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정말 해볼 만하구나
[라이프]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정말 해볼 만하구나
  • 글 | 박성애(기쁜소식강남교회)
  • 승인 2023.11.21 09: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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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호 기쁜소식
보배와 질그릇

 

스물네 살에 구원받은 후로 28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신앙의 길이 달라 가족에게 외면당해야 했던 일,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 신장 투석과 이식 수술 등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어 힘겨울 때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당신만을 소망하는 복된 길을 주셨다. 인생은 참 살아볼 만하다.

 

아버지 집안은 막내인 아버지와 형님 네 분, 누나 한 분 이렇게 6남매가 전부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 피난을 오셨기 때문이다. 피난길에 어느 선교사님에게 도움을 받은 일을 계기로 큰아버지 세 분은 목회자가 되셨다. 아버지는 대형 교회 장로님이 되셨고, 어머니는 큰 교단 권사님의 따님이셨다. 나는 그런 기독교 가정에서 두 딸 중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다른 분들보다 유독 진리를 찾는 분이셨고, 우리에게 항상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나는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신앙에 대한 갈등이 생겼다. 대학 시절은 내 신앙에 더 큰 혼돈을 가져다주었다. 원하던 대학에 가지 못했지만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싶어 신학대학교에 지원했다. 신학대학교에 가면 신앙에 대한 내 마음을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쌓여가는 신학 이론에 반해 내 마음은 더 메말라갔다. 사회복지를 공부하지만 사회복지를 구현할 수 있는 봉사정신도 내겐 없었다. 신앙은 종교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고 문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지내던 중, 1995년 4학년 1학기에 복음을 듣고 구원받았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나의 모든 죄가 씻어졌다는 말씀을 처음으로 듣고 믿었다. 마음이 너무 후련했다. 그동안 나름 하나님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내가 배운 성경 지식으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돌아보면 하나님이 나를 더 찾으셨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을 진정으로 발견하기를 기다리셨다는 마음이 든다. 

다시 생각해도 이 말씀이 맞았다
기쁜 마음에 부모님에게 내가 비로소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노라고 자랑하듯 이야기했다. 그런데 반응이 예상 밖이었다. “네가 우리 집안에 태어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무슨 이제서야 예수님을 믿는다는 거냐?” 하시면서 내가 이상한 종교에 빠진 것이 아닌가 오해하시기 시작했다. 심지어 당시 한국에서 목회하시던 큰아버지 두 분과 외삼촌을 포함해 전 가족을 우리집에 모아서 둥그렇게 앉게 하고, 나를 그 가운데 앉혀놓고 ‘잘못된 교회에서 나와야 한다’고 권고하셨다. 너무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지만 구원의 확신이 없었던 것이 맞았고, 방황하던 내 신앙에 종지부를 찍어준 것은 이런 나를 위해 예수님이 돌아가셔서 내 죄가 다 씻어졌고, 그래서 죄가 없다는 말씀이었다. 그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가족의 반대와 상관없이 나는 기쁜소식선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다시 생각해도 이 말씀이 맞았고, 말씀을 들을수록 마음이 시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마음이 너무 어려워서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장례식에 참석했던 분들은 나 때문에 엄마가 돌아가신 거라고 저주했다. ‘나는 예수님을 믿었을 뿐인데, 왜 이런 어려운 일이 생기는 거지?’ 사람들의 저주는 마치 송곳으로 날 찌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장례식이 끝나고 며칠 후 박옥수 목사님은 시글락이 불타 다윗이 마음이 군급하여 여호와를 찾았을 때, 여호와께서 “네가 반드시 미치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라고 하신 말씀을 해주셨다. 당시 내 형편과 맞지 않는 것 같은 이 말씀도 너무 버거웠다. 하지만 “정녕 도로 찾으리라.”라는 말씀이 칠흑 같던 내 마음에 옅은 빛이 되어 들어왔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실 거예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내게 어려운 일이 하나 더 생겼다. 내 신장이 좋지 않다는 진단을 받은 것이다. 신장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고 있던 내게, 의사는 알 수 없는 주의사항을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그냥 전처럼 열심히 직장생활을 했다. 안 좋은 내 신장을 위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1년 후에 몸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걸을 수 없을 정도였다. 신장이 완전히 망가져서 폐에 물이 찼다고 했다. 입원하면서 다시 한 번 하나님께 의문을 가졌다. 
‘하나님, 왜 저에게만 이런 일을 주시는 건가요?’ 
하나님께 따지듯 물었다. 그때 마침 내가 입원했던 병원에는 교회 자매님이 근무하셨고, 몇몇 자매님들이 같이 입원해 계셨다. 자매님들과 교회 목사님은, 절망 속에 있던 내게 ‘인생에는 원래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과 ‘모든 사람에게 어려움이 오지만 나에게는 빨리 왔을 뿐’이라는 것,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을 수밖에 없는 흙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주셨다. ‘아, 인생은 원래 어려운 것이구나. 어려움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구나.’ 그래서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을 찾는 것임을 알았다. 모든 원망이 사라지고 하나님께 소망을 둘 수 있었다. 
몇 개월은 식이요법으로 버텼지만 결국 투석을 시작했다. 어려웠지만 내 마음은 참 평안했다. 그런 나를 보는 가족의 눈은 여전히 냉랭했다. 
‘역시 너는 저주를 받았구나.’ 하는 눈초리였고, 실제로 온갖 말로 나를 송곳처럼 찔렀다.
아버지는 내가 교회를 옮기면 신장 이식 수술을 받게 해주겠다고 제안하셨다. 아무 조건 없이 자식을 사랑하셨던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처음에는 너무 당황스러웠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하나님이 나를 도우실 거예요.’라는 마음이 들었다. 
투석한 지 9개월 정도 되었을 때쯤 내가 전혀 모르는 기증자로부터 신장 이식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가 다른 말씀은 안 하셨지만, 신장 이식의 길이 열리자 너무 기뻐하셨다. 신장 이식을 받고 나니 밥도 맛있고, 화장실에 가서 소변도 보고, 병원 밖을 내 발로 걷는 것이 너무 감사했다. 내 눈으로 보는 모든 세상이 너무 아름다웠다.

하나님이 우리 부부를 인도하신 것이 너무 분명했다
나는 스물네 살에 구원받고 스물아홉 살에 신장을 이식받았다. 구원받고 5년 동안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또래의 젊은이들이 꿈꾸는 좋은 직장, 이성에 관한 관심은 나에게 사치였다. 건강을 찾았지만 여전히 면역억제제를 복용하고 있었고 연약한 사람이었다. 결혼은 하고 싶었지만, 마음은 닫고 살았다. 그저 직장생활에만 마음을 두고 살았다.
수술받은 지 7~8년 정도 지났을 때, 교회에서 우연히 박옥수 목사님을 만났다. 박 목사님은 신장 이식 수술을 받은 지 얼마나 됐는지 물으셨다. 7~8년 됐다고 말씀드리자, 그 신장은 얼마나 쓸 수 있는지 다시 물으셨다. 나는 통상적으로 10년이고, 많이 사용하면 15년 정도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목사님은 “그 신장 평생 쓰면 되겠다. 내가 좋은 신랑감 구해줄 테니, 기다리고 있어.”라고 하셨다. 듣고 싶었던 말이지만 세상에서 하는 말과는 너무 달라서 어안이 벙벙했다. 또 몇 년이 흘렀다. 목사님이 나에게 해주신 소망의 말씀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한 번씩 기억날 뿐이었다. 
나는 교회에서 한 구역에 소속되어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 구역의 어느 자매님은 나를 보면 종종 “우리 오빠가 구원받으면 성애 자매와 결혼하면 좋겠어.”라고 말했다. 나는 그냥 우스갯소리로 넘겼는데 어느 날 그 자매님의 오빠가 구원받았다며 구역예배에 참석했다. 그 무렵 하나님은 내게 결혼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하셨고, ‘만약 내가 결혼하게 되었는데 상대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아무 조건도 보지 않겠다.’라는 마음을 주셨다. 
얼마 후 선을 보았다. 상대는 바로 우리 구역 자매님의 오빠였다. 나는 신장 이식 수술 받은 것을 이야기했고, 우리는 서로 마음을 나누었다. 마음이 평안했고, 얼마 후 결혼하기로 했다. 남편 될 형제님은 장남이었고, 나이가 많으니 빨리 결혼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혼하기로 결정한 후 박 목사님에게 인사드리러 가는 날이었다. 그날 아침, 얼마 전에 형제님이 받았던 건강검진 결과가 나왔다. 비인두암 3기라고 했다. 우리 가족 모두 너무 놀랐다. 나는 ‘이제는 모든 어려움이 끝났다.’라고 생각했고, 형제님도 ‘늦은 나이에 구원받고 교회에서 짝을 만나는구나.’ 했는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그날 형제님은 혼자 박옥수 목사님을 만나 건강검진 결과를 말씀드렸다. 목사님은 시편 105편 15절 말씀으로 교제해주셨다고 했다.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 처음에는 ‘목사님이 나를 위로해 주시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집에 가서 다시 생각해보니 ‘하나님의 종이 하신 말씀을 내가 인간적인 위로로 듣고 있구나. 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이야. 이 말씀처럼 하나님이 나를 상하게 하지 않으시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그 뒤로 형제님은 7개월간 코와 비강 쪽에 방사선 시술을 받았다. 어려움은 많았지만 말씀을 대하며 치료를 다 마치고 시편 말씀처럼 완치되어 그해 9월 우리는 결혼했다. 시부모님은 신장 이식 수술을 받은 나와 암 치료를 받은 아들을 보며 “너희 둘은 하나님이 맺어주신 짝인 것 같다. 둘이 건강하게 살기만을 바란다.”라고 하며 축복해 주셨다. 
“내가 좋은 신랑감 구해줄 테니 기다리고 있어.”라고 하신 박 목사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내게 하신 말씀이었다. 우리 부부는 때론 의견이 안 맞을 때도 있지만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 부부를 인도하신 것이 너무 분명했다.


불가능한 일을 아름답게 도우시는 하나님
나는 1999년 12월에 신장 이식을 받았는데, 2000년 1월부터 신장이나 간을 이식받은 사람은 내적장애자로 분류되어 장애인 5급 판정을 받았다. 수술 후로 정상적인 일상을 살지만 직장생활을 하기는 쉽지 않아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때마침 항공사에서 장애인을 재택근무자로 뽑기 시작했다. 나는 아시아나항공에 지원해서 항공사 업무를 배웠다. 1년 후에는 회사에 출근하며 3년간 아시아나항공 예약과에서 일했다. 
내가 일할 때가 2003년경이었는데, 당시 선교회에서는 2001년에 국제청소년연합IYF이 설립된 후 해외 월드캠프를 구상하던 시기였다. 교회에서는 여행사를 직접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직원을 구하고 있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나에게 여행사 일을 하면 좋겠다고 권하셨다. 항공사 업무와 여행사 업무는 너무 다른 분야였다. 항공사 업무는 그 항공사 일만 하면 되지만, 여행사 업무는 전 세계 항공사와 일해야 하는 등 복잡하고 광범위했다. 갈등이 있었지만 여행사에서 일하기로 했다. 
보통 여행사의 항공권 발권 업무는 당시에는 20대 초반부터 꾸준히 경험을 쌓아야 할 수 있는 일인데, 서른이 넘어 처음부터 배우려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꼼꼼한 사람이 아닌데 여행사 일은 사람을 상대해야 하고, 돈도 계산해야 하고, 여러 가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해서 너무 힘들었다. 이런 내 모습과 상관없이 교회 안에서는 매년 2,000~3,000명이 참석하는 규모의 행사들이 생겨났다. 행사 때는 밤낮이 없었으며,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전화기를 꼭 붙들고 살았던 기억이 난다. 우리 선교회에서 청소년을 위한 행사를 진행할 때는 현지 상황에 따라 스케줄에 변동이 많아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요청할 때가 많았다. 머리가 아찔해지는 일들이 정말 많았다. 
그 가운데 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다. 그라시아스합창단이 케냐와 가나로 전도여행을 가야 하는데, 당시 케냐와 가나에 가는 항공편은 100석짜리 비행기가 딱 한 대 있었다. 박 목사님과 스태프 등을 포함해 40명이 가야 하는데 이미 다른 승객으로 좌석이 차 있었다. 행사 날은 다가오는데 비행기 좌석이 확보되지 않았다. 너무 애가 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합창단이나 박 목사님은 그런 상황을 들으시고도 평안히 하나님을 기다리자고 하셨다. 
케냐항공 한국 지사에서는 ‘안 되는 일을 더이상 힘들게 요청하지 말고 날짜를 바꾸라’고 했다. 출발하기 하루 전날까지도 좌석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기도하고 나니, 케냐에 있는 항공사 본사에 이메일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옥수 목사님과 그라시아스합창단이 케냐와 가나에 가면 그 나라 청소년들의 미래가 밝아질 것이고, 하나님이 그 나라를 축복하실 거라고 메일을 보냈다. 케냐와 가나의 노선을 담당하는 매니저가 메일을 보고 한국 지사에 연락해 우리가 타야 하는 비행기 좌석 40석을 지원해 주었다. 아침에 출근하니, 케냐항공 한국 지사 담당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며 한국 지사를 거치지 않고 본사와 직접 대화를 시도한 내게 약간의 불쾌한 감정을 내비치면서도, ‘어떻게 했길래 좌석을 받았냐?’며 놀라워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외에도 불가능하고 어려운 일이 많아서 항상 고심했지만, 불가능한 일을 아름답게 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마음이 녹곤 했다. 

항상 앞서서 계획하고 인도하신다
여행사 일을 하면서 내 마음에 무엇보다 크게 남았던 것은 박옥수 목사님의 삶이었다. 목사님은 당시 60대 초반이셨는데, 지금처럼 주일 예배를 마치고 그날 저녁 밤비행기로 남미나 아프리카, 동남아로 전도여행을 가셨다가 그 다음주 주일 새벽에 귀국해서 기쁜소식강남교회 오전 예배 말씀을 전하셨다. 목사님의 삶을 보면서 ‘목사님을 이렇게 살게 하는 원동력이 무얼까?’를 많이 생각했다. 목사님의 항공 일정을 준비하면서 복음에 대한 열정과 사랑과 희생의 흔적이 내 마음 깊이 새겨졌다. 
여행사 일을 할 때, 박 목사님은 설교 중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분야에서든 세계 최고가 된다.”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힘을 내서 열심히 일하던 중, 여행사가 인원을 감축하며 그만두게 되었다. 한편 아쉽기도 했지만 그 일을 계기로 외국계 여행사로 직장을 옮겼다. 글로벌기업을 상대하는 출장 전문 여행사였다. 그곳에서 2년 동안 일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그다음 한 번 더 직장을 옮겼는데, 그곳은 해외 항공사 대행 업무를 하는 총판 회사였다. 그곳에서도 새로운 일을 많이 배웠다. 코로나가 창궐하기 1년 전인 2019년에는 직장생활을 접고 여행사를 창업했다. 사업을 할 생각은 없었는데 자연스럽게 길이 열렸다. 박 목사님이 ‘파란하늘여행사’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다. 내가 창업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많은 분들이 찾아와 주셨다. 1년간 나는 회사 운영의 기반을 잡고 준비했다.
그런데 1년 뒤 코로나19 팬데믹이 닥쳤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많은 여행사가 부도가 나고 여행사나 항공사에 근무하던 동료들이 직장을 떠났다. 그때 나는 찬찬히 팬데믹 기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준비했다. 중소기업, 대기업, 공공 기관에서 해외 출장을 다니던 분들이 이용하던 여행사가 문을 닫으면서 우리 여행사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코로나 때문에 해외로 나가는 분들의 수는 현저히 줄었지만, 여러 가지 많은 제약에도 불구하고 꼭 해외로 나가야 하는 분들이 계셨다. 
이상하게 나는 어렵고 힘든 일이 들어오면 꼭 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출장 가는 분들과 계속 소통하면서 한 분 한 분을 해외로 보냈다. 13년 동안 교회 일을 하던 근성이 나에게 발동되었다. 팬데믹 전보다 업무량은 줄었지만, 어려운 때에 어려운 일을 하는 만큼 수입은 좋았다. 무엇보다 팬데믹으로 다른 동료들과 동종업계 분들이 그만두는 시점에 하나님이 1년 전 미리 회사를 개업하게 하셨다는 것이 너무 놀라왔다. 
지금도 코로나 팬데믹 때 신뢰를 얻은 여러 기업들, 정부 기관들과 일하고 있다. 대부분 어려운 일들에 대한 의뢰가 들어온다. ‘요즘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에 여행사가 무슨 필요가 있나?’ 하는 시점이지만, 기계가 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과 사람의 마음을 쓰고 공을 들여야 하는 일들은 여전이 블루오션인 듯하다. 지금은 공공 기관에 근무하던 남편이 일을 도와주고 있어 더욱 든든하다. 또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많이 생겼다.
전에 박 목사님이 ‘성경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혜가 있어서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세계 최고가 된다’고 하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항상 앞서서 계획하고 인도하신다.

“성애야, 아빠 구원받았다!”
나는 내 인생에서 결혼을 생각하지 못했고 우리 부모님도 같은 생각이셨는데, 내가 교회의 인도로 결혼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정말 기뻐하셨다. 박옥수 목사님은 나를 볼 때면 종종 우리 아버지에 대해 말씀하시며 아버지께 <주간 기쁜소식>을 보내드리라고 하셨다. 남편은 자주 아버지를 찾아뵙고 주간 신문과 신앙 서적을 드렸다. 아버지는 매주 받는 신문을 달게 읽으셨다. 읽은 말씀을 매주 우리에게도 이야기하며 좋아하셨다. 우리가 결혼한 지 3~4년 정도 되었을 무렵부터는 종종 우리 교회에 나오기도 하셨다. 놀라운 변화였다.
나중에 사정을 들어보니, 아버지가 장로 직분을 받고 평생을 섬기던 교회 목사님이 교회 재정과 관련된 문제에 얽혀 뉴스에 떠들썩하게 나왔다고 한다. 아버지는 당신이 존경하던 목사님에게 매우 실망했다고 하셨다. 그러던 차에 건강도 좋지 않고 속도 많이 썩였던 내가 기적적으로 수술도 잘 받고 결혼도 하고 잘살자, 마음을 열고 우리 교회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신 것이다. 
우리가 보내드린 주간 신문을 읽고 인터넷으로도 박옥수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시던 아버지는 ‘박 목사님의 목회 방식이 너무 깨끗하고 복음을 위해 사시는 삶도 대단하다’며 더욱 마음을 여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다 씻으셨다’는 말씀은 맞지만 마음에서 죄가 계속 생각나는 것 때문에 여전히 고민하셨다. 복음이 마음에 임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우리 부부는 기도했다.
2022년 초에 아버지가 코로나로 입원하셨다. 노인들은 코로나에 걸리면 돌아가시는 경우가 많아 매우 염려되던 때였다. 마침 우리 선교회에서 온라인으로 겨울캠프를 하던 시기와 맞물렸다. 코로나로 입원 중인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이건 또 무슨 일인가?’ 하고 마음이 어려웠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병원에서 내게 전화하셨다.
“성애야, 아빠 구원받았다! 내 죄를 예수님이 다 씻으셨어. 내 나이가 여든인데, 이제야 예수님이 내 죄를 가져가신 사실을 믿게 됐어. 너무 감사해.” 하면서 우셨다. “성애야, 내가 지금이라도 구원받은 것이 얼마나 감사하니? 내가 그동안 너를 무척 반대했는데 너를 통해서 이 구원을 받다니, 너무나 놀라워! 성애야, 고맙다! 네가 진짜 효녀다.”
결혼하고 10년 후, 구원받고는 27년 후의 일이다. 아버지는 지금 기쁜소식강북교회에 다니고 계신다. ‘말씀이 너무 좋고 행복하다’고 하신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성애야, 난 구원받고 삶의 목표가 생겼어. 복음을 증거하고 살다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가는 거야.” 
아버지는 노년의 모든 걱정을 내려놓고 매일 행복을 말씀하신다.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생각한다. ‘하나님이 주신 인생은 참 살아볼 만한 것이구나.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기다려볼 만하구나.’ 
나는 건강도 안 좋고 뭐든지 늦고 부모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는 사람인데, 복음은 나를 효녀로 만들었다. 요즘 나는 아버지를 보면서 매일매일 행복하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해볼 만하구나
1999년 12월 22일에 신장 이식을 받고 벌써 24년째가 되었다. 이식 받은 신장은 아무리 잘 사용해도 10년쯤으로 보는 분들이 많은데, 10여 년 전에 박 목사님이 ‘그 신장 평생 쓰라’고 말씀하신 대로 내 신장은 아직 튼튼하다. 25년 넘게 다니던 병원을 올해 옮겼는데, 새 병원의 의사 선생님이 놀라며 ‘도대체 누구 신장을 받았길래 이렇게 건강하냐?’고 물으셨다. 친혈육에게 받은 신장도 잘 안 맞으면 거부반응이 일어날 수 있는데, 내가 이식 받은 신장은 나와 잘 맞지 않는 신장임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20년은 더 쓸 수 있겠다고 하셨다. 의사 선생님의 말이 내 미래를 예지할 수는 없지만, 그분의 말을 통해 하나님은 내게 ‘평생 이 신장으로 건강하게 살라’고 하신 말씀을 이루신 사실을 알게 해주셨다. 
나는 전도하려고 애쓴 적은 없다. 그런데 나를 오래 알았던 지인들과 거래처 사장님, 예전 동료들에게는, 내가 사는 모습이 마치 든든한 백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다. 얼마 전, 20년 가까이 알았던 거래처 사장님이 구원받으셨다. 같은 회사 동료였던 분은, 하나님을 믿지는 않는데 성경을 배우고 싶어 해서 회사 근처에서 한 번씩 성경 공부를 하고 있다. 최근에는 같은 아파트 주민들 중 유일하게 내가 아는 분도 구원받으셨다. 나는 뭐든지 늦게 트이는 사람이다. 나는 다시 한 번 속으로 되뇐다. 
‘하나님이 주신 인생은 참 살아볼 만하구나.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정말 해볼 만하구나.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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