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가장 가치 있는 삶
[라이프] 가장 가치 있는 삶
  • 글 | 강태욱(에스와티니, 기쁜소식만지니교회 선교사)
  • 승인 2023.02.13 10: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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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호 기쁜소식
선교사 수기(2회)

 

삶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한 번 두 번 경험하면서 신앙에 점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교회 형제 자매님들이 복음의 일에 온 마음을 쏟아 준비하고, 한 사람 한 사람 교회에 초청하는 것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나도 저렇게 마음으로 복음의 일을 해야 하는구나’를 배울 수 있었다. 

내가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다니
고등학생 때는 학교에서 동아리를 만들어 복음을 전하고 싶어서 시도했는데, 일반 교회에 다니는 선생님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저학년 교실에 들어가 동아리를 홍보했다는 이유로 뺨도 맞았다.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났지만, 목사님과 형제 자매님들이 교제해주시고 위로해주셔서 ‘나 같은 사람도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감사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나를 통해 학교에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사탄이 두려워한다.’는 사실에 복음을 전할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뒤로 한 친구가 영어캠프와 학생캠프에 참석해 구원받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시는 것이 신기하고 감사했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동아리 활동을 마음껏 할 수 있어 좋았다. 그 무렵 이헌목 목사님이 기쁜소식마산교회에 이동되어 오셔서 나의 대학생활을 지도해주셨다. 학교에서 영어스터디 클럽을 만들어 활동했는데 다른 기독교 동아리에서 방해하기 시작했다. 누가 그랬는지 모르지만, 모든 교육관 강의실과 교수 사무실 문에 우리 동아리를 이단시하는 비방 글을 써 붙였다. 기독교 동아리마다 찾아가서 따졌지만 자기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발뺌했다. 
많은 핍박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일하셔서 1학년 후배가 호주로 단기선교를 다녀오고 교회와 연결되어 교회의 큰 기쁨이 되었다.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경험할 때는 감사하고 즐거웠지만 마음이 늘 충만한 것은 아니었다. 학교생활과 교회 활동 사이에 갈등이 생길 때도 있었다. 가난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만나 감사했지만, 여전히 학교에 다니면서 학비, 차비, 식비 등의 부담을 넘어야 했다. 복음만을 위해 사는 삶보다 세상적으로도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기도 했다. 세상과 복음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갈팡질팡하던 시기에 나는 5기 단기선교사로 말라위에 파견되었다. 

말라위 교회 개척
그 무렵 케냐에서 사역하시던 양덕만 선교사님이 말라위에 파송되시면서 나도 선교사님과 동행했다. 말라위에 교회를 개척하러 가는 길이 너무 생소하고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선교사님이 그해 신년 말씀인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상 14:6)를 의지해서 가신다는 간증을 들으면서 하나님은 내게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하여 따르리이다.”(삼상 14:7)라고 한 병기 든 자의 마음으로 말라위로 향하게 하셨다. 
말라위에 도착해서 선교사님과 함께 다니며 교회를 등록하고, 비자를 받고, 집을 얻는 일을 하고, 선교사님이 복음을 전하러 가시는 모든 곳에 함께 갔다. 막막한 일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께 간절히 구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말라위에 교회가 개척되는 과정을 보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나를 복음전도자로 이끄시기 위해 선행학습을 시켜주셨다는 마음이 든다. 

한 청년의 간증
하나님께서 교회를 돕고 일하시는 것을 경험했지만 복음 앞에 내 인생 전체를 드려 신학교에 갈 마음은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복음의 가치를 깨닫게 하는 한 사건을 허락하셨다. 
교회 개척 집회를 열었는데 하루는 얼굴이 유난히 까매 보이는 아가씨가 집회에 참석했다. 그는 집회 말씀을 듣고 개인 상담을 받으면서 구원받은 뒤, 주일 예배에 참석하여 담담히 간증하기 시작했다.
“저는 외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늘 마음을 졸이며 살아왔습니다. 인생의 꿈을 갖고 열심히 공부했고 원하는 대학교에 입학해서 행복했지만, 곧이어 에이즈에 걸린 사실을 알았습니다. 몸이 아플 때마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너무 두려웠습니다. 사람들을 만나기도 두렵고 학교에 갈 의미도 없었습니다.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자살을 시도했지만 이대로 죽으면 죄가 있어 지옥에 가겠다는 생각이 들어 더 두려웠습니다. 죽음과 삶 사이에서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어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집회에 와서 복음을 듣고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제 죽어도 천국에 갈 확신이 생겨서 너무 기쁘고, 살아갈 소망이 생겨 너무 행복합니다. 저는 지난 몇 년간 웃음을 잊고 살았는데 오늘 웃음을 되찾게 되어 감사합니다.”
간증을 들으면서 그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집회에 왔을 때는 분명 얼굴이 유난히 까매 보였는데 이제는 더 이상 수색이 보이지 않고 행복한 웃음으로 가득했다. ‘정말 복음이 힘이 있구나’를 느꼈다. 
그 후로 우리가 대학교에서 활동할 때마다 그도 와서 도와주고, 교회에도 자주 와서 교제도 나누었다. 복음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디를 가든 복음을 전했다
그 일 후로 하나님이 내게 어디를 가든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을 주셨다. 마트에 가서 물건을 사고 계산하는 짧은 찰나에도 “예수님이 당신의 모든 죄를 씻으신 사실을 믿으세요. 당신은 의롭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고, 말라위의 대중교통 수단인 미니버스(15인승 봉고차)를 탈 때 늘 찬송을 불러 이목을 집중시킨 후 복음을 전했다. 국립대학교 캠퍼스마다 찾아가서 강의실을 다니며 현지어로 나를 소개한 후 집회를 홍보했고, 학교의 도움으로 무료로 전단지를 인쇄해서 집회를 홍보하고 단기선교사들이 강사가 되어 전도집회도 열었다. 
길이 없어 보여도 하나님이 도우실 소망을 갖고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하시는 것을 경험하며 복음을 전하는 기쁨과 가치를 몸소 느낄 수 있었다. 

복음전도자의 삶을 살기로 정했다
복음 전하는 맛을 느끼며 단기선교가 막바지에 접어들던 무렵에 녹음된 말씀을 하나 들었다. 박옥수 목사님의 사모님이 전하신 말씀이었다.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히 11:13)를 말씀하며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이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 11:16)를 말씀하며 이 땅이 아닌 하늘나라 본향을 사모하며 사는 삶을 말씀해주셨다. 
무심코 이어폰을 귀에 꽂고 들었던 말씀인데 그 이후로 ‘외국인과 나그네’라는 두 단어가 계속 맴돌기 시작했다. 나는 이 땅에 사는 외국인이고 나그네였다. 이 세상에서는 잠시 잠깐 살다 갈 사람이라는 뜻이고 나의 진짜 집은 하늘나라 본향이었다. ‘아, 정말 그렇지! 내가 이 세상에서 사는 삶이 외국인과 같이 잠시 지내고 나그네처럼 스쳐가는 인생인데, 왜 그렇게 이 땅에서 불편하고 어려운 건 피하고 싶고 안정된 직장, 평안한 삶을 추구하며 살았을까?’ 내가 추구하던 인생의 방향과 가치관이 너무 어리석어 보였다. 이 땅에서의 인생은 길어야 80년인데 영원한 하늘나라와 비교하면 정말 잠시 스쳐가는 외국인과 나그네의 삶이 맞았다. 사모님의 말씀을 들으며 가장 가치있고 복된 복음 전도자의 삶을 살기로 마음을 정했다. 

군대에서 전도사로 복음을 전하라
귀국 후 59기로 굿뉴스신학교에 입학했다. 날마다 박옥수 목사님의 수업을 듣고 마음을 표현하며 믿음의 훈련을 받는 삶이 너무 감사하고 행복했다. 나 같은 사람이 이런 귀한 곳에 와서 목사님에게 직접 믿음의 삶을 배운다는 것이 감격스러웠다. 
6개월간 훈련을 받고 군에 입대했다. 목사님은 “강 형제가 군대에 갈 필요가 없으면 하나님이 안 가도록 하셨을 텐데, 하나님이 군대에서 하실 일이 있어서 강 형제를 파송하는 것이니 군대에서 전도사로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군대에 가는 것이 두렵고 떨리기는 했지만, 하나님께서 군대에 파송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셔서 도우실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입대했다. 
춘천 102보충대를 거쳐 화천에 있는 7사단 신병교육대 훈련소에 입소해 5주간의 교육을 받은 후 조교로 차출되었다. 나를 훈련시킨 소대장은 대학교 기독교 동아리 출신이었고, 동남아로 일주일 태권도 봉사활동을 다녀온 경험이 있다고 했다. 나중에 내가 기쁜소식선교회 출신이라는 사실을 안 후 나를 경계하기 시작했고, 부대 내 모든 조교에게 나를 이단시하는 소문을 퍼트려 곤란한 일들을 겪을 때가 많았다. 
하나님은 내가 그 부대에 남아서 복음을 전하도록 조교로 차출되게 하셨고, 자대 배치 첫날부터 나를 이단아로 소개받은 선임 조교들과 나를 이단아로 만든 소대장 밑에서 군생활을 시작했다. 

군대에 있는지 천국에 있는지
많은 사람의 눈총 속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할지 막막해서 기도만 하고 있는데 군생활 4개월차가 되던 날,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강하게 두드리셨다. 하루는 교회에 가는 훈련병들의 모습을 보는데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복음을 듣지 못할 뿐 아니라 마음의 위로조차 얻지 못할 훈련생들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이 너무 아팠다. 
때마침 나를 조교로 선발한 중대장님과 단둘이 행정반에 있었다. 물론 군대의 지휘 체계와 보고 체계가 있어 감히 내가 중대장님에게 무엇을 제안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고 그럴 기회도 없었지만, 그날 나는 내가 아니었다. 중대장님과 대화하던 중 내게 “잘 지내냐?”라고 물으셔서 나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중대장님, 훈련병들과 성경공부를 하면 안 되겠습니까?” 의외로 중대장님은 
“너무 좋다! 훈련병들 모아서 매주 토요일 중대 회의실에서 성경공부도 하고, 찬양대회도 하고, 같이 기도도 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짜서 기독교 활동을 담당해라.”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길을 열어 이끌어 가시는 것이 너무 감사했다. 
중대장님의 허락으로 누구의 제재도 받지 않고 매주 40~50명의 훈련병을 모아 찬송을 부르고 복음을 전했다. 박 목사님이 원주 통신훈련소에서 복음 전하신 간증을 들어왔는데 실제 나의 군생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이끄시는 것을 경험하며 내가 군부대에 있는지 천국에 있는지 모를 정도로 너무 행복했다. 


사울의 모습이 내 모습 같았다
약 6개월간 부대에서 복음을 전하며 행복에 젖어 지내다가 다시 큰 문제에 부딪혔다. 중대장님이 전역하면서 나를 핍박하던 소대장이 중대장 대리가 되어 성경공부를 못 하게 막은 것이다. 내가 소대에서 복음 전하는 것을 누가 보고하면서 며칠 동안 군장을 매고 연병장을 도는 벌을 받기도 했다. 
어려움 가운데 마음의 힘을 점점 잃고 형편과 타협하며 지내다가 휴가를 얻어 신학교 수업을 들었다. 박 목사님이 사울과 다윗에 대한 말씀을 전하셨다. 믿음이 없어 형편과 타협하며 사는 사울의 모습이 내 모습 같았다. 말씀을 듣고 신학생이 발표하는 시간에 나는 그동안 군대에서 받는 핍박 때문에 믿음 없이 살았던 내 모습이 말씀에 비추어진 부분을 발표했다. 목사님은 내 발표를 듣고 교제해 주시면서 간부들에게 어떻게 이야기하고 핍박을 이겨나가야 할지 상세하게 가르쳐 주셨다. 

끈질긴 싸움이 끝나는 듯했으나
부대로 복귀하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컸지만, 목사님의 인도대로 따르지 않으면 믿음을 경험할 수 없을 뿐더러 계속 부담을 피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을 생각할 때 끔찍했다. 그래서 복귀하자마자 중대장실에 찾아갔다. 새로 부임한 중대장은 전 중대장 대리보다 더 신실한 장로교인이었고, 심지어 부인은 전도사였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훈련병들과 성경공부 모임을 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여러 이유를 들어서 말했지만 나도 뒤로 물러설 수 없었다. 
“우리나라 헌법에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 종교의 자유가 있고 종교 선택의 자유뿐 아니라 포교의 자유도 있습니다. 왜 군대에서는 안 됩니까? 군법도 헌법의 가치 아래 있는데 어떤 종파는 되고 어떤 종파는 안 된다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계속 물러서지 않고 말대꾸하자 중대장실에 있던 재떨이로 나를 때리려고 했다. 깜짝 놀라 중대장실을 뛰쳐나왔다. 
그 후에도 여러 번 중대장과 부딪혔다. 중대장은 군종참모를 불러와 나를 설득시켜 보기도 하고 여러 방법을 써도 내가 굽히지 않자 마지못해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성경공부 모임을 하되, 부대에 있는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하라고 했다. 마침내 끈질긴 싸움이 끝나는 듯했고, 성경공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뛸 듯이 기뻤다. 그러나 그것이 싸움의 끝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성경공부를 하고 싶고 신앙상담을 받고 싶은 사람들을 신청 받아서 예배가 끝나고 모임을 하려는데 갑자기 군목장교가 “강태욱 병장은 예배당 밖으로 나가세요!” 하고 명령을 내렸다. 내가 ‘왜 나가야 하느냐?’고 묻자 이유도 대지 않고 나가라고 했다. 내가 중대장이 허락해줘서 모임하는 것이라고 하자 교회 내에서 하는 모든 활동은 군목에게 권한이 있으니까 나가라고 소리를 쳤다. 결국 사람들이 나를 끌어냈다. 
나중에 훈련병들에게 들어보니 나를 끌어낸 뒤 군목의 아내가 와서 훈련병들에게 나와 우리 선교회에 대해 온갖 거짓말로 비방하고 나는 절대 대화조차 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모함했다고 했다.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났다. 
설상가상으로 중대장과 간부들이 그 사건에 대해 징계위원회를 열어 ‘군목의 명령에 불복종했다’고 주장하며 ‘명령불복종’의 죄목을 붙여 군법 최고형인 영창 15일을 선고했다. 마음이 너무 어렵고 이해할 수 없었다. 목사님들에게 이 사건에 대해 말씀드리자 마태복음 10장 말씀을 해주셨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 10:29~30) 
‘나에게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내가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아 영창에 가는 것이고, 초대교회에서나 겪던 핍박과 옥에 갇히는 일들을 이 시대에서 내가 겪을 수 있다면 그것보다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며 평안하고 오히려 담대했다. 

나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야!
영창 가기 전날, 중대장은 내 생활관 앞에서 다른 후임들과 큰소리로 웃으며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었다. 나는 생활관에 들어가서 일부러 문을 열어놓고 중대장 들으라고 크게 찬송을 불렀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 내가 함께하리라.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 너를 보호하리니,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이사야 43장) 찬송을 목청 높여 부르는 동안 알지 못할 힘과 소망이 솟아올랐다. ‘그래, 나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야. 누구도 나를 함부로 할 수 없어!’ 
그 다음날 영창을 가는 대신 중대 간부들의 징계에 대해 항소하고 사단 법무부에 가서 재판을 받았다. 목사님과 교회가 마음을 써주셔서 영창에 가는 대신 부대 내에서 근신 7일을 받았다. 부대 내의 기간병들은 다들 ‘부대 내에서 7일 휴가를 받아 왔다’며 나를 무척 부러워했다. 
그 후 다른 부대로 전출되어 남은 3개월 동안 군생활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다 전역했다. 처음에는 이전 부대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온 나를 경계하던 간부들이 나중에는 부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병사들을 내게 소개하며 상담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병사들에게 마음껏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께서 내가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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