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 받은 자에서 축복 받은 자로
저주 받은 자에서 축복 받은 자로
  • 조용갑(기쁜소식강북교회)
  • 승인 2016.01.28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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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간 장로교회에서 목회하면서도 구원의 문제가 풀리지 않아 고뇌하며 자신을 저주했던 조용갑 목사. 주님의 크신 은혜로 죄 사함의 놀라운 복음을 깨닫고 이제 기쁜소식선교회에 속해 믿음의 삶을 배우는 것이 기쁘고 행복하다.

나는 경북 문경의 가장 가난한 동네에서도 가장 가난한 집에서 자랐다. 농사지을 땅이 없어 아버지는 5일장을 돌며 장사하셨다. 나는 여섯 살 무렵부터 왼쪽 다리가 아파 어머니를 따라 자주 한약방에 가 침을 맞곤 했다. 나중에 형이 말하길 내 다리가 아픈 것은 형이 업고 다니다 떨어뜨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다리 때문에 늘 열등감에 젖어 살았다.
 두 번째 동생이 네 살 때 병으로 갑자기 죽었다. 어머니는 어린 딸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어느 날 귀신이 들리셨다. 귀신을 쫓기 위해 굿을 아주 많이 했다. 초등학교 때 집에서 굿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을 정도였다. 가난한 집에서 굿까지 해 집안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고, 나는 초등학교는 졸업했지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주 예수 주신 평안함 내게는 없도다
열아홉 살이 되던 1969년, 서울에 올라왔다. 학벌도 능력도 없어 식당, 공장, 다방, 경찰서 등에서 일하며 중학교 검정고시를 보았다. 1973년경 부모님도 작은아버지가 사시던 광명으로 이사 오셔서 나도 가족과 같이 살 수 있었다. 어머니는 숱하게 굿을 했지만 여전히 귀신이 들려 계셨다. 어머니를 보신 작은어머니가 교회에 가면 고칠 수 있다고 전도하셔서 어머니가 교회에 나가셨고, 나도 마지못해 따라 나갔다.
 2~3년 교회에 다녔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나 구원받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사람들이 방언하고 불을 받는 것을 보며 그것이 신앙인 줄 알았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방언하고 싶어 여러 번 기도원에 가서 열심히 기도하고 부흥회에도 많이 참석했다. 그러나 나는 방언을 전혀 하지 못했다. 배운 것도 없고, 다리도 건강하지 못하고, 교회에 다녀도 신앙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언제부턴가 머리까지 몹시 아프기 시작하면서 나 자신을 보면 너무 답답하기만 했다.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내 심정을 찬송가 466장 <나 어느 곳에 있든지>의 가사에 실어 자주 불렀다.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속이 뒤집혀. 주 예수 주신 평안함 내게는 없도다. 나의 마음속이 늘 뒤집혀. 나의 마음속이 늘 뒤집혀. 악한 죄 파도가 많아서 마음은 늘 뒤집혀.” 찬송을 부르면 목사님과 청년들은 깔깔거리며 웃기만 했다. 이런 노래를 할 수밖에 없는 마음을 이해해 주거나 풀어 주지는 못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어머니가 교회에 다니셔도 귀신은 떠나지 않았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주의 종이 되면 귀신이 떠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가 신학교에 가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겠구나’ 생각해,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보고 1979년에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런데 신학교는 믿음이나 신앙을 가르쳐주는 곳이 아닌 ‘신학’이라는 학문을 가르치는 곳이었다. 신학교에 다녀도 머리가 아프고 마음이 답답했다. 신학생들 사이에 “믿음이 충만한 집사나 장로가 신학교에 가도 나올 땐 평신도가 되어 나온다”라는 말이 있었다. ‘믿음도 없는 나는 더 기대할 것도 없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싶었지만 머리가 너무 아파서 할 수도 없었다.
 신학교에서도 소망이 보이지 않아 늘 죽고 싶은 마음이었다. 1학년 1학기를 마치고는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죽을까 고민하다가 수면제를 샀다. 막상 죽을 결심을 하자 아버지가 생각났다. 아버지는 무척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평생 고생만 하신 분이셨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 재혼하셨다. 어머니는 한국전쟁 때 남편을 잃고 아들을 데리고 아버지를 만나셨고, 아버지는 아내가 쌍둥이 딸을 낳다가 죽어 한꺼번에 세 명의 가족을 잃고 아들을 데리고 재혼해 나와 동생 넷을 낳으셨다. 그런데 낳은 자식 중 하나가 네 살 때 죽었고, 또 하나는 열여덟 살 때 광명에서 자살했다. 아버지 인생을 생각하니 도저히 동네에서는 죽을 수 없었다. 방학이 끝난 가을쯤 멀리 강원도 깊은 산골짝에 가서 죽기로 했다. 방학을 보내는 동안 잠이 오지 않아 매일 소주 한 병을 마시고 잤다.
 하나님이 나를 살리시려고 하셨는지, 전도사인 친구가 나에게 결혼을 권하며 아가씨를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경제적인 능력도 없고 죽을 생각만 하고 있던 나에게 결혼은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친구가 여러 차례 나를 설득하는 바람에 ‘어차피 죽을 거면 결혼 한번 해 보고 죽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결혼하며 약을 버렸고, 아내의 위로가 힘이 되어 신학교도 졸업할 수 있었다.

목회를 시작했지만, 구원은 어떻게 받는 것인지…?
신학교를 졸업하고 1982년에 첫 목회를 시작했다. 교인들에게 설교하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구원이 무엇인지 의문이 풀리지 않아 여전히 곤고했다. 의문을 해결하고 싶어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다. 선배나 동기 목사들에게 물어보면 ‘예수 믿는 것이 구원받는 것이다’라고 했다. 유명한 부흥강사에게 물으면 기도원에 가서 소나무 잡고 기도해서 불을 받으라고 했다. 신학교 교수님에게 물어도 시원한 답을 주지 못했다.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알 수 없었다.
 목회하면서 나에게도 방언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도 물러가게 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마음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여전히 공허할 뿐이었다. 2년 정도 후, 인천에 있는 교회로 옮겨 목회했다. 교회가 부흥은 됐지만 가장 중요한 구원이 무엇인지는 도대체 알 수 없어 괴로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목회할 수 없겠다는 결론이 났다. 사역을 정리하고 서울로 이사했다.
 1987년 무렵부터 처형 집과 가까운 곳에 방을 하나 얻은 후 성경을 집중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전에도 성경을 수없이 읽었지만, 그때부터는 도시락을 싸서 수유리 영락기도원에 가서 성경을 하루에 200페이지 이상 읽고 기도했다. 그러나 성경이 재미가 전혀 없었다. 모래알을 씹는 것 같았다.
 하루는 친구를 따라 청계산 기도원에 가서 성경을 읽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롬 10:14) 그날 이 구절을 읽다가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기도했지? 그래, 내가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답답한 마음이 사라지고 마음 깊숙이 시원한 물줄기가 뿌려지는 것을 느꼈다. 나도 모르게 같이 간 목사님에게 “나, 구원받았어요. 나, 구원받았는데 지금까지 의심했었네요.”라고 말했다. 당시 나는 예수님이 믿어지면 그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날 있었던 변화가 구원받은 것인 줄로 여겼다.

조용갑, 너는 저주 받은 놈이야!
1991년 5월, 구원받았다는 기쁨으로 다시 목회를 시작했다. 어느 정도 목회가 되는 것 같아 보이자 더 열심히 사역하기 위해 삼각산 기도원에 올라가 기도하고 성경을 보았다. 그런데 이듬해 2월에 교회에 문제가 생겨 마음이 다시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문제를 이길 지혜도, 힘도 없었다. 한번은 전도하러 가기 위해 기도하는데, 사람들을 향한 간절한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 일로 인해 구원을 다시 의심하며 목회를 지속하던 중에 다시 어려움이 찾아왔다. 목회가 너무 싫어졌다. 머리도 다시 아프고, 아프던 다리가 퇴행성 관절염까지 겹쳐 절뚝거리기 시작했다. 소망이 점점 없어지더니 절망의 늪에 아주 깊이 빠져들었다. 마치 내가 지구에 매달려 사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비행기 추락사고로 죽은 사람들이 부러울 정도였다. 속이 터질 것 같아 거울을 보며 나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조용갑, 너는 저주 받은 놈이야!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잘돼도 너는 안 돼!”
 설상가상으로 아버지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고생하신 아버지에게 잘해드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아버지를 만나기만 하면 싸웠다. 아버지에게 “아버지! 아버지와 어머니, 막내(장애인), 그리고 저까지 네 사람이 배 하나 빌려 인천 바다에 가서 그냥 수장됩시다. 묘 쓸 것도 없이 우리 그냥 죽읍시다.”라고 아버지 가슴에 못을 박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예배 때 ‘부모에게 순종하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바르게 살아라’ 등의 율법을 가르치며 설교하는 목사가 아버지와 싸우고 아내와 딸과 다툰다는 사실이 너무나 괴로웠다. 바르게 살아야 축복받는다고 설교하면서도 내가 왜 그런 설교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가장 큰 사기꾼 같았다. 목사라는 소리도 듣기 싫었다.

 

 

어떻게 이런 교회가 다 있지?
그 즈음 교회에 있던 사택을 방 두 칸을 얻어 이사했다. 목사가 세 들어 살자 주인 아주머니가 우리 교회에 나오셨다. 그분이 하루는 ‘시집간 딸이 자꾸 엄마는 구원을 못 받았다는 말을 한다’고 했다. 딸이 뭐라고 하는지 묻자, 구원받은 사람은 의인이라고 한다고 했다. 신학교에서 이신칭의(以信稱義,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를 배웠기 때문에 아주머니에게 ‘예수님을 믿으면 의인이 맞다’고 말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기쁜소식선교회에서 갖는 성경세미나가 있을 때마다 부천에 사는 딸이 어머니 집 근처에 있는 기쁜소식성북교회에 연락해서 어머니를 집회에 모시고 가 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집회에 가는 차 안에서 기쁜소식성북교회의 성도들과 언쟁이 붙어 다투고 돌아오는 일이 두세 번 있었다. 그들은 ‘우리는 구원받아 의인이다’라고 하고, 아주머니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하며 싸웠다고 한다. 매번 아주머니가 이기고 돌아오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자꾸 우리 교인을 빼앗으려는 것 같아 괘씸해 성북교회에 직접 찾아갔다. 나도 성경을 100번 이상 읽었기에 가서 혼내주고 싶었다. 나는 교회 현관 문 밖에 서고, 성북교회 목사님은 문 안쪽에 서서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분이 성경 말씀을 몇 마디 던지는데 ‘성경의 고수, 신앙의 고수가 여기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내 기가 꺾였다.
 한번은 성북교회에서 집회를 한다기에 참석해 보았다. 그날 대표기도 내용을 들으며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장로교회에서 하는 대표기도는 거창하게 시작해 나중에는 복을 달라고 기도하고 마지막에는 항상 죄를 용서해 달라는 회개기도로 끝난다. 그런데 그날 대표기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다. ‘어떻게 이런 교회가 다 있지?’ 너무 놀랐다. 기쁜소식선교회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던 차에 어떤 분이 책을 읽어보라고 하여 기쁜소식사에 연락해서 12권의 서적을 구입해 읽었다. 내용이 굉장히 좋았다. 내가 평신도 같으면 교회를 옮겨서 신앙생활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때 ‘우리 교회가 틀렸구나. 이 교회에 가야겠구나’ 하는 마음을 가졌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그런 마음은 갖지 못했다.
 당시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순복음교회, 장로교회, 감리교회 등에 소속된 일곱 명의 목사들과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다. 내가 읽은 기쁜소식선교회 신앙서적들을 그 모임에 가져가 나눠주며 이단성이 있는지 찾아달라고 했다. 일주일 후 다시 만났을 때 목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책에는 이단성이 전혀 없다며 내용이 아주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분위기는 썩 좋지 않았다. 그때 한 목사가 나에게 ‘애들이 물가에서 놀다 보면 물에 빠져 죽는다’고 하며 이단 근처에 가면 큰일 난다고 겁을 주었다. 그 말을 듣고 이단에 대한 좋지 않은 이미지들이 떠오르며 무서운 생각이 들어 책을 다 버렸다.
 그러나 마음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라는 말씀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요한1서의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이라는 구절이 이해되지 않아 이사야 53장 6절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바로 이거구나!
성경공부 모임을 마치고 몇 년이 지난 후, 3~4천 명의 목회자들이 초교파로 참석하는 전국 목회자 세미나에 참석했다. 첫 시간, 강사 목사님이 전하는 말씀을 들으며 아주 놀랐다. 박옥수 목사님의 저서에서 읽었던 속죄제사와 죄 사함에 관한 성경 구절을 가지고 말씀을 전했기 때문이다. 그분이 어떻게 그런 말씀을 전하게 되었는지 무척 궁금했다.
 매년 수차례 전국 목회자 세미나를 참석하고 교회에 돌아오면 항상 복음과 관련된 말씀을 중심으로 평신도들을 훈련시켜 전도를 내보냈다. 몇 년 동안 이런 훈련을 반복했고, 아내도 훈련받아 교회에 다니지 않는 내 여동생에게도 복음에 관한 말씀을 전해 주었다. 그러나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 얼마 후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 나 구원받았어!”라고 소리치며, 속죄제사를 드릴 때 지성소에 피를 뿌린 것이 무슨 의미인지 다 이해됐다고 하였다. 동생은 찬송가 404장의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라는 가사와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이라는 찬송가 가사가 다 이해된다며, 굉장히 감격스러워했다.
 아내와 나는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나도 다 아는 찬송가지만 나는 감동이 전혀 없는데, 동생은 어떻게 그 찬송가들의 의미를 다 아는지 너무 궁금해서 당장 동생을 찾아가 만났다. 동생은 자기 동서를 통해 어느 교회에 가서 복음을 들었다고 했다. 기쁜소식선교회 산하의 교회는 아니었다. 너무 궁금해서 나도 동생의 동서가 소개해준 목사를 만나 말씀을 들었지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말씀 테이프와 서적을 사서 듣고 읽어보았지만 더 이상은 알 수 없었다.
 그때 박옥수 목사님이 다시 생각났다. 기쁜소식사에 전화해 소책자를 포함해 출간된 모든 책을 주문했다. 100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 역시 내용은 아주 좋았지만 요한1서 1장의 자백에 대한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떻게 내 죄가 다 사해졌다고 할 수 있는지’ 고민에 고민을 계속해야 했다.
 2004년 어느 날, 집에서 성경을 보고 계속 고민하던 중 나에게 기적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성경을 수없이 읽고, 성경세미나에서도 듣고 다른 신앙서적에서도 읽었고 또 박옥수 목사님 책에서도 읽었던 말씀인데, 문득 박 목사님의 책에서 읽은 요한1서 1장 7절의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는 말씀이 기억났다. “모든 죄에서”라는 대목에서 “아, 바로 이거구나!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셨구나! 내 모든 죄가 씻어졌구나!” 하며 비로소 죄 사함의 복음을 정확히 깨달았다. ‘이것이 구원인데, 한국 교회는 이걸 모르는구나!’ 하며, 한국 교회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전혀 이해되지 않았던 말씀들이 그때부터는 이해되기 시작했다.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의 핵심들과 박 목사님 책에 기록된 모든 내용이 자세하게 이해됐다. 무척 기쁘고 감사했다. 그동안 열등의식에 시달리고 나 자신을 저주하며 고통스럽게 살았는데, 그 모든 저주와 아픔에서 확 벗어났다. 그날부터 나는 아주 복 받은 사람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 3:13)라는 말씀처럼 나는 저주에서 해방된 사람이고, 죄에서 해방된 사람이며, 축복받은 사람이었다.
 말씀을 깨달은 후 바로 아내에게 “나, 복 받은 사람이야.”라고 말하니, 아내는 “당신이 무슨 복을 받아? 다리도 절뚝이고, 맨날 아프다고 하고, 맨날 죽고 싶다고 하잖아.”라고 했다. 내가 계속 복음을 전해 아내도 2년 후에 구원받고 나를 이해하게 되었다.

 

 

나를 믿어서는 안 되겠구나
복음을 깨닫고 한국 교회가 잘못된 말씀을 전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매년 전국 목회자 세미나에 참석했는데, 그때마다 같이 훈련 받는 다른 목사에게 물었다. “목사님 구원받으셨습니까? 우리가 훈련 받는 보혈의 말씀이 구원인지 아십니까?”라고 하면 목사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죄가 있습니까?” 물으면 다 죄가 있다고 했다.
 목회자 세미나에 갈 때마다 말하지 않으려고 해도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려 사람들을 붙잡고 복음을 전했다. 간혹 강단에서 말씀을 전할 기회가 오면 “한국의 대형교회 목사들도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하고 비판하며 죄 사함의 복음을 전했다. 내가 성경적으로 이야기했기에 내 앞에서는 반발하지 못했지만, 뒤에서 나를 욕하며 비난하는 목사들이 많았다. 그 모습을 보고 아내는 제발 목사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나도 어찌할 수 없었다.
 딸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우리 교회 신도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확실하게 거듭난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계속 복음을 전했다. 복음을 전하며 행복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구원받은 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점점 마음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교인들이 하나 둘 떠나고 구원받은 우리 가족과 몇 명의 성도만 남아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구원받은 후의 신앙생활에 대해 알고 싶어 복음을 전하는 교회에서 발간한 책들을 찾아 읽고, 말씀 테이프도 구입해 수없이 들었다. 구원받았다는 목사들도 만나 교제하며 열심히 공부했다. 물론 박옥수 목사님 책도 계속 읽었다. 그러나 믿음의 삶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다시 절망적인 생각에 빠지기 시작했다. 4년 전부터는 다른 책들은 다 치우고 박옥수 목사님의 서적만 읽고 인터넷으로 박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 말씀을 계속 듣다 보니 ‘믿음의 삶을 가르치는 분은 바로 이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본격적으로 기쁜소식선교회 말씀에 매달렸다. 기쁜소식선교회 홈페이지에 올라온 설교는 다 들었다. 주일예배 말씀은 물론 여름과 겨울 캠프, 성경세미나, 토요영상교제까지 빠짐없이 다 들었다. 특히 <쳐다본즉 살리라> <두 가지 조서> 등 여덟 권으로 구성된 박 목사님의 설교집을 반복해서 읽었다.
 계속 말씀을 읽고 듣다 보니 한 가지 선이 분명하게 그어졌다. 그것은 바로 ‘나를 믿어서는 안 되겠나!’라는 것이었다. 그동안은 말씀을 듣고 알아도 한계 밖의 일을 만나면 마음이 항상 말씀보다 형편을 따라 흘러갔다. 그렇기에 말씀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그 말씀이 내게 밥풀만큼의 힘도 되지 않았다. ‘내 생각을 믿으면 안 된다’는 분명한 마음의 선을 긋고 난 뒤부터는 말씀이 내게 힘이 되기 시작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7)“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등의 말씀을 외웠다. 마음에 말씀을 세우자 좌절과 절망이 물러가고 더불어 음란한 생각과 분노 등의 악한 생각들도 이길 힘이 생겼다.

이제는 이 교회에서 신앙을 배워야겠구나
구원받은 후 박 목사님 설교가 무척 좋았었다.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가 저절로 되었다. 인터넷으로 말씀을 들으면 기쁜소식선교회에 가고 싶었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사역을 계속하고 싶어 갈등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인터넷으로 설교를 듣던 중에 내가 잘 아는 기성교회 목사 사모님이 구원받고 간증하는 모습을 보았다. 연락해 보니, 기쁜소식성북교회 부인회에 참석한다며 나와 아내도 성북교회에 나오라고 권했다. 그때부터 아내는 성북교회 부인회에 나갔다.
 2015년 봄 서울 성경세미나 기간에, 기쁜소식의정부교회의 심재윤 목사님이 나에게 박옥수 목사님과 개인 면담을 권했다. 박 목사님은 큰 분이시고 나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인지라 내가 박 목사님을 만나서 무얼 할 수 있을지 송구스러워 거절했다. 그러다가 심 목사님의 강권을 이기지 못해 처음으로 박 목사님을 직접 뵈었다.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방을 나오는데, 목사님이 문 앞까지 나를 배웅하며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하셨다. 굉장히 충격이었다. ‘나 같은 자가 뭐길래 이렇게까지 대하시는지…’ 놀라웠다.
 작년 가을 서울성경세미나 때에는 심 목사님이 기성교회 목회자 모임이 있다며 또 나를 초청하셨다. 이번에도 부담스러워 피하다가 목회자 모임에서 믿음을 배워 다시 목회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매주 한 번씩 기쁜소식강남교회에서 정기적으로 목회자 모임을 갖기로 했다.
지난 11월 5일, 기쁜소식강남교회에서 목회자 모임 때 내가 간증하다가 갑자기 쓰러져 바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뇌출혈이었다. 예전 같으면 ‘나는 정말 안 되는 사람이구나!’ 하고 절망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 생각을 믿으면 안 된다’는 분명한 선이 그어졌기에 성경 말씀을 계속 묵상할 수 있었다. 내 마음에 말씀이 가득 차면서 절망 대신 감사와 찬양이 흘러나왔다.
 병실에 누워 있는 동안에도 복음을 전하고 싶어서 심 목사님께 월간 <기쁜소식>을 부탁해 의사, 간호사, 간병인들에게 나눠주었다. 박 목사님도 문병 와 기도해 주시고 말씀으로 교제해 주시고, 많은 물질도 주셨다. 무척 감사했다. 병실을 떠나면서 이번에도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하셔서 또 깜짝 놀랐다. ‘왜 나 같은 자를 이렇게 대하시는지…’ 몸 둘 바를 몰랐다. 병원에 있었던 열흘 동안 선교회의 여러 목사님들도 오셔서 교제해 주셨다. 교회의 따뜻한 관심을 받으며 참 고마웠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왔으니
몸이 회복되어 퇴원하고, 얼마 후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았다. 의사는 뇌출혈이 심했는데도 뇌손상이 전혀 없다고 했다. 뇌출혈의 경우 대부분 언어장애가 오거나 반신불수가 되는데, 나는 아주 건강한 것을 생각하면 정말 감사하다. 하나님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라는 말씀처럼 나를 인도하신다는 마음이 든다.
 목회에 대한 미련이 있었던 몇 달 전에 아는 사람이 없는 고양시로 이사했는데, 지금은 집에서 가까운 기쁜소식강북교회에 나가고 있다. 처음에는 서먹했지만 목사님과 형제 자매들이 잘 대해주셔서 좋고 행복하다.
 얼마 전에는 겨울캠프에도 참석했다. 아내는 두 번째 참석이고 나는 처음이라서 부담스러웠지만 올 때는 마음이 행복했다. 복음을 들었지만 교회에 나오지 않는 여동생과 막내 동생과 함께 갔고, 말씀을 듣고 다 좋아했다. 저녁 시간에 말씀을 전하신 박희진 목사님이 젊은 나이에 허리를 다치고 폐결핵에 걸려 인생이 망했을 때 복음을 듣고 구원받아 지금 행복한 삶을 살고 계신다고 했다. 목사님과 마찬가지로 가난과 병과 절망 속에서 허덕이며 죽음만을 바라던 내 인생도 하나님이 복된 길로 인도하고 계신 것을 생각하니 감사했다.
 요즘은 주변 분들에게 주간 <기쁜소식> 신문을 돌리기도 하고, 내가 알고 있는 여러 목사들을 만나 복음을 전한다. 이단이라고 반박하거나 경계하는 목사들에게는 박옥수 목사님의 저서를 읽게 하려고 책을 주며 ‘이 책 내용에 문제가 있는지 알려 달라’고 한다.
 올해 내 나이 65세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양가 가족과 친지들에게 복음을 전해 교회로 인도하고 싶다.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내가 구원받기 전에 돌아가셔서 복음을 전하지 못했고, 어머니는 구원받고 돌아가셨다. 딸과 사위도 구원받았다. 앞으로 주변 사람들과 기성 교회 목회자들을 만날 때면 누구에게라도 복음을 전할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박옥수 목사님이 해외 전도여행을 가실 때 동행하며 말씀 전하시는 모습도 보고 나도 외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은 소박한 마음을 갖고 있다.
 내 삶에 여러 문제들이 있지만, 절망 가운데 있을 때 나를 지키신 하나님이, 지금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왔기에 더욱, 그리고 무엇보다 성경에 어마어마한 약속이 있기에 하나님이 선하게 이끄시리라 믿는다. 저주 받은 삶을 축복 받은 삶으로 옮기신 하나님께 깊이 감사하며 영광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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