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고운 가루에 기름을 붓고
[설교] 고운 가루에 기름을 붓고
  • 글 | 박옥수(기쁜소식강남교회 목사)
  • 승인 2021.04.05 0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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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호 기쁜소식
믿음에 이르는 길_레위기 제사 강해_소제(2편)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다 버린 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 그것이 고운 가루에 기름이 부어져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소제물이 되는 삶입니다. 

 

레위기 2장에는 ‘고운 가루’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거기에 함께 나오는 단어가 ‘기름’입니다. 하나님은 소제의 예물을 드릴 때 반드시 기름을 섞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기름이라는 단어를 자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말도 나옵니다. 기름 부음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이나 선지자나 왕을 세울 때 그 사람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은 성도 또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 표현됩니다. 성경에서 기름은 바로 ‘성령’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하나님과 다른 마음이 들어오면서부터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거리감을 전혀 느끼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과 아담의 뜻이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하지 말라고 하신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하실 때 아담의 마음도 그 말씀과 같은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과 지내는 것이 아주 자유로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는 뱀의 말을 듣고,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어서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서면 좋겠다는 마음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열매를 따먹자마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생각이 달라지고, 보지 못했던 것을 보는 눈이 뜨였습니다. 벌거벗은 모습이 보이면서 부끄러움과 두려움, 슬픔이 찾아왔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두려움이나 슬픔이나 고통이 찾아왔다는 것은, 그들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방향에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오늘 누구든지 자신의 생각이 하나님과 같고 자신의 뜻이 하나님과 같다면 신앙생활을 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염려하고 두려워하겠습니까? 우리가 두려워하거나 근심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을 이루려고 하거나 얻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과 같다면 내가 염려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목적을 성취하려고 하니까 인간의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근심해야 하고, 자신이 슬퍼해야 하고, 자신이 두려워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난 뒤 갖게 된 생각은 하나님이 주신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범죄한 뒤의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 하나님과 다른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자신들이 벌거벗은 것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한 번도 갖지 않았던 이상한 생각과 감정들이 아담과 하와의 마음에서 생겨났습니다. 미움이 일어나고, 자신을 가리려고 거짓말을 하려는 생각이 올라왔습니다. 시기, 탐욕, 음란이 마음에 자리 잡았습니다. 인간은 그런 생각들에 이끌려 죄악 속에서 어둡게 살아야 했습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에 미움이나 거짓이나 두려움이나 음란한 마음을 넣지 않으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당신이 싫어하시는 마음을 인간의 마음에 넣으셨겠습니까?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왜 거짓말을 하는지, 왜 더럽고 가증한 마음을 품는지, 왜 두려워하는지, 왜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잘못하고 있는 것을 고치려고 합니다. 그 생각을 따라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교회 일에 마음을 쏟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해도 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 사탄에게 이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 사실을 가르쳐 주려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전부 좋아 보이는 계명들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을 때, “이런 법은 나쁩니다. 우리가 지켜서는 안 됩니다.”라고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두 ‘좋은 법이니 마땅히 지켜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율법을 지키려고 하니 아무도 지킬 수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해도 속에서 일어나는 강한 유혹에 이끌려 죄를 짓게 됩니다. 거짓말하기 싫어도 거짓말하고, 간음하기 싫어도 음란한 죄를 짓고 마는 가련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서 죄에 종노릇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새 마음을 주시려는 하나님 
하나님은 율법이 아닌 새 언약을 세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렘 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

인간의 마음에 사탄의 마음이 들어와서 인간이 죄에 빠지고 더러워졌습니다.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은 인간에게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어기면 저주를 받는다’는 옛 언약이 아닌 새 언약을 세우시려는 것입니다. 그 언약은 하나님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영을 인간의 마음에 부어주어서 인간을 새롭게 하려는 언약입니다. 인간이 더 이상 공중의 권세를 잡은 사탄에게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이끌림을 받게 하려는 언약입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을 주관하시면 그때부터 우리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죄와 함께 살다 보면 우리 마음이 죄에 정착되어 죄와 함께 사는 것이 자연스러워집니다. 거짓말하는 것이 쑥스럽지 않고,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도 자연스러워집니다. 하나님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는 당신과 함께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내고, 성경을 읽고, 교회에서 봉사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우리 마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
레위기 2장에는 “고운 가루에 기름을 부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기름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곡식이 고운 가루가 되어도 기름이 더해지지 않으면 하나님께 드릴 소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다 깨뜨려진 뒤, 사탄이 역사하는 더러운 마음을 고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새 마음이 들어와야 합니다. 가루처럼 자신의 형체를 잃은 마음에 성령이 들어와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계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러나오는 찬송과 감사, 성령으로 말미암는 간증과 기도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십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승천하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4~5)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불러 3년 동안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그들의 생각은 예수님의 생각과 너무나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한 예로,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날이 오길 바랐기에 그 이야기 듣는 것을 무척 싫어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예수님이 늘 말씀하시더니 정말 죽으셨구나. 그렇다면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실지도 모르겠다.’ 이 정도는 생각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살아나실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는커녕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해도 믿지 않았습니다.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해도 ‘내 손을 그 못 자국에 넣어보기 전에는 못 믿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나 야고보나 요한에게 기대를 두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의 마음에 성령이 임하셔서, 성령께서 그들을 바꾸실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제자들이 잘못하거나 믿음 없이 행하는 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웠던 아담과 하와가 사탄에게 이끌림을 받았을 때 그들이 달라졌듯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죄를 짓던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면 우리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물고기를 잡으러 갈릴리로 다시 간 베드로지만, 성령이 임하면 그가 변화될 줄을 예수님은 분명히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기대를 두지 않고 하나님의 성령에 기대를 두셨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이 소제물이 되는 삶
성령은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에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요한과 야고보에게, 그리고 다른 모든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이제 그들에게는 옛날과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외형적으로 볼 때에는 갖추어진 것이나 제대로 된 제도가 없지만, 그들의 모임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교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다 버린 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 그것이 고운 가루에 기름이 부어져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소제물이 되는 삶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옛날에 사탄에게 이끌림 받았던 것처럼 이제는 성령에게 이끌림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죄 사함을 받지 못한 사람은 마음에 성령을 모실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성령 충만을 외쳐도 그 마음에는 성령이 임하실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먼저 죄 사함을 받아 마음에 성령을 모신 뒤,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참된 성도의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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