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28) - 헬라 교부 요한(John) 크리소스톰
교회사(28) - 헬라 교부 요한(John) 크리소스톰
  • 이한규 목사
  • 승인 2013.07.11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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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로마 장군의 아들에서 신앙인으로
요한(John) 크리소스톰은 4세기 중엽 시리아의 세계적인 도시 안디옥에서 동로마 황제의 군대를 지휘하는 장군 세쿤투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안투사’는 스무 살에 남편을 잃고 자식을 기독교 신앙으로 키웠다. 그후 요한은 정치가이며 웅변으로 유명한 궤변론자 리바니우스에게서 법과 수사학을 배웠다.(리바니우스는 배교자 줄리안 황제가 기독교를 버리고 이교도주의를 회복하려고 했을 때 매우 좋아했던 이방인이었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요한을 빼앗아갔다고 했던 사람으로 요한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싶어했을 만큼 뛰어난 요한을 탐냈다)
요한 크리소스톰은 안디옥에서 변호사 개업을 한 뒤 가이사랴 사람 바질의 금욕생활에 큰 감화를 받았고, 한때는 아리우스파에 속하였다가 니케아 공회의 이후 안디옥의 감독인 멜레티우스와 교제하고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출세가 보장된 법률가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수도사가 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자식 하나 때문에 행복했기에 아들에게 자신의 생전에는 수도사가 되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다. 그래서 요한은 어머니를 모시며, 다소 사람 디오도레에게서 3년간 신학을 배우는 데 전념하며 교회에서 성구(聖句)를 낭송하는 자가 되었다. 다소의 디오도레는 니케아 신조의 지지자로 철학과 언어학과 조직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요한의 성경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는 안디옥 신학에 속해 있었는데, 안디옥 학파는 그 신학과 사상에 있어서 대체로 히브리적인 특색을 가졌다.

성경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던 설교
요한은 어머니 안투사가 죽은 후, 복잡한 도시를 떠나 남부 안디옥에 있는 산악지대로 들어가서 수도사 같은 삶을 살았다. 그곳에서 그는 신학 연구, 묵상, 기도로 6년을 보냈는데, 금식과 철야 등으로 건강을 많이 해쳤다. 훗날 그는 수도원 생활은 목회자 훈련으로는 적당하지 못했다고 저서에서 고백했다. 또한 수도자와 목회자를 비교하면서, 목회자는 수도사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구도생활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온 요한은 집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39세가 되던 해(AD 386)에 안디옥 교회의 목사 겸 수석 설교자로 임명받아 본격적으로 설교를 시작했다. 그가 설교하면 성경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서 그에게 ‘황금의 입(chrysostomus)’이라는 별명이 붙여졌으며, 그의 성경 주석은 안디옥 교회의 분위기를 쇄신시켰다. 그는 안디옥에서 12년간 수많은 명설교를 하였다.
요한 크리소스톰은 안디옥에서 교인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가 설교하던 중에 교인들의 박수갈채와 회개하는 마음으로 흘리는 눈물 때문에 설교가 자주 중단될 정도였다. 그의 강해 설교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회중들은 자발적으로 박수갈채를 보냈다. 하지만 그는 이것을 싫어했다. 그는 자신이 강단에 섰을 때 갈채를 받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그것은 ‘잠깐의 전율’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를 칭찬했던 많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그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수갈채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그것을 금지하는 것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설교자가 박수갈채에 대한 생각에 지배당한다면 자신뿐 아니라 회중에게 해(害)가 미쳐질 것입니다. 칭찬에 대한 열망 때문에 설교자는 그들에게 필요한 설교를 하기보다 그들을 즐겁게 해주려고 조심스럽게 설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줄기찬 설교와 교인들에게 영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개개인의 문제까지 세심히 돌아보는 목양 사역을 펼쳤다.  

콘스탄티노플 감독으로
콘스탄티노플의 감독 넥타리우스(Nectarius)가 379년에 사망하여 감독직이 공석이 되자 후계자 문제를 놓고 지저분한 싸움이 일어났다.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데오필루스는 자기 마음에 드는 인물을 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새 황제 아르카디우스는 무능했고, 황제의 측근으로 실세였던 유트로피우스는 요한을 감독으로 세우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가 안디옥에서 워낙 크게 존경을 받고 있어서 그를 데려오면 안디옥에서 폭동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안디옥 사람들 몰래 요한을 교외의 한 교회로 오게 한 후 마차에 태워 강제로 콘스탄티노플로 오게 하였다. 영문도 모르고 콘스탄티노플로 간 요한은 감독직을 거절하였지만, 주변 사람들에 의해 어쩔 수 없이 398년에 콘스탄티노플 감독직을 받아들인다.
콘스탄티노플에서도 그의 설교는 곧 시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그의 설교는 성경이 중심이었고 매우 대중적이었다. 그가 인도하는 콘스탄티노플 예배는 대성황을 이루었고, 그의 주변에는 그의 경건한 삶과 빼어난 설교를 좋아하여 개인적으로 그를 따르는 큰 무리가 모여들었다. 도시 내의 많은 이교도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기독교로 개종하기도 하였다.

개혁과 저항
콘스탄티노플은 부유하고 사치스럽고 음모가 가득한 도시였다. 수도(首都)의 총감독이 된 요한의 첫 번째 과제는, 궁중생활과 너무 밀착되어서 부패하고 타성에 젖어 있는 성직자, 수도원에 있지 않고 배회하는 수도자들의 삶을 개혁하는 것이었다. 그는 사치가 극에 달해 있는 제국의 수도에서 성직자들의 부패를 일소하고 관료들의 부패를 비판했다. 경건한 모양을 내면서 화려한 생활을 누리고 궁중에서 식객(食客) 노릇을 하는 자들, 뇌물로 감독이 된 자들, 신앙이 의심스러운 무자격 성직자들이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도록 경고했다.
독신 성직자들은 ‘영적 자매’라는 여자들을 데리고 동거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는데, 요한은 그들에게 성직자들의 집에서 나가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황후 ‘유독시아’가 과부의 재산을 탈취한 일이 있었는데, 요한은 이세벨을 예로 들어 설교했고, 이 설교는 황후를 공격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또한 성직을 매매한 6명의 지도자들을 황후의 뜻을 거슬러 가면서 면직시켰는데, 이 일로 황후와의 반목이 심해졌고 개인적인 적들도 많이 만들었다. 적대자들은 이 엄격한 감시자를 제거하고 옛 생활로 돌아갈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여러분이 언젠가 무덤에 눕게 되더라도, 여러분의 야망은 여러분과 함께 묻혀서 세인의 기억에서 사라지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나가는 행인들이 여러분의 큰 집을 볼 때마다 ‘저 집에는 많은 이의 눈물이 배어 있구나. 저 집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아들이 벌거벗었으며, 얼마나 많은 과부들이 해를 당하였고,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품삯도 받지 못하고 땀을 흘렸을까?’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톰은 그의 개혁에 불만을 품고 있던 수많은 상류층 사람들로 인해 사면초가에 처하였고, 결국 추방을 당했다. 유독시아 황후와 대적자들이 합세하여 요한을 제거한 것이다. 그 일에 앞장선 대표적인 인물은 알렉산드리아의 데오빌로였다. 403년 콘스탄티노플 근교 퀘르치아(Quercia)에서 개최된 감독회의에서 요한은 적대자들의 근거 없는 모략으로 고발되어 면직되었고, 유배되었다. 그는 이교도로 구성된 군인들에게 사로잡혀 어두운 밤중에 도시 밖으로 사라졌다.
위대한 설교자를 잃은 백성들은 울분을 품고 궁전을 습격하면서 요한의 귀환을 요구했다. 안디옥 시민들도 운집하여 “우리의 감독을 돌려 달라. 우리가 우리의 감독을 모시겠다. 황금의 입이 닫히는 것보다 태양 빛이 가려지길!”이라고 외쳤다. 때마침 거센 지진이 일어나 왕궁을 강타하고 시민들이 궁궐로 몰려가서 격렬한 항의 시위를 벌이자, 황후는 이를 하나님의 분노라고 여겨 당황하여 요한을 다시 불러들였다.

추방과 죽음
유배지에서 돌아온 요한은 자신을 공격했던 자들이 세속적인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금했다. 또한 유독시아 황후의 동상을 예배당 바깥에 세우려는 계획에 반대했다. 그의 대적자들은 다시 그의 설교 내용을 과장해서 황후에게 고했다. 요한은 “헤로디아는 이제 다시 한 번 춤을 추고 있으며, 한 번 더 요한의 목을 달라고 요구하는구나!” 하고 외쳤다. 요한은 다시 황후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에서 ‘쿠크수스’로 추방당했다. 그가 추방당하자 폭동이 일어났고, 그를 만나려는 신자들의 순례 행렬이 계속되었다. 황제는 요한의 유배지를 흑해 연안에 있는 미지의 춥고 험한 숲 속으로 옮기라고 명령을 내렸다. 유배지로 가던 중 요한은 중병에 걸려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병사들에게 길 옆에 있는 조그마한 교회에 옮겨줄 것을 부탁했다. 그는 그곳에서 성찬을 나눈 후, 자신을 둘러싼 이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모든 일에 있어서 영광은 하나님께만. 아멘!”이라고, 그의 생애에서 가장 짧으면서도 가장 뛰어난 설교를 했다고 전해진다.

양떼를 사랑했던 요한
요한 크리소스톰의 일상은 단순하고 절제된 삶이었다. 그는 검소했고 맨바닥에서 잤으며, 소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최고의 감독에게 주어지는 엄청난 물질과 명예와 권세에 사로잡히고 싶지 않아서 그는 스스로 그것들로부터 자유하는 훈련을 하였던 것이다.
그는 “성직자의 사역은 말씀의 사역이다”라고 정의하며, 성직자가 사역을 하는 유일한 방법은 말씀으로 사역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무엇보다 심각하게 침체된 교인들의 심령을 회복시키려고 애썼고, 실제로 그의 설교 말씀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심령에 활력을 되찾았다. 그는 엄격하면서도 따뜻한 애정과 소망으로 성도들을 대했다. 때로 청중들을 꾸짖은 후에 이렇게 말했다.
“오늘 여러분을 너무 심하게 꾸짖었나 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제 마음이 몹시 아픕니다. 제가 이런 식으로 말씀 드린 것은 여러분을 미워해서가 아닙니다. 여러분에 대한 염려 때문입니다. 이후로는 좀 더 부드러운 어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 여러분이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것을 압니다. 자신의 죄가 큰 것을 깨닫는 것이 덕행으로 가는 첫걸음입니다.”

그의 메시지들
다음은 요한 크리소스톰이 전한 설교 말씀들 중의 한 대목들이다.
“우리는 형벌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모든 죄악을 멀리 던져버렸습니다. 우리는 위로부터 다시 태어났습니다. 우리의 옛 인간적 본성은 땅에 묻혔고, 우리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우리는 다시 이름지어졌고, 거룩하게 되었으며, 양자로 택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았으며, 독생자의 형제들이 되었고, 그분과 더불어 공동 상속자가 되었으며, 같은 몸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성경의 보화로 영양을 공급해주지 않고는 하루라도 그냥 지낼 수가 없습니다.”
“당신의 온 마음은 당신이 시민으로 있는 나라를 향하도록 하고, 당신의 행동은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다워야 합니다.”
“사역자는 교인들이 칭찬한다고 해서 우쭐해서도 안 되고, 비난한다고 해서 낙심해서도 안 됩니다. … 칭찬받을 욕심으로 설교하는 자가 받게 되는 괴로움과 고통은 … 풍랑 없는 바다가 없듯이 그는 근심과 걱정에서 헤어날 수 없게 됩니다.”
“부자란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주는 것입니다. … 우리는 우리 집을 가꾸기보다는 우리 영혼을 가꿉시다. … 여러분의 집이 여러분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이 세상을 떠날 때 함께 가지고 갈 것입니까? … 필요 이상의 것들은 불필요하고 쓸데없습니다. … 여러분은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해서는 이방인이요, 나그네입니다. 여러분의 본향은 하늘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부(富)를 그곳으로 옮기십시오. 부자가 되기를 원합니까? 하나님을 여러분의 친구로 삼으면 여러분은 모든 사람보다 부요할 것입니다.”
그는 후세에 학자, 설교자, 수도자로 높이 추앙받는 한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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