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고 즐거웠던 날들!
재미있고 즐거웠던 날들!
  • 글 박민희 편집장
  • 승인 2015.07.01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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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성도를 찾아서_김남주 장로 가족(기쁜소식남해교회)

 
참된 신앙생활을 하려고 마음을 다 쓰다 하나님의 은혜로 만난 복음! 구원이 너무 커서 핍박을 받는 것도, 복음을 위해 삶을 드리며 사는 것도 즐거웠다는김남주 장로 가족. 그들을 만나 보았다.

“됐습니다. 저도 죄가 없습니다!”
1980년 경남 남해에 남해중앙교회(현 기쁜소식남해교회)가 세워진다. 최금문 남해여객 사장이 독일에서 간호원으로 일했던 딸의 간곡한 부탁으로 박옥수 목사가 인도한 여름 수양회에 참석해 구원받은 후 자신이 소유한 건물의 4층을 예배당으로 내놓은 것이다. 그 뒤 1981년 초에 선교학교에서 훈련받던 주종식 전도사가 남해에 파송된다.
 1981년 봄, 남해에서 가장 큰 남해읍교회에 좋지 않은 일이 생겨 아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교회에서 나와, 당시 남해읍교회의 장로였던 김남주 장로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나온 사람들 가운데 학생들과 몇 사람은 다시 남해읍교회로 돌아가고, 두 가족은 계속 남아 교회를 개척하기로 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인 김점숙 자매의 이야기다.
 “김남주 장로님 부부와 두 아들과 딸, 남해읍교회 권사였던 공차순 모친과 두 아들, 그리고 제가 함께 예배를 드렸어요. 저는 김 장로님의 큰아들과 결혼할 사이였어요. 우리는 다 하나님만 섬기자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했어요. 철야기도•산상기도는 일상이고, 철원에 있는 기도원까지 가서 기도했어요. 남해읍교회에서 나온 후로도 새벽 기도회, 수요 예배, 구역 예배, 주일 예배를 다 장로님 댁에서 드리고, 헌금도 모았어요. 그 돈으로 교회를 세우려고요. 저는 꽃집을 하고 있었는데, 읍교회에서 열심 있던 사람들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통일교, 여호와의 증인 등 여러 교단에서 전도하러 찾아왔어요. 다 들어보았는데, 참된 신앙이 아니었어요.”
 하루는 어느 아가씨가 꽃집에 찾아와 신앙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남해중앙교회에서 최금문 사장 다음으로 구원받은, 남해여객에서 근무하던 이훈자 자매였다. 청년 김점숙은 이훈자 자매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내가 여러 교파 사람들을 만나 보았는데 다 참된 믿음이 아니었다. 아가씨가 말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라면 들어보겠다’고 했다. 이훈자 자매는 며칠 후 꽃집에 들러 ‘우리 예배당에 꽃꽂이를 해달라’고 부탁했고, 김점숙은 꽃을 들고 따라나섰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니 4층에 교회가 있었어요. 전도사님과 세 자매님이 성경을 읽고 있었는데, 제 눈에는 천사 같았어요. 나중에 알았지만, 세 분은 선교학교에서 훈련받고 전도사님을 도우러 함께 온 자매님들이었어요. 전도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교회에 열심히 다녀도 마음에 죄가 있으면 천국에 못 간다는 이야기를 난생처음 들었어요.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했는데…’ 그런데 전도사님이 ‘황무지가 장미꽃같이 피는 것을 볼 때에’ 찬송을 부르며 ‘거기 죄인 전혀 없으니’라는 구절을 부를 때 거기서 딱 막혔어요. 자주 부르던 찬송이었는데, 그냥 불렀던 거지요. 전도사님이 성경을 여기저기 펴가며 예수님의 뜻을 이야기했어요. 분명히 성경 이야기인데, 그때까지 제가 배웠던 것과 전혀 달랐지요. 저는 학생 때부터 방언•예언을 해서 권사감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만큼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내 신앙이 잘못되었던 거예요. ‘그럼 우리가 다 지옥에 간단 말인가?’ 맞는 말인데도 마음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주종식 전도사는 김점숙에게 “내일 더 이야기하게 다시 오세요”라고 했지만 김점숙은 ‘여기에 다시는 안 온다!’ 하고 예배당 문을 나섰다. 그가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는데, 예배당에서 기도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님, 저 아가씨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구원해 주십시오!” 1층으로 내려갈 때까지 기도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나중에 구원받은 후 교회를 다니면서 아무리 들어보려고 해도 예배당에서 하는 소리가 1, 2층 계단에서는 들리지 않았어요. 찬송을 부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그날은 하나님이 들리게 하셨다는 마음이 들어요.”
 자신을 위해 마음 들여 기도하는 소리를 들으며 김점숙의 마음이 열렸다.
 ‘내가 대들었는데도 처음 본 나를 위해 저렇게 기도하다니, 이 교회가 참된 교회구나!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교회구나!’
 김점숙은 바로 예비 시댁인 김남주 장로 집으로 찾아갔다. 꽃꽂이하러 낮에 교회에 갔는데 벌써 캄캄한 밤이었다.
 “시댁에 가서 어른들이 주무시는 것을 깨워 말씀드렸어요. ‘오늘 이런 교회에 가서 이야기를 들었는데, 예수님이 우리 죄를 씻었으니 우리가 죄가 없는 게 맞지 않나요? 그런데 우리는 늘 죄가 있다고 사해 달라고 하잖아요.’ 전도사님에게 들은 이야기를 했어요. 기도 소리를 들었던 이야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두 분이 ‘그러면 내일 다시 가봐라’ 하셨어요.”
 다음날, 김점숙은 꽃집 문을 일찍 닫고 남해중앙교회를 찾아갔다. 주종식 전도사가 “오실 줄 알았습니다” 하며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날 김점숙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를 영원히 속하신 복음을 듣는다. ‘다시는 죄를 위해 제사 드릴 것이 없다’는 히브리서 말씀을 들으면서 김점숙은 무릎을 치며 “됐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잘못 믿었습니다. 저도 죄가 없습니다!” 하였다. 1981년 7월 말이었다.

“말씀은 맞는데, 교회가 이상하다….”
김점숙 자매가 운영하던 꽃집은 수협 앞에 있었는데, 주종식 전도사는 거의 매일 오전에 그 꽃집에서 지냈다. 김 자매가 전에 다녔던 교회 사람들을 보고 불러들이면 주 전도사가 복음을 전했다. 그렇게 하여 학생들이 여러 명 구원받았다. 김 자매는 꽃집 일을 마치면 교회에 가서 주 전도사와 신앙 교제를 나누고 전도한 학생들과 함께 피아노도 치며 즐겁게 보냈다.
 하루는 김 자매가 시어른이 될 분들에게 자신이 구원받은 이야기를 하며 다 같이 가서 말씀을 듣자고 했다.
 “장로님 가족과 공차순 모친과 함께 남해중앙교회를 찾아갔어요. 콜라를 사가지고 갔는데, 전도사님과 세 자매님이 기도를 하지 않고 콜라를 마시는 거예요. 그때 우리는 찬물만 주어도 기도하고 마셨거든요. 예배당에는 빨간 방석이 놓여 있고…. 전도사님이 복음을 전했지만 같이 갔던 분들 마음이 막혀서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복음을 다 듣고 예배당에서 나온 사람들이 같은 마음을 표현했다.
 “말씀은 맞는데, 교회가 이상하다…. 이단 같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김점숙 자매 마음에도 그런 것 같다는 마음이 들어 이후로는 교회와 거리를 두었다. 주종식 전도사가 꽃집에 찾아오는 것도 꺼렸다.
 “성경을 읽으면 의인이 맞고, 교회는 이단 같고…. 풀리지 않는 숙제였어요.”

 
“남해에 와서 집회를 해 주세요.”
1981년 12월 어느 주일 오후, 최금문 사장이 주종식 전도사와 함께 김남주 장로 집을 찾아간다. 최금문 사장은 오랫동안 유교를 신봉하다가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사람으로, 김남주 장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로님, 저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 잘 모릅니다. 이번에 대구에서 겨울 수양회를 하는데, 장로님이 저보다 성경을 훨씬 많이 아니 가서 들어보십시오. 그래서 맞으면 따로 교회를 세우지 말고 제가 교회를 세워 놓았으니 우리가 합해서 예배를 드립시다. 만약 안 맞으면 저를 거기에서 빼내 주십시오. 저도 장로님이 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차비는 제가 드리겠으니 다녀오십시오.”
 겨울 수양회에 참석할 사람을 뽑아, 김남주 장로 부부와 공차순 권사가 가기로 했다. 김 장로의 아내인 김덕심 자매님의 말이다.
 “수양회에서 박옥수 목사님이 다윗의 생애에 대해 말씀하셨어요. 전에 듣지 못한 말씀이었어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들을 수 있는 말씀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때 우리에게 바쁜 일이 있어서 수양회를 다 참석하지 못하고 중간에 와야 했어요. 그래서 박 목사님께 남해에 와서 집회를 해 달라고 부탁드렸지요.”
 수양회를 마치고 박옥수 목사는 곧 남해를 방문해 전도집회를 가졌다. 그 집회에서 여러 사람이 구원받아 교회에 더해졌다. 김남주•김덕심 부부, 그 자녀인 김종문•김종은•김경숙, 남해읍교회 권사였던 공차순과 두 아들 박주평•박봉룡, 그 외에 몇 사람이 더 교회에 더해졌다. 그들 가운데 나중에 세 사람이 복음 전도자가 되었는데, 김종은 목사(기쁜소식대덕교회), 박주평 선교사(미국 타코마), 박봉룡 선교사(체코 프라하)가 그들이다.

구원이 얼마나 큰지 그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구원받고 어떻게 지냈는지 김덕심 자매님에게 물었다.
 “핍박을 굉장히 심하게 받았어요. 시아버님도 장로, 자녀인 8남매도 대부분 장로와 권사인 기독교 집안 사람인 남편이 이상한 교회에 나간다며 배척과 비난을 많이 받았지요. 남해가 좁은 곳이잖아요. 그런데 당시 박옥수 목사님이 설교 말씀 중에 ‘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하셨는데, 그 말씀이 제 마음에 크게 와 닿았어요. 저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고 순복음교회만 빼고 안 가본 교회가 없었어요. 그렇게 살다가 구원을 받고 보니, 구원이 얼마나 큰지 그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핍박을 받으면서 하늘의 상급이라고 생각해, 욕을 먹으면 힘이 났어요. 그때 우리는 참 재미있고 즐겁게 살았어요.”
 구원받고 특별히 마음에 남는 감사한 일이 있는지 자매님에게 물었다.
 “우리가 구원받고 얼마 안 되어 시아버님이 82세에 구원을 받으셨어요. 어느 주일에 아버님이 편찮으셨는데, 곧 돌아가실까봐 예배를 마치고 전도사님에게 점심 먹을 틈도 주지 않고 전도사님을 모시고 아버님께 갔어요. 그날 아버님이 영원한 속죄를 받으셨어요. 82세의 할아버지인데도 구원의 선이 분명했어요. 그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시아버님이 구원받고 남편 여동생인 시누가 구원받았어요. 그분 아들이 지금 캄보디아에서 선교하는 하철 목사예요. 하 목사가 저를 보고 ‘숙모가 우리 엄마를 이단에 빠뜨렸다’며 엄마를 이단에서 빼내겠다고 우리 교회에 왔다가 구원을 받았어요. 이어서 막내 시동생이 구원받았고요. 시동생은 지금도 기쁜소식남해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요.
 시아버님은 구원받고 복되게 사시다가 93세에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면서 말씀하시길 ‘내 몸에 죄인은 절대 손을 대지 마라. 나는 의인이다’ 하셨어요. 자녀들이 다 장로와 권사지만 아무도 손대지 못하고, 박옥수 목사님이 오셔서 장례를 주관해 주셨어요.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1983년과 1984년에 남해중앙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난다. 남해여중에서 국어를 가르치던 이해옥 교사가 구원받은 후, 그가 가르치던 반 학생들 20여 명이 남해중앙교회에 나오는 일도 있었다. 그 가운데 10여 명은 핍박을 받아가며 주님을 섬겼다. 당시에는 부모들이 교회에 가지 말라고 때리기도 하고 여학생인 딸의 머리를 자르기도 했는데, 어린 학생들의 마음에도 복음이 소중했기에 고난을 이기고 교회와 함께했다. 당시 여중생이었던 자매들이 지금은 결혼해 다른 곳에서 살기도 하고, 서너 명은 지금도 남해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다. 김점숙 자매의 이야기다.
 “그때 50명 가량의 형제 자매들이 아무것도 모르지만 마음을 다해 기도하고 전도하며 살았어요. 전국에 교회가 많지 않을 때여서인지 박옥수 목사님이 선교학생들과 함께 남해에 자주 오셨고요. 시어머님이 농사를 지으셨으니까, 밥을 지어 농사한 채소와 함께 상을 차려 주면 선교학생들이 정말 잘 먹었어요. 그런 모습을 보는 것도 우리에게는 즐거움이었지요.”

 
“너에게 주기로 한 논 600평을 팔아서 꼭 쓰고 싶은 데가 있다.”
구원받고 무슨 일을 했는지 김덕심 자매님에게 물었다.
 “구원받기 전부터 농사를 크게 했어요. 마늘 농사, 벼농사…. 셋째 아들인 김종은 목사가 목회자가 되기 전에 함께 일했는데,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아들이 여물어요. 사는 것이 재미있었어요.”
어려움은 없었는지 물었다.
 “1993년 1월에 남편이 우리 선교회에서 장로 안수를 받았어요. 당시 전국 교회에서 다섯 분이 처음으로 장로 안수를 받았는데, 감당할 수 없는 축복이었지요. 그런데 그 해 여름에 큰 홍수를 만나 농사지은 것을 다 잃었어요. 우리는 정말 성실하게 살았는데, 하나님이 우리 성실을 무너뜨리셨어요. 장로님이 그 일 앞에서 ‘여호와께서 잠잠히 기다리라고 하셨다’고 말씀하셨어요. 기가 막혔지만 말씀이 우리를 붙들었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에 좋은 것으로 받았어요.”
 1994년 설날 아침, 눈이 별로 오지 않는 남해에 아주 많은 눈이 내렸다. 그 눈에 김남주 장로님의 비닐하우스가 주저앉았다. 그 안에는 홍수 후 정성 들여 키운 채소들이 수확을 앞두고 있었다. 함께 농사일을 했던 막내아들 김종은 목사의 이야기다.
 “아버지가 ‘하나님이 안 도우신다. 우리가 게으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안 도우시니 이 삶을 정리하자’ 하셨어요. 농사를 그만둔다는 것이 저는 싫었지만 아버지가 워낙 분명하게 말씀하셨어요. 평생 해오시던 일인데….”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와 아들은 이런 대화를 나눈다.
 “종은아,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
 “무슨 일인데요?”
 “너에게 주기로 한 논 600평, 그걸 팔아서 꼭 쓰고 싶은 데가 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아버지가 꼭 하시고 싶은 거면 하셔야 안 되겠습니까?”
 아들이 웃으며 “뭘 하시려는 건데요?” 하고 묻자 아버지는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라고 대답했다. 김종은 목사의 이야기다.
 “지금도 그 값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당시에 땅 일부를 1억 원이 넘게 팔았어요. 그 가운데 1억 원을 아버지가 선교비로 드리셨어요.”
그 일에 대한 김덕심 자매님의 이야기다.
 “그 전부터 장로님과 둘이 자주 기도했어요. 그 일 있기 전에 중국 선교가 시작되었는데,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 펼쳐지는 것이 감사해서 제가 기도하던 중에 우리가 1억 원을 선교비로 드리고 싶다고 했어요. 장로님이 ‘기도하면서 일어난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니 함께 기도해 보세’ 하셨는데, 습답이라 팔리기 쉽지 않던 논이 팔렸어요. 하나님이 길을 여신 거예요. 그래서 그냥 드렸어요. 박옥수 목사님이 그 돈을 소중히 간직하고 계시다가, 여름 수양회 장소로 쓰였던 자라목솔밭을 사는 데 쓰셨어요. 정말 감사한 일이지요. 그 후로 우리는 더 행복하게 살았어요.”
 김남주 장로님은 선교비를 드린 것에 그치지 않고 삶의 방향도 바꾸었다. 김종은 목사의 이야기다.
 “아버지가 해외 전도여행을 가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해외에서 선교사님들이 어떻게 수고하며 선교하는지 보고 싶다고요. 기회가 되는 대로 여러 나라에 가셨어요. 제가 보기에 아버지는 참 성실하게 사셨던 분이에요. 결단력이 있는 분은 아닌데, 하나님 앞에서는 당신의 길을 분명하게 정하시는 것을 보았어요. 제가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싶었는데, 제가 모신 것보다 지금까지 훨씬 건강하고 복되게 사셨지요.”

 
“목사님과 마음을 같이하여 제가 있는 곳에서…”
주님 앞에서 소망하는 것이 있다면, 아직 구원받지 못한 큰딸과 둘째 아들이 구원받는 것이 첫째 소망이며, 손자들 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이 일어나는 게 둘째 소망이라는 김덕심 자매님. 자매님은 아직도 농사일을 조금씩 하며 산다고 한다. “장로님과 먹고 지내며 교회에 일이 있을 때 빠지지 않고 헌금할 만큼 하나님이 살게 해주셔요. 지금은 교회에서 은혜를 많이 입으며 살아요. 형제 자매들의 섬김도 받고, 우리 교회 목사님의 섬김도 받고요.”
 김남주 장로님은 나이가 어느덧 아흔이 되었다. 아직도 예배에 참석하고, 대표 기도도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전 일들을 기억해 기자와 대화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아내인 김덕심 자매님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교회를 따르는 마음으로 살았다는 김남주 장로님.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표현했다.
 “복음만을 위해 사신 박옥수 목사님. 저는 목사님처럼 살지 못하지만 목사님과 마음을 같이하여 제가 있는 곳에서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뒷받침하고 싶었어요.”

감사, 기쁨, 즐거움, 소망, 행복, 희생….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맡을 수 있는 향기들이다. 김남주 장로님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 향기를 맡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살았던 앞서 간 성도들이 있었기에 이후에 구원받은 성도들이 주님 안에서 큰 복을 누릴 수 있었다. 앞서 간 성도들의 아름다운 발자취가 우리 마음에 더욱 아름답게 다가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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