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신앙의 가장 큰 방해꾼 영적 옳음
[설교] 신앙의 가장 큰 방해꾼 영적 옳음
  • 글 | 김재홍 (기쁜소식인천교회 목사)
  • 승인 2020.08.07 20: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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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호 기쁜소식
옳음에서 벗어나 영의 세계로 (15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애굽에서 나온 뒤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보호와 인도를 받으며 광야 길을 걸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살았지만 광야에서 자주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민수기 21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길로 인해 상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상하자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고, 하나님은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불뱀에 물려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자 그제서야 그들이 마음을 돌이켜 모세 앞에 나와서, 잘못했으니 불뱀들이 떠나가게 하나님께 간구해 달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기도하자 하나님이 불뱀을 떠나가게 해주신 것이 아니라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서 장대 위에 달라’고 하며 그것을 쳐다보면 산다고 하셨습니다.

불뱀에게 물린 자들이 쳐다보면 살았던 놋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로 인해 마음이 상했다고 했는데, 마음이 상하는 원인은 마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약한 사람은 어떤 일에도 자주 마음이 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니까 마음이 늘 상하고, 불평하며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약해진 근본 원인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으로 사는 좋은 삶을 주려고 그들에게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불뱀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그들이 마음을 돌이켜 ‘우리가 잘못했으니까 불뱀을 우리에게서 떠나가게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불뱀이 떠나가면 삽니까? 물리지 않은 사람은 살 수 있는지 모르지만, 이미 물린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말씀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 더 좋은 길을 주셨습니다. 불뱀을 만들어서 장대 위에 달고, 불뱀에게 물린 자마다 그것을 쳐다보면 산다고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민 21:8)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모세가 놋으로 불뱀을 만들어서 장대 위에 달았습니다. 이제 불뱀에게 물린 사람들이 자신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그것을 쳐다보면 삽니다. 뱀에게 금방 물렸든지, 물리고 시간이 흘러 독이 온 몸에 퍼져서 몸이 뻣뻣하게 굳어 죽어가든지와 상관없이 놋뱀을 쳐다보면 삽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민 21:9)
믿음의 세계는 참 신기합니다. 성도들의 마음에 ‘나에게 있는 신앙 문제가 하루 이틀 된 문제가 아닌데 이것이 어떻게 금방 해결될 수 있겠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오래된 병은 치료하기 힘든 것처럼 신앙의 문제도 오래된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에서는 ‘불뱀에게 물려서 얼마나 오래되었느냐? 지금 상태가 얼마나 심각하고 위중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놋뱀을 쳐다보느냐, 쳐다보지 않느냐가 중요합니다. 지금 상태가 아무리 심각해도 놋뱀을 쳐다보면 사는 것이고, 놋뱀을 쳐다보지 않고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앉아 있으면 죽는 것입니다. 불뱀에게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놋뱀을 쳐다보아,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와 상관없이 살아나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이제는 놋 조각에 불과한 놋뱀
놋뱀은 뱀에게 물려서 죽어가던 사람들에게 생명과 같은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음에서 건진 너무나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놋뱀에게 분향했는데, 그것이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뒤 사사 시대를 거쳐 열왕 시대까지 이어졌습니다. 히스기야가 왕이 된 후, 하나님을 떠나 어지럽고 망한 나라를 바로잡는 일을 했는데 그때 놋뱀을 부수는 일도 했습니다.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왕하 18:4) 히스기야 왕이 놋뱀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고 일컬었는데, ‘느후스단’은 ‘놋 조각’이라는 말입니다. 놋뱀은 놋 조각에 불과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그때까지 놋뱀에게 분향했습니까? 하나님으로 말미암았고,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한 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사람들이 놋뱀에게 분향함으로 인해 하나님께로 향해야 하는 마음을 놋뱀이 가로막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사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왕이 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며 살았는데, 마음이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 놋뱀에게 분향하는 것 또한 또 다른 우상을 섬기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놋뱀을 깨뜨려야 했습니다. 놋뱀이 전에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냈지만 이제는 놋 조각에 불과한 것으로 버려져야 했습니다.

한때 영적이었던 자신을 마음에서 떠받들고 사는 성도들
구원받은 성도가 한때 영적이었을지라도 지금 마음이 세상에 가 있고 육신을 따르고 있으면 전에 하나님과 가까웠던 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이 영적이었던 때를 자기 신앙의 위치로 잡아놓고 있습니다.
사진을 찍으면 사람들이 대부분 마음에 안 들어 합니다. 사진은 찍는 각도나 조명에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찍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생김새가 많이 달라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사진을 보고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이유는, 가장 멋있게 나온 자신의 사진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아주 좋은 조명 아래서 아주 좋은 각도로 찍힌 모습을 자신의 모습이라고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와 다르게 찍힌 사진을 보면 대부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가장 아름다웠을 때의 모습을 자기 모습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신앙생활에서도 성도들이 자신의 신앙이 가장 좋았을 때가 자기 신앙의 위치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육신의 욕구를 따라 살고,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복음에 관심이 없고 주님을 섬기는 일에 인색할지라도 마음의 위치는 여전히 영적인 위치에 둡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놋뱀에게 분향했듯이 오늘날도 구원받은 많은 성도들이 그와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한때 영적이었던 자신을 마음에서 붙들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갈등들이 대부분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자신의 신앙에 현재의 모습과 다른 높은 점수를 주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부딪힘이 일어납니다. 지금은 마음이 육신을 따르고 주님과 멀어져 주님을 섬기는 데에 인색하면서도 교회가 하는 일을 판단하고 지체들을 업신여기고 무시합니다.
놋뱀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고 한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한 정말 귀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놋 조각에 불과한 것처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때 영적이었던 것도 깨뜨려지고 버려져야 할 놋 조각에 불과합니다. 한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는 생명의 길이었다는 것이 지금 뭐가 중요합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산당에 가 있고 아세라 목상을 비롯해 우상을 섬기며 살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놋뱀을 부수어 그것이 놋 조각일 뿐임을 드러내야 했습니다.
성도의 마음에 이전에 영적이었던 것이 옳음으로 작용합니다. 놋뱀이 사실은 우상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받들었던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을 섬겼던 것, 주님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했던 것, 믿음으로 주님의 역사를 경험했던 것, 복음의 일에 쓰임 받았던 것 등등이 우리 마음에서 놋뱀처럼 떠받들려 있습니다. 그것이 내가 옳다는 옳음을 만들어냅니다. 이처럼 지난 날 주님을 섬기고 복음을 위해 일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던 것들이 버려지지 않으면, 이것이 우리 마음에 우상으로 작용해서 수많은 영적인 것을 가로막는 일을 합니다.


미갈이 다윗을 업신여길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부분을 잘 보여 주는 대표적인 인물이 사울 왕의 딸 미갈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이스라엘의 영웅이 된 후 미갈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미갈은 아버지 사울이 장차 다윗이 왕이 될 것을 두려워해 다윗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아버지와 남편 사이에서 갈등해야 했습니다. 아버지를 위하면 남편을 대적하는 것이 되고, 남편을 위하면 아버지를 대적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때 미갈이 다윗 편에 서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할 때 아버지를 속이고 다윗이 도망가게 해주었습니다.
“사울이 사자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어 그를 지키다가 아침에 그를 죽이게 하려 한지라. 다윗의 아내 미갈이 다윗에게 일러 가로되 ‘당신이 이 밤에 당신의 생명을 구하지 아니하면 내일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미갈이 다윗을 창에서 달아 내리우매 그가 도망하여 피하니라.”(삼상 19:11~12)
또한 다윗이 침상에 누워 있는 것처럼 꾸민 후, 사울이 보낸 사람들이 다윗을 잡으려고 할 때 병들었다고 거짓말하여 다윗이 도망갈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벌어 주었습니다.
미갈이 다윗 편에 서기는 했지만 다윗과 함께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다윗과 점점 멀어졌습니다. 나중에는 사울의 뜻으로 발디엘이라는 남자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세월이 흘러 사울이 죽고 다윗이 왕이 된 후, 다윗은 먼저 미갈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미갈은 피 값으로 산 아내였기 때문입니다. 그때 미갈의 남편 발디엘이 울면서 바우림까지 따라왔습니다. 미갈이 아버지 사울이 결혼시켜서 어쩔 수 없이 발디엘과 산 것이 아니라 자신도 발디엘에게 마음을 주고 살았던 것입니다. 만약 미갈이 발디엘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면 발디엘이 ‘왕이 시켜서 결혼했지만 우리가 진짜 부부였던 적이 있냐? 잘 가라!’ 하고 돌아섰을 것입니다.
미갈이 한때는 다윗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바쳐서라도 다윗을 구해야겠다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 후로는 다른 남자에게 빠져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미갈의 마음에서는 자신이 다윗을 구했을 때를 자신의 위치라고 여겼습니다. 다윗이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미갈을 버린다고 누가 욕하겠습니까? 다윗이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서 미갈을 데려왔는데도 불구하고 미갈은 다윗을 업신여겼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삼하 6:16)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모셔 와야 하는데, 전에 수레에 싣고 오다가 웃사가 죽는 일이 생겨 그만두었습니다. 그 뒤에 마음이 다시 일어나서 이번에는 궤를 메고 오면서 너무 기쁘고 마음이 충만해 뛰놀며 춤을 추었는데, 미갈이 그 모습을 보고 다윗을 업신여긴 것입니다.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삼하 6:20)
미갈은 다른 남자와 살았던 여자인데 다윗을 판단하거나 업신여길 수 있습니까? 다윗이 하나님의 궤가 들어와 너무 기뻐서 춤을 추다 속살이 좀 드러난 것이 무슨 허물이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미갈은 ‘왕이란 사람이 체통 없이 계집종 앞에서 몸이 드러나도록 춤을 추냐?’ 하며 다윗을 업신여겼습니다. 미갈이 그처럼 다윗을 업신여길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한때 사울 편에 서지 않고 다윗 편에 서서 다윗을 구해주었던 것이 마음에 옳음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버려져야 할 느후스단이 미갈의 마음에서 제거되지 않으니까 그 옳음이 다윗과 연합하는 것을 방해하고 다윗을 업신여기게 만든 것입니다. 그로 인해 다윗과 함께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는 복된 위치에 있었던 미갈이 불행해졌습니다.
미갈이 불행해진 것은 그가 무엇을 잘못했거나 부족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기가 다윗을 위했다는 것, 그 옳음을 버릴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신앙생활을 못해서가 아닙니다. 자기 신앙의 위치를 잘못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장 영적이었을 때의 위치에 마음을 두고 신앙생활을 하니까 교회에서 자신을 대하는 것이 마음이 안 드는 것입니다. 현재 자신의 모습은 형편없는데도 미갈처럼 이전에 잘했던 것을 자신의 모습이라고 여겨 자기를 높여 놓았기 때문에 교회나 지체들을 판단하고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영적 옳음을 가지면 가장 육신적이면서 교회와 종을 대적할 수 있다
구원받고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복음과 주님을 위해 한 일들, 교회를 위해 희생하며 섬긴 일들이 많아집니다. 이런 것들이 마음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영적인 옳음으로 작용합니다.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난 이후에 생긴 선악의 기준에서 나온 옳음이 아닌, 교회 안에서만 생기는 영적인 옳음이 있습니다.
미갈은 다윗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육신에 푹 젖어 산 사람이었지만,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며 기뻐서 춤을 추는 다윗을 업신여겼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육신적인 사람이 가장 영적인 사람을 판단하고 업신여기며 대적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탄이 그렇게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사탄이 미갈의 마음에 ‘내가 아버지 편에 서지 않고 다윗 편에 서서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고 했을 때 목숨을 걸고 다윗이 도망가도록 창에서 달아내려 주었고, 시간을 벌어 주었어. 내가 아니었으면 다윗은 그때 죽었을 거야’라는 옳음을 넣어주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미갈이 다윗을 돕지 않았다면 다윗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었을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자신은 육신에 빠져 지내면서도 교회나 하나님의 종을 판단하고 비판할 수 있는 것은 사탄이 그 마음에 옳음을 넣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옳음을 가지면 자신이 가장 육신적인 삶을 살면서도 교회를 대적하고 하나님의 종을 대적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한때 주님과 복음을 위해 일했다는 영적인 옳음이 마음에서 버려지지 않으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교회나 하나님의 종과의 연합을 가로막고 대적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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