿔 가나를 방문해 가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이어 두 명의 선교사가 가나에 파송되어 가나 선교가 시작되었다. 사무엘과 테레사 부부는 그들의 가족과 친척들이 많이 구원받아 가나 선교의 중심적 역할을 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나는 가나에서 일곱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겉으로 착한 아이로 지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던 나를 아버지는 무한 신뢰했고, 깊이 사랑해 주셨다. 아버지는 ‘너희들 중 하나는 박사가 되고, 하나는 목사가 될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예언은 거의 맞았기에, 박사가 되는 사람은 나라고 마음먹었다. 부모님은 나를 중학교에 보내는 것도 감당할 수 없었지만 장학금과 주위의 도움으로 중학교에 갈 수 있었다. 5년 학업을 마치고는 교사가 되기 위해 대학에 갔는데, 군사정부에 대항해 시위하다가 학교에서 쫓겨났다.
 나는 교회에 다니며 율법을 지키려는 신념으로 죄를 멀리하고 공부에 집중했다. 독일어를 배워 독일로 간 후, 괴팅겐대학교에서 삼림학을 공부했다. 같은 대학, 같은 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도 받았다. 지도 교수님이 해당 분야에 아주 유명한 분이어서, 같은 분야를 공부한 나도 정부에서 연구하는 학자로 뽑아 주었다. 외국인이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아주 드물었기에 나는 무척 운이 좋다고 여겼다.
 가나에서 겨우 지켰던 율법들을 독일에서 지내면서는 더 이상 지킬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성에 대한 욕구를 참기 힘들어 어두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 삶은 여러 문제들을 일으켰기에, 나는 그 문제에서 헤어나오기 위해 가나로 돌아가 지금 아내인 테레사와 결혼했다. 하지만 결혼하고도 나는 여전히 어두운 삶을 살았다. 아내도 내 악한 삶을 알게 되었고, 죽고 싶을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었다.
 그때 하나님을 찾기로 했다. 가나 사람들과 모여 기도회를 가졌다. 독일과 영국의 목사님들을 초청해 설교 말씀을 듣기도 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그 모임에 나오던 사람을 통해 권오선 목사님과 만나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권 목사님은 우리 행위가 아닌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그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였고, 나는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죄가 없고, 의인이 되었다. 1994년의 일이다. 이후 아내 테레사도 거듭났다.
 교회에 목회자를 보내 달라고 하여 괴팅겐에서 우리 선교회 산하 교회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1995년에 케냐를 방문하시는 박옥수 목사님께 가나에 들러 달라고 간청했다. 목사님은 우리 청을 받아들여 가나에 다녀오셨고, 이후 선교사님이 가나에 파송되어 우리 부부의 많은 가족들과 친척들이 구원받았다. 그 가운데 나의 조카 아사르와 아내의 조카 아토는 복음 전도자가 되었다.
 교회 안에서 보낸 20여 년, 어려움도 있었지만 정말 감사하고 행복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하신 일들을 글로 남기려 한다면 책 한 권은 필요할 것이다.” (사무엘 장로)

 지금 독일 교회는 루드빅스하펜을 중심으로 괴팅겐, 레겐스부르크, 뒤셀도르프, 베를린, 뮌헨 등 여섯 개 교회가 세워져 주님을 섬기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

시작은 막막했지만 수많은 간증들을 얻다
독일인들은 지적이고 논리적이어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아주 이상하게 생각한다. 어릴 때부터 자신의 주장과 논리를 펼치는 교육을 받기 때문이다. 그런 독일인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서 복음을 들을 수 있게 할지가 선교의 가장 큰 과제였다.
 2011년 2월, 미국에서 선교하던 오영신 선교사가 루드빅스하펜으로 가면서 독일 선교는 전환기를 맞는다. 그 해에 첫 번째 월드캠프를 쾰른에서 가졌고, 그때 여러 대학교에서 홍보를 많이 했다. 독일에서는 무엇이든지 법에 따라 해야 하기에 외부에서 하는 행사는 반드시 허락을 맡아야 한다.
 “독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독일 사회의 규범이나 문화를 잘 알지 못했기에 학교의 허락 없이 과감하게 홍보했어요. 아무도 우리를 제재하지 않았는데, 허락 없이 그렇게 크게 홍보한다고 생각지 못했던 거예요. 어느 대학 캠퍼스에서는 한 장소에서 하루 종일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홍보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총장실 옆이었어요. 40여 명의 유럽 단기선교사들이 좁은 집에서 함께 먹고 자고 교제하며 땀 흘리면서 홍보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오영신 선교사)
 두 번째 월드캠프를 할 때에는 길거리에서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IYF 건전댄스를 선보이며 홍보했다. 며칠 동안 많은 사람들 속에서 단기선교사들이 한복과 태권도복을 입고 캠프를 마음껏 알릴 수 있었다.
 2014년에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월드캠프를 가졌다. 그곳에는 형제 자매들이 전혀 없었기에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마음 하나로 시작했다. 40여 명의 유럽 단기선교사들이 캠프를 홍보하러 가야 하는데, 머물 숙소도 없었다. 선교사들은 홍보 기간을 40일로 정하고, 단기선교사들과 함께 프랑크푸르트로 40일 동안 무전전도여행을 떠났다. 하나님이 자게 하시는 곳에서 자고, 먹게 하시는 것을 먹고…. 불가능할 것 같았지만, 하나님의 보호 안에서 먹고 자며 애굽 땅을 뒤덮었던 메뚜기 떼처럼 프랑크푸르트를 휩쓸고 다니며 홍보했다.
 시작은 너무 막막하고 어려웠지만, 그렇게 지내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는 수많은 간증들을 얻었다. 힘과 소망과 감사가 넘쳤다. 그리고 홍보 덕분에 월드캠프 기간에 가진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에 800~900명의 프랑크푸르트 시민들이 찾아와 기쁨과 행복을 누리고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프랑크푸르트 월드캠프가 제 마음에 큰 감사와 감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하나님이 독일을 조금씩 움직이시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오영신 선교사)

 
유럽인들에게 다가갈 새로운 길을 찾다
2015년에는 독일 선교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3월 초에 유럽에서 처음으로 ‘마인드 강사’ 교육 시간을 가졌다. 한국에서 김재홍 강사와 박양수 강사가 직접 방문해 교육을 담당했다. 대상은 유럽의 선교사들 부부였다.
 “마인드 전문 강사 교육을 받으며 하나님이 유럽 선교를 새롭게 하시려는 것을 우리 모두 강하게 느꼈습니다. 풍요롭고 여유로우며 마음 꺾을 일 없이 살아가는 유럽인들에게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는 길, 그들의 마음을 열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은 것입니다. 마인드 강연은 하나님이 유럽 사람들을 위해 준비하신 것임을 짙게 느낍니다.”(오영신 선교사)
 겉은 강하지만 속에는 상처와 아픔을 지니고 있는 유럽인들. 선교사들은 마인드 교육으로 그들 마음에 다가가 상한 마음을 감싸주며 그들의 마음을 복음으로 채울 수 있는 길을 찾았다.
 “한국에서 오신 두 분의 목사님이 실제로 프랑스 파리, 독일 괴팅겐,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마인드 강연을 했습니다. 그 결과에 우리는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마인드 강연이 유럽 대학생들에게 너무나 잘 맞았습니다.”(오영신 선교사)
 4월에 프랑크푸르트에서 갖는 월드캠프와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 각 도시들에서 가질 마인드 강연…. 독일 교회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들을 들고 독일 사람들을 찾아간다. 마음에 소망을 품고 하나님이 열어 주신 길을 따라간다.
 “이제 독일은 더 이상 열악한 선교지가 아니라, 선교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어갈 새로운 곳임을 믿습니다. 독일 교회를 위해 전 세계 형제 자매님들의 기도와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하나님, 우리 독일을 긍휼히 여기시옵소서!”(오영신 선교사)
 고도의 물질문명을 누리며 더 완전한 삶을 추구하는 독일인들. 그리고 점점 커다랗게 비워져 가는 그들의 마음. 그 마음들이 앞으로 복음으로 채워질 일들이 얼마나 소망스러운지!

 
내 마음의 고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루드빅스하펜의 어느 자매의 인도로 1998년 11월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지만, 우울증 때문에 먹는 약 기운으로 인해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 후, 2000년에 폴란드 집회에 참석해 구원을 받았다. 우울증으로 결혼도 못 하고 살던 나를 교회에서 엘리자베스 자매와 맺어 주어 가정을 꾸밀 수 있었다. 결혼하고는 뒤셀도르프에서 아내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지난 2014년에는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눅 6:38)라는 말씀을 믿게 하신 일이 있었다. 당시 내 형편도 무척 어려웠지만 교회에 물질적으로 어려움이 있어서 우선 드려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가지고 있던 돈을 다 헌금했다. 그리고 얼마 후, 하나님께서 법을 바꾸셔서 나를 도우셨다. 그동안 은행에서 대출 받을 때 은행원이 일하는 비용을 고객이 부담했는데, 비용을 고객에게 모두 돌려주라고 법이 바뀐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헌금한 만큼 돌려주셨다. 교회는 내 마음의 고향이다.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 교회 안에 살아 일하심을 본다. 이런 참된 교회 안으로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마틴 형제)

 
하나님의 말씀 안에 나와 남편과 두 아이가 있음이…

부모님의 잦은 다툼으로 불안하게 살았고, 성장하면서 미래에 대한 꿈도 소망도 없이 내 마음은 혼돈하고 공허하고 어두웠다. 자신이 없었기에 결혼은 절대 하기 싫었는데, 친구 소개로 지금의 독일인 남편을 만났다. 착하고 순수해 보여,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으로 결혼했다.
독일이란 새로운 땅에서 희망을 가지고 결혼생활을 시작했지만, 언어•전혀 다른 사고방식•외국인에 대한 무시 등등에 부딪혔다. 내 기대와 너무나 다른 삶이었다. 게다가 몸이 약해져 자주 아프고 힘들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고, 죄의 짐이 무거워져 자포자기할 즈음 한국 친정에 갔다가 언니의 인도로 우리 교회를 만나 구원을 받았다. 의문•원망•미움들이 눈 녹듯 사르르 사라져버려 너무 신기했다.
남편과 아이들도 구원받았지만, 독일 사람인 남편과 자녀 교육관이 많이 달라 자주 부딪혔다. 문화 차이로 인한 단절감도 심했다. 그때마다 내 옳음에 빠지는데, 목사님이 내가 나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으로 이끌어 주셔서 지금까지 가정이 지켜질 수 있었다. 말씀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세계 안에 나와 남편과 두 아이 모두 속해 있음이 평안하고 감사하다. (신옥희 자매)

 
오영신 선교사 간증/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나를 이 땅에 보내셨다

2011년 2월 17일, 10년 간 선교했던 미국을 떠나 가족과 함께 독일로 왔다. 미국에서 독일로 선교지를 옮길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몹시 당황스러웠다. 그날 아침, 하나님께서 나에게 약속을 하나 주셨다.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던 바울을 하나님께서 막으시고 마게도냐로 옮기셨는데, 그 장면에서 하나님이 나 를 독일로 보내신다는 사실을 알았다. 마게도냐 땅을 복음으로 덮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사도 바울을 이끌었듯이, 독일을 복음으로 덮으시려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사도 바울이었기에 감옥의 사슬도 그를 묶을 수 없었고, 어떤 형편도 그를 절망케 할 수 없었다. 나 역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보냄을 받는 것이었기에 말할 수 없이 감사했다. 독일에서 어느덧 4년을 지냈다. 여러 가지 어려운 형편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이 심긴 내 마음을 요동케 할 수는 없었다. 
 1년 전 겨울, 독일의 사역자들과 함께 프랑크푸르트에서 무전전도여행을 했다. 선교사 부부들이 각기 독일인 교회들을 방문해 목회자를 만나 같이 식사도 하며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도 아내와 함께 교회들을 방문하며 보냈는데, 하루는 어느 여자 목사님을 만나 식사를 대접받고 밤늦도록 대화를 나누었다. 그날 나는 그 목사님에게서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 귀를 의심했다. 약 500년 전,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외친 말이 “성경으로 돌아가자”였다. 하지만 독일은 어느덧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리 떠난 탕자와 같은 나라가 되어 있었다. 외형은 부강한 선진국일지 모르나, 속은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처럼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나라가 된 것이다. 이 나라에 복음을 전하시려고 하나님은 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하나님의 뜻으로 보내심을 받았지만 막막할 때도 많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할 때도 많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런 나를 알고 순간순간 교회를 이끌어 주시는 것을 본다. 2015년에 들어서서 특별히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많은 소망을 주신다.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히 11:12)
 하나님이 올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다. 이 말씀에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은 꼭 나의 모습이요, 내가 선교하고 있는 독일 교회의 모습이다. 독일은 우리 선교회에서 가장 먼저 선교사를 파송한 곳으로 선교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독일 사람들을 얻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았다. 그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그들의 마음을 어떻게 복음 앞으로 이끌어야 하는지…. 나름대로 여러 해 동안 많은 시도를 해보았다. 월드캠프, 수양회, 대전도집회…. 하지만 독일 사람들의 냉담한 반응 앞에서 힘을 잃을 때가 많았다.
 그런 독일 사람들이 죽은 자와 방불한 우리를 통해서 많이 생육하겠다는 믿음이 생겼다. 얼마 전에 가졌던 마인드 강연 강사 교육은, 어떻게 유럽 사람들의 마음에 접근해야 할지 모르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새롭게 열어 주신 길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들을 아직 다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이 하신 말씀을 이루시고자 당신의 길을 우리 앞에 여실 줄 안다. 특별히 올해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실지 궁금하고,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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