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연합집회 세째날 저녁말씀
울산연합집회 세째날 저녁말씀
  • 김동남
  • 승인 1999.10.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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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9-24]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1-1=0" 이라는 이론처럼 "내 죄를 예수님이 씻었기 때문에 없어."라고 하면서 그 마음이 `의롭게 되었다.`라고 말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입으로 말은 하지만 하나님의 의가 마음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10장 10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인간의 원래 주인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인간이 사단의 말을 듣고 하나님 말씀을 버렸습니다. 그 후에 인간은 `선을 행해야지!`하는 권선징악 사상 아래서 육체와 그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며 범죄를 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내가 선하게 살아야지!`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믿는 믿음 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 예수님께서 세리인 마태의 집에 들어가서 음식을 함께 먹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하는 예수님이 마음에 걸림이 되었습니다. 나름대로 의롭다고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의를 받아 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하시며 예수님의 하실 일을 나타내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누가복음 6장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는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고 안식일에 병고치는가 엿보았습니다. 그 생각을 아신 예수님이 손 마른사람에게 손을 내밀라 하셨고 마른 그 손을 내밀매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의롭고 온전치 못한 사람이 죄악된 모습, 연약하고 부족한 부분을 들고나와서 고침을 받기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2장 갈리리 가나에 혼인잔치가 있었습니다. 포도주가 부족하여 기쁨을 원했던 혼인잔치에 어려움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구했고 종들을 시켜 예수님 말씀을 따르도록 했습니다. 사람이 일함으로 부족했던 혼인잔치에 말씀을 따라 하인들이 일함으로 물이 포도주가 되는 영광이 있었고 인간의 부족한 부분이 채워졌습니다.

마태복음 22장 왕의 아들 혼인잔치가 있었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이 모두 갖춘 그 자리에 청한 사람들을 불렀으나 돌아보지도 않고 자기 밭으로, 자기 상업차로 가버렸습니다. 왕이 상업을, 밭을 빼앗아 버린다면 빼앗길 수 밖에 없는데도 자기라는 존재가 있으므로 왕의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고 진멸을 당하였습니다.

주님이 베풀어 놓은 은혜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 마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욥기 25장 5-6절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

벌레요, 구더기인 더러운 인생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빨리 사라져 주는 것이(?)

예레미야 17장 9절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이 더럽다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티가 많아 깨끗하지 못한 얼굴을 화장으로 예쁘게 꾸미듯이 우리의 마음도 꾸며서 좋은 부분만을 나타내려하고 그렇지 못한 부분은 가리는 일을 합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은 뭍이 드러난 그곳에 풀과 씨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셨습니다. 죄가 드러난 곳에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37장부터 요셉의 생애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팔려간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요셉의 형들이 양식을 사러 애굽에 내려갔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몰랐으나 요셉은 그들을 알았고 정탐꾼으로 몰아 아버지 야곱이 14년을 봉사하여 얻은 생명처럼 여기는 라헬의 소생 베냐민을 데려오기를 원했습니다.
야곱에게 베냐민은 자기의 분신이요 마음이었습니다. 야곱이 베냐민을 잡고 있는한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애굽에 있는 양식을 얻지 못합니다.
진정한 양식을 얻으려면 우리의 마음이 나와야 합니다. 주님 앞에 죄악된 우리의 마음이 나오면 주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종교는 내가 무엇을 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신앙은 믿음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아담으로 말미암아 이미 죄인 된 것을 마음에 알지 못하고 행위로 은혜를 입고자 합니다.

로마서 5장 12절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어떤 수도승이 생전에 "나는 평생에 생명을 죽인 일이 없다."고 장담을 했습니다. 한 과학자가 컵에 물 한 방울을 현미경에 놓고 보여주었습니다. 수천만 마리의 미생물이 있었고 그것을 본 수도승은 물컵을 깨트렸습니다. 스스로 의로워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앞에 죄인임을 발견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13장 23절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찐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창세기 3장 아담의 범죄 이후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었고 사람에게는 더러운 범죄가 나왔습니다.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은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없습니다.
시골에서 콩을 타작하고 자루에 넣어 재래식 화장실 나무에 걸어 놓았습니다. 나무가 썩어 똥통에 콩자루가 빠졌습니다. 자루는 하나지만 그 속에 있는 모든 콩이 똥으로 더러워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숨겨진 죄를 드러내어 치료하길 원하십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3장 21절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구원 받은 후 우리의 행위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입니다.
종교는 노력해서 육신을 바꾸려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에게 나오는 어떠한 선한 것도 받으실 수 없습니다.
창세기 4장에는 가인과 아벨이 나옵니다.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였고 아벨은 양 치는 자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았습니까?"하고 물어보면 정성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담으로 말미암아 저주가 임한 땅에서는 어떤 아름다운 열매도 받으실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아벨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히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드렸습니다.
성경에서 거듭난다는 것은 자기 중심적이고 죄악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는 형편없는 인간의 마음이 버려지고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 다시 만드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돼지에게 사람처럼 교육을 시켰습니다. 어른에게 인사 잘하고, 어른이 수저를 들기 전에 먼저 들면 안되고, 밖에 갔다오면 손,발을 씻고...등등 10가지 교육을 시켰어도 사람처럼 행동할 수 없습니다. 돼지가 사람처럼 행동하려면 돼지의 마음을 뽑아내고 사람의 마음을 넣어야 합니다. 그러면 외형은 돼지이지만 행동은 사람처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46절
"기록된바 첫 사람 아듬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사람은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로마서 3장 19절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정죄)아래있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우리 마음을 비추게 하셨습니다. 율법이 있는 유대인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고 율법이 없는 헬라인(이방인)은 그 양심이 율법이 되어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냅니다.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심판아래 두게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어떤 율법자가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나름대로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지킬수 없는 자임을 가르쳐 주실려고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부끄러움을 들추어 냄) 때려 거반 죽은 것(사망에 이름)을 버리고 갔는데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 길로 내려가다가 피하여 지나갔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던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포도주와 기름을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는데 "네 의견에는 주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 이 말씀은 너도 강도(율법)를 만나서 사마리아인인 예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도는 성경에서 율법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0장 8절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율법은 우리를 부끄럽게하고 사망에 이르게 하는 법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도 지키지 않으면서 사람들의 어깨에 짊어지게 합니다.

마태복음 23장 4-5, 누가복음 11장 46절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하고."

율법은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라 죄인된 것과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4-5절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찌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지니라."

나귀는 목이 곧고 고집이 세며 항상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나귀는 사람의 성품을 이야기합니다. 원수된 자의 부정한 나귀(죄인)가 엎드러질 때 버려두지 말고 도움(은혜)을 주라는 것입니다.
원수된 자의 부정한 나귀는 죄로 말미암아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인생을 말힙니다. 죄의 짐으로 견딜수 없어 엎어질 때 구원자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은혜(구원)를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서 4장 9-10절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은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죄의 짐에 넘어졌을때 일으킬 자가 없다면 그는 그 죄의 짐으로 말미암아 화를 당하지만 그를 일으켜 줄 자(예수님)를 만나면 그는 죄에 벗어나게 됩니다.
신앙의 지름길도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족, 나, 나의 속한 모든 일을 내가 할 수 없어서 엎드러졌을 때 주님으로 말미암는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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