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일하시는 세계에서 나는 쉬었다
주님이 일하시는 세계에서 나는 쉬었다
  • 송명수(기쁜소식남원교회)
  • 승인 2015.07.01 14: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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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54년 전남 여수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1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귀염둥이로 자랐다. 당시 우리 집은 동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유지 집안이었다. 내가 4살 때쯤 엄마가 동생을 낳다가 돌아가셨고, 동생도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 품으로 갔다. 얼마 후 우리 집에 새어머니가 오셨는데, 그때부터 집안 분위기가 바뀌었다. 새어머니는 자주 굿을 하시며 무당에게 큰돈을 갖다 주셨다. 어느 때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누나들은 돈을 번다는 핑계로 자연스럽게 타지 생활을 했다. 나도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객지로 나왔다. 순천으로 서울로 이리저리 다니며 닥치는 대로 기술을 배우고 돈을 벌었다. 자동차 시트 기술도 익히고, 꽃장사도 하고, 천막장사도 해보았다. 하는 일마다 다 실패했다. 여러 도시를 다니다 대전까지 갔고, 거기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친구가 여자를 소개해 준다고 해서 나갔는데, 소개해 준다는 여자보다 옆에 따라 나왔던 아내에게 반했다. 얼마간 사귀다가 결혼하겠다고 하자 장모님은 아무것도 없는 사람한테 귀한 딸을 줄 수 없다며 심하게 반대했다. 다행히 처남이 장모님을 설득해 어려운 형편에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무당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둘이 힘을 합해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상호명을 ‘삼성카바’로 걸고 자동차 시트 커버 가게를 했다. 밤낮 없이 일하니 돈이 잘 벌렸다. 큰딸이 태어나고부터는 돈을 긁어모은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사업이 잘 됐다. 당시 내 나이는 서른, 아내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젊은 나이에 돈을 많이 만져 겁이 없었다. 아이들도 최고급으로 먹이고 입혔다. 최고로 비싼 불교 유치원에 보냈다. 가보고 싶은 데는 다 놀러 다니고 하고 싶은 것은 다 했다. 돈을 많이 번다는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아내는 계모임에 자주 나갔고, 집도 사고 땅도 샀다. 부러울 게 없었다.
 당시 우리는 절에 열심히 다녔다. 장사가 안 된다 싶으면 굿을 하고 점을 보았다. 집안을 온통 부적으로 도배하다시피 했다. 베게, 지갑, 옷 주머니 속 등등 부적이 없는 곳이 없었다. 주말이면 단골 무당을 찾아갔다. 무당은 나에게 ‘사주팔자가 너무 좋아서 마흔이 되면 손에 물도 안 묻히고 산다.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굿을 할 때 보통 돼지머리를 놓고 하는데 우리는 소머리를 놓고 큰굿을 했다. 굿을 하면 진짜 귀신이 왔다. 먼저 5대 할아버지가 오고, 증조할아버지,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왔다. 무당이 술을 한 잔 먹고 춤을 추는 게 우리 아버지 모습과 똑같아서 그걸 믿고 무당을 섬겼다. 가게에 있으면 하나님을 믿으라고 전도하는 사람들이 한 번씩 왔다. 그런데 전도하는 사람들이 왔다 가면 소금을 뿌릴 정도로 정말 싫어했다. 성경을 보면 기분이 나빴고, 하나님의 ‘하’자도 듣기 싫었다.

빚쟁이에게 쫓겨 남원으로 가다
절대 흔들릴 것 같지 않았던 형편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사기를 당하고 아내도 계모임에서 돈을 잃었다. 돈을 빌려 간 사람도 잠적하고, 내가 보증을 서 준 사람도 도망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장사도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한순간에 큰돈들이 빠져나가 순식간에 빚더미에 앉았다. 다 망해서 무당을 찾아가니 ‘당신은 호랑이 꼬리를 잡고 있으니까 꼭 잡고 있어라. 그걸 놓으면 죽는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내가 그때까지 그런 걸 믿고 있었다는 것이 너무 허탈했다.
 밤낮없이 찾아오는 빚쟁이들과 살 길이 없는 형편에 밀려 몰래 남원으로 이사를 갔다. 그때 내 나이가 마흔이었다. 무당의 말대로라면 손에 물도 안 묻혀야 하는 나이에 쫄딱 망해서 네 식구가 50만 원을 가지고 도망친 것이다. 그때부터 택시운전도 하고, 붕어빵 장사도 하고, 과자 장사도 하고, 작은 식당도 하며 열심히 일해 빚을 갚아나갔다. 하지만 한 번 어려워진 형편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 빚쟁이에게 하도 시달려 아내 혼자 다른 도시로 가서 몇 달을 숨어 지내기도 했다.
 한번은 아내에게 내가 이혼해 줄 테니 새로운 삶을 살라고 이야기했다. 아내는 아이들을 두고 절대 갈 수 없다며 정색했다. 아이들이 걱정할까봐 절대 아이들 앞에서는 큰 소리를 내지 않았고, 싸울 일이 있으면 “엄마 아빠 드라이브 하고 올게” 하고 나가서 차 안에서 싸웠다.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엄마 아빠는 안 싸우고 화목하게 지낸다고 철석같이 믿을 정도였다.

죄는 생수의 근원인 하나님을 떠난 것
삶이 너무 어렵고 힘든 형편에서 벗어날 길이 없자 전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다. 예전의 나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길이 없으니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찾았다. 장로교회를 다니다가 복음을 전하는 교회에 나갔다. 예수님의 피로 내 죄가 전부 사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 인생의 짐이 다 덜어져 너무 기뻤다. 진리를 만난 것이 기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보려고 열심히 살았다. 5~6년 동안 교회 차도 운전하고, 봉사도 하며 열심히 지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마음이 곤고하고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형편도 풀리지 않았다. 집안에 빨간 차압 딱지가 붙는 게 놀랍지도 않았다.
 한 날은 나보다 한참 어린 젊은 사람들이 찾아와 아이들 앞에서 나에게 반말을 하며 모욕을 주었다. 밖으로 나가 수습하고 들어오니 딸이 우리 집은 왜 이 모양이냐고 울면서 소리를 지르고 나가버렸다. 마음이 점점 답답해졌다. 죄는 사함 받았고, 천국에 가는 것은 믿었지만, 살아갈 힘은 없었다.
 2000년에 아들 태진이가 기쁜소식선교회 수양회에 가봐야겠다고 했다. 길을 가다가 전도를 받았는데, 전도하는 사람과 서로 변론이 돼서 자기가 직접 한번 알아보러 간다는 것이었다. 아들은 수양회에 갔다 오더니 자기가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면서 다음 차수에 다시 간다고 했다. 그럼 나도 같이 가보자고 하여 아들과 함께 수양회에 참석했다. 수양회 기간에 전주평강교회에 계셨던 정근욱 목사님과 상담을 했다. 나는 ‘예수님이 내 죄를 이미 다 사해 놓으셨다는 것만 믿고 있었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죄에 대한 개념 자체도 달랐다. 내가 그동안 배웠던 죄는 로마서 1장 29절부터 나와 있는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비방, 능욕과 같은 것들이었다. 당연히 행위로 나타난 죄를 죄라고 여겼고,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어서 우리는 그런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알았다. 그리고 그 죄를 예수님이 다 씻으셨다고 믿었다. 그런데 수양회에서는 ‘하나님을 떠난 것’ 자체가 죄라고 했다. 생수의 근원을 떠나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았기 때문에 곤고하고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고 나니, 하나님이 내 주인이 되었다. 그 길로 전에 다니던 교회를 정리하고 남원은혜교회(현 기쁜소식남원교회)로 옮겼다.
 지금도 고마운 분이 계신데, 바로 아들을 이끌어 준 우리 교회 정송헌 집사다. 당시 정송헌 형제는 길에서 만난 아들에게 끈질기게 전도했다. 태진이가 수업을 마칠 때쯤 교문 앞에서 기다렸다 만나고, 그만 찾아오라는 말에도 아랑곳 않고 계속 찾아왔고, 집으로 전화도 했다. 요즘에는 그렇게 열정적으로 전도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그때는 그랬다. 그 덕에 태진이가 수양회에 가고, 나와 아내도 모두 교회를 옮겼다. 고집이 유난히 센 딸은 2년 정도 지나 아들의 전도로 함께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이런 집에 누가 살고 있을까?”
기쁜소식남원교회에 다니면서부터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 전에는 죄 사함을 받았으니 내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보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그런데 신앙은 주님이 일하시는 세계이며, 나는 그 안에 쉬는 것이었다. 마음에서 짐을 내려놓고 쉴 수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하나님은 내게 필요한 것을 그때그때 주시고, 사람들을 통해 은혜 입히기도 하시며 내 삶을 풍요롭게 하셨다. 하던 장사를 모두 그만두고 일용직 일을 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던 중, 하루는 아내가 나에게 회사에 들어가면 좋겠다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정년퇴직할 나이에 회사에 들어간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루는 한 방직공장에서 정원을 관리할 사람을 구한다고 내게 연락이 왔다. 아내는 하나님이 응답해주신 거라면서 적극적으로 나를 밀었다. 회사에 들어가니 근무 조건이 참 좋았다. 회사 안에 있는 정원을 가꾸는 일이어서 고되지도 않고, 공휴일에 쉴 수도 있었다. 일하다 남는 시간에는 휴게실에서 자유롭게 책과 성경을 보고 설교 말씀도 들었다. 그때 성경을 참 많이 보았다.
 당시 우리는 영세민 아파트에 살았는데, 아이들이 자라면서 자격이 상실되어 이사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당장 갈 곳이 없어서 고민하다 회사에 이야기했는데, 사원주택에 빈 곳이 있다며 관리비만 내고 무료로 쓰라고 했다. 더욱 신기했던 것은, 평소 그 앞을 지나다닐 때면 아내가 항상 “이런 집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공기도 좋고, 나무도 있어 참 좋겠다”하고 말하던 바로 그 집이었다. 가족들이 다 모이면 같이 지낼 수 있는 넓은 집이 필요했는데, 방도 세 개나 되는 공간이 넉넉한 집이었다. 나중에 그 집에서 딸이 산후 조리도 하고 명절 때 손주들이 와서 뛰어 노는 걸 보면서 ‘좁은 영세민 아파트에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영세민 자격이 상실되는 시기에 딱 맞춰서 하나님이 집도 주셔서 무척 감사했다.
 자동차가 필요했을 때에도 그랬다. 타고 다니던 아주 낡은 승합차를 폐차장에서 100만 원에 사겠다고 했는데, 교회 형제님이 생활정보지에 광고를 내보라고 했다. 그대로 하자 170만 원에 팔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같은 사원아파트에 사는 분이 자기 아내가 타던 차를 아주 싼 값에 주었다.
 매 순간 하나님의 도움을 입으며 사니 주변 사람들도 우리를 부러워 한다. 아내는 만두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언니는 집에 돈도 많으면서 왜 여기 와서 일하냐?’고 묻는다고 한다. 가진 것이 없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안 믿는다며 웃는다. 우리는 가진 것이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 가정을 부족함 없이 하나하나 세밀하게 이끌어 주셨다.
 가장 감사한 것은 자녀들을 이끄신 부분이다. 일용직 일을 하면서 아이 둘을 대학에 보내기 아주 어려웠지만 교회의 인도로 딸은 전북대학교 미대를 졸업하고, 아들도 전북대학교를 졸업했다. 딸은 단기선교사로 일본에 갔다 왔고, 아들은 부룬디에 갔다 왔다. 특히 딸은 아주 활동적인 아이여서 우리 부부로서는 도저히 잡아줄 수 없었는데, 대학에 들어간 후 IYF에서 활동하면서부터 삶이 잡혔다는 것에 대해 추호도 의심이 없다. 딸은 전도자와 결혼해 지금 기쁜소식철원교회에서 복음을 섬기고 있다.
 아들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벽에 세계지도를 붙여놓고 이 나라 저 나라를 체크하며 세계 일주를 꿈꾸던 아이였다. 지금은 기쁜소식선교회 산하기관인 영상선교부에서 카메라를 들고 전 세계를 누비며 복음을 섬기고 있다. 둘 다 결혼도 교회 안에서 인도 받아 제 때에 차례차례 해 내 인생의 큰 짐들이 지나갔다. 각기 흩어져서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었던 우리 가족을 하나님은 날개로 감싸듯 지켜주셨다.

주님 오실 그날까지 복음을 전하며
박옥수 목사님이 주님께 삶을 맡기면 복되다고 하셔서 나도 그 마음을 가졌는데, 하나님이 나와 내 아내의 건강을 지켜주시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감사하다. 나에게 오래 전부터 알레르기 비염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심할 때는 평균 십여 차례 재채기를 하고 주체할 수 없이 콧물이 흘러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 박 목사님이 하신 ‘아프지만 나았다’는 간증을 들으며 비염도 하나님께 맡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재채기가 나오지만 ‘이거 아무 문제 아니야’ 라는 마음으로 지냈다. 그렇게 지내다 한 날은 보니 심하던 재채기가 사라졌다. 아내도 허리가 몹시 아프다고 해서 내가 기도했는데, 다음날 통증이 다 사라졌다고 했다. 위염으로 고생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이 아내와 나의 건강을 지키시는 것을 생각할 때 감사할 뿐이다.
 또한, 복음을 위해 일하는 자식들을 하나님이 도우시는 것을 보았다. 아내가 공장에 다니기 때문에 휴가 받는 것이 쉽지 않은데, 딸이 세 아이를 출산할 때마다 회사에서 한 달씩 휴가를 주어 감사했다. 지난 5월에 있었던 서울 성경세미나 기간에도 아내가 1주일 정도 손녀들을 봐주러 가야 해서 공장에 이야기하자 그동안 휴가를 많이 줘서 더 이상 안 된다고 했다. 아내는 “놀러가기 위해 휴가를 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딸이 제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엄마로서 어떻게 못 간다고 할 수 있냐?”고 말하자 휴가를 내주었다.
 최근에는 설교 말씀을 들을 때마다 자식들이 복음을 섬기는데 나는 형편에 젖어 살고 있는 게 악하다는 마음이 자꾸 들었다. 그래서 일이 없는 날에는 차에 신앙서적과 주간 <기쁜소식>과 월간 <기쁜소식> 등을 가지고 남원의 유명한 공원 입구에 나가 전도한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서 전도하려니 처음에는 부담스럽고 부끄러웠다. 가판을 펼쳤다가도 금방 접기를 몇 번 했다.
 하지만 하나님을 찾고 있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마음이 들고, 많은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더라도 정말 하나님을 찾는 그 사람에게 통로가 되고 싶은 생각에 자존심, 부끄러움을 내려놓았다. 하나님은 내 예상과 다르게 일하셨다. 가판대에 앉아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말을 걸어 관심을 보였다. 수고한다며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찾고 있었다는 듯이 다가와 책을 잡고 망설임 없이 사가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복음은 내 모습과 상관없이 나를 사람들 앞에 할 말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지금은 토요일마다 공원 입구에서 전도한다.
 경제가 어렵다 보니 오래된 우리 회사가 문을 닫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퇴직금이 나오고 고용보험에서도 돈이 나와 목돈이 생겼다. 교회에 헌금도 하고 남은 빚들을 갚아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짐들을 다 덜었다. 회사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생기지 않았을 돈으로, 정말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이제는 주님이 주실 새로운 집을 다시 기다리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우리에게 딱 맞는 시기에 딱 맞는 집을 주시리라는 것에 한 치의 의심도 없다.
 이제 주님 오실 그날까지 온 가족이 하나님을 섬기며 기쁨으로 살 일만 남았다. 하나님이 나의 미래를 다 준비해 주시겠다는 믿음이 있어서 앞으로는 복음을 전하며 살고 싶다. 나는 원래 하나님을 욕하고 싫어하며 귀신을 섬겼던 사람인데, 우리 가정에 한없이 큰 은혜를 베풀어주신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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