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하는 왕의 마음 - 네째날 오전A
거절하는 왕의 마음 - 네째날 오전A
  • 정상화
  • 승인 2008.02.14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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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1장 1절~13절                                                       정일갑목사님어떤 학생이 고2때까지 학교에서 짱이었어요. 싸우면 지지않고 이기니까 아무도 덤비지 않고 싸우지 않게 되었어요. 아무도 덤비지 않으니까 싸우는 것이 재미가 없어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공부를 열심히 하니까 성적이 올라갔어요. 그 때 "나도 공부하면 되는구나!"하는 마음을 가졌어요. 하지만 혼자서 공부하면 어느정도까지는 올라가는데 더이상은 올라가지 않는거에요. 그래서 선생님을 찾아가서 말했어요. 그때 선생님께서는 "넌 문제를 풀려고 하지말고 문제를 출제한 사람의 마음에서 문제를 봐라." 그래서 그 후로 문제를 볼 때 문제를 낸 사람의 편에서 푸니까 답이 보이는 거에요. 이것이 이 학생에게 박혀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할때에도 자기 편에서가 아닌 직장 상사의 편에서 동료들의 편에서 생각하니까 다른 사람보다 뒤지지 않는 삶을 살았어요. 그 후 그때 그 선생님을 찾아가서 감사하다고 말했어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내편에서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편에서 생각해야지' 그런데 만약 이 학생이 혼자 공부해도 점수가 잘 나왔더라면 선생님을 찾아 갔겠나?' 내편에서 해결이 안되니까 선생님과 마음이 연결이 되고 결국 성공하게 된거에요. 내 마음이 어렵고 힘들 때,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에 빠져 있는 것을 보았어요. 저는 단에 서서 성경은 우리를 이야기 하는 것이라고 수없이 이야기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했지만 문제가 왔을 때 말씀을 믿지 않고 내 수단으로 일들을 처리하고 있지 하나님의 방법으로 처리하지 않는 내 모습을 보았어요. 오늘 읽은 말씀에 나오는 인물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를 가르킨다는 것을 안다면 이 말씀이 오랫동안 남아서 나를 가르치기에 충분해요. 53세된 아주머니가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서 '내가 살아서 뭐해' 대충 살고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그때부터 아주머니는 오히려 몸이 병들었어요. 53세된 아주머니들이 다 이렇게 비관적으로 살지는 않아요. 이 사람은 자기에게 갇혀서 그런거에요. 내 안에서, 내 속에서 올라오는 생각을 따라 삶을 사는데 다른 사람은 나처럼 사는지 생각하지 않고 살아요. 왜 187일 마지막날에 왕후를 불렀을까? 187일동안 왕이 왕후를 부르지 않을때 왕후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까? 어떤 마음으로 후궁 뜰에서 잔치를 베풀었을까? 와스디가 왕후가 될 때에 왕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마음에 담고 자기의 것을 버리고 들어왔을 거에요. 그런데 왜 187일만에 왕이 왕후를 불렀을까요?창세기 1장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보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했는데 내가 보는 천지는 어떻습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만 좋지 뱀, 바퀴벌레, 구더기, 박쥐... 하나님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다고 하셨어요. 내 편에서는 내가 보기에 싫은 것, 안 좋은 것은 버리고 내가 보기에 좋은 것만 좋아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실 때는 필요하기 때문에 만들었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했어요. 저는 모기를 왜 만들었는지 몰랐는데 나비, 벌이 수정을 못하는 밤에 다니면서 모기가 수정을 해준데요.모든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거예요. 왕후가 폐위를 당할 줄 알았다면 그래서 깊이 생각해 보았더라면 왕의 명령을 거절하지 않았을 거에요. 저희 교회에 컨테이너 하는 형제님이 많은 형제님을 데리고 있었는데 제가 갔을 때 월급도 주지 못하고 있었어요. 저에게 나왔을 때 "형제님, 컨테이너가 왜 문이 하나여야만 하죠? 두개는 안되나요? 옆으로도 날개처럼 열리게는 할 수 없나요? 다른 새로운 것을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그때 형제님은 "목사님, 그런 컨테이너는 없어요. 지금까지 본 적도 없어요." 이 형제님이 자기를 깨뜨리고, 자기 삶을 깨뜨리고 밑바닥까지 내려 가보지 않으면 이미 잘 살고 있을 때 망한 것입니다. 왜 형제님이 제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까? 형제님이 하고 있는 일들 속에 만족하고 있고 안일하고 느긋하게 있기 때문에 끝은 보지 않고 있으니까 죽은 삶인거에요. 지금은 그 일을 정리하고 다른 삶을 살고 있어요.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다른 사람의 말이 신청이 안되요. 지금 그 형제님은 그 때 제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어요. 바른 길을 인도해 주고, 제시해 주는데 자기가 잘 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마지막까지 내려가지 않아요. 하나님은 우리를 비워서 마지막 끝선에 세우셔요. 한강 다리 위에서 자살하려는 사람 중에 한 부류는 죽으려고 왔으니까 비관하고 뛰어서 죽어요. 다른 한 부류는 죽을 마음을 가지고 살면된다는 마음을 가지고 돌아가요. 현재의 위치에서 안일하고 자유롭고 이제 됐다는 위치에 머물면 얼마 가지 않아서 실패하는 삶을 살아요. 와스디가 처음 뽑히기 전에는 뽑히기 위해서 왕은 무엇을 좋아할까? 내가 어떻게 하면 좋아할까? 왕의 기색을 살피고 마음을 살펴서 왕의 편에서 생각했을거에요. 하지만 뽑히고 나서 더이상 왕의 편에서 생각하지 않았어요. 왜 지금은 폐위를 당할까? 한번 실수, 한번 거절했는데 왜 쫓겨 났을까? 하나님의 세계는 은혜의 세계입니다. 왕은 여러 사람을 불러서 규례와 법률을 들었어요. 와스디도 왕후가 되었을 때 규례와 법률을 알고 있었을 거에요. 그런데 그 규례와 법률이 와스디 마음에서 지워졌어요. 무엇이 그것을 지웠을까요? 왕후라는 자리 때문이에요. 왕이 왕후를 거절했어요. 187일동안 부르지 않았어요. 마지막날 불렀다는 것은 왕의 마음에 거절할 마음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왜 거절했을까? 거절하는 마음의 세계안에 들어가 본적이 없는 사람은 다시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하나님을 거절해요. 나를 옳은 사람으로,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는 거절하는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 볼 수 없어요. 와스디가 어디에 취해있었나? 자신의 아리따움에 취해있었어요. 왕이 원하는 아리따움은 겉으로 들어나는 지식, 용모, 센스, 사교성이었을까? 성경에서 왕은 하나님을 뜻하고,와스디는 나를 가리켜요. 하나님을 향하여 온마음, 성실, 충성하고 잘하면 내 마음을 받아줄까? 어떤 죄를 지어도 어떤 마음이 있어도 하나가 되지 못하는 마음은 거절되는거에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과 합하지 않는 마음을 제거하기 위해서 거절하는 것이지 우리를 버린 것이 아니에요. 187일 동안 아름다운 것에 취해있는 와스디의 마음을 제거하고 왕의 마음과 합한 마음을 만들기 위해서 왕은 와스디를 거절했어요.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게서 '오늘 밤 너희가 나를 부인하리라' 라고 하실 때 '저는 죽을찌언정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아름다운 것이었어요. 누가복음 5장에서 베드로는 고기, 그물, 배도 버리고 자식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어요. 예수님을 떠날 것같으면 왜 버리겠습니까? 베드로의 전부를 다 내놓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의 마음에 말씀이 들어가지 않는 것, 자기 마음에 맞는 마음은 받고 맞지 않는 것은 거절하고 있는 것은 거절하고 있는 마음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거에요. 하나님이 거절할 때 순응하지 못하고 반발하는 것은 자기가 얼만큼 한것이 있기 때문이에요. 연수, 나이에 붙어서 마음의 위치가 끝에까지 내려가지 않는 마음이 있어요. 내가 할 수 없는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 곳에 서니까 다시 은혜의 위치로 돌아왔어요. 와스디는 거절하는 왕의 마음도 모르고 결국 마음이 흐르지 않아서 폐위를 당했어요. 왕은 외형적인 아름다움을 원한 것이 아니라 와스디가 '왕이 불러주지 않으면 불쌍한 사람이구나!'를 알기를 바랬어요. 187일동안 거절하면서 왕후의 마음을 만들어 갔어요. 아무리 세상의 많은 지식과 학문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왕이 부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와스디는 몰랐어요. 잔치를 할때 나를 위하고 섬기는 사람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폐위가 될 때에는 아무도 그럴 도와주지 않았어요. 창세기 16장 1절~3절 이 성경을 놓고 부인회에서 자매님들께 물어봤어요. "사라가 하갈을 남편의 품에 넣어주었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했을까요?" 사라는 자신을 믿었어요. '하갈은 배신하지 않을꺼야'라는 사라가 보는 눈, 자신의 생각을 믿었어요. 성경에는 '사람은 다 거짓되다'라고 말하지만 사라는 이 말씀을 믿지 않고 자신을 믿었기 때문에 하갈을 남편에서 줄 수 있었던거에요. 그래서 고통을 당했어요.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초라한 혼인잔치가 있고, 46년동안 지은 화려한 성전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기 전까지 성전 안에는 소, 비둘기, 정한 짐승들이 당연한 듯이 있었어요. 예수님은 그 당연한 마음을 들어가셔서 엎으셨어요. 소는 성실을 의미하고, 양은 온순, 비둘기는 순결을 의미해요. 내 마음에 잘못된 부분은 인정하는데 성실하고 온순하고 순결했던 것을 간섭할때 반발하고 있어요. 결국 이 마음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하나님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을 엎어버려요. 주인이 되어서 판단하고 결정하고 생각할 수 있는데, 자기를 인정하는 세계가 만들어 진 것을 거절하는 왕의 마음을 모르니까 왕의 명이 크게 들리지 않아요. 성경은 우리를 가리킵니다. 와스디 마음에 말씀이 없어도 살아 갈 수 있는 마음이 구축되어 있어요. 창세기 4장에 가인이 세월이 지나는 동안 자신이 할 수 있다는 마음이 형성이 되면서 땅의 소산을 들고 나갔어요. 자기를 믿는 마음이 구축되어 있기때문에 어떤 소리도 듣지 않는 그 마음을 하나님은 저주하시는 거에요. 와스디는 왕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었는데 왕을 대적했어요. 내 마음에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되지 못한 것, 이것은 사탄인데 하나님께서 이 사탄을 몰아내려고 일하시는 거에요. 누구보다도 은혜를 입을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거절하시는 하나님 앞에 돌이키게 하시는 거에요.에스더 2장 16절에는 이끌림을 받는 삶이 나와요. 에스더의 이름은 많이 나오지만 에스더가 하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오랫동안 일 하는 사람으로 세워져서 무엇인가 된것처럼 자기를 높이니까 저주를 받아요. 포도원에 들여보내는 것이 주인의 마음입니다. '일할 수 없는 나같은 사람을 들여보내는구나!' 포도원에 들여보내는 자와 마음이 연결되면 한없이 행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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