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행위를 좇는 사람들과 율법의 참 목적
[설교] 행위를 좇는 사람들과 율법의 참 목적
  • 글 | 김종호(미얀마, 기쁜소식양곤교회 선교사)
  • 승인 2022.11.15 15: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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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호 기쁜소식
CLF 강연 | 율법의 행위와 값없는 은혜_3강

 

2022년 7월, 부산에서는 60여 개국에서 온 500여 명의 목회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CLF(Christian Leaders Fellowship) 컨퍼런스가 6일간 열렸다. 매일 오전에는 주제 강연이 이어졌는데, 강연 주제는 ‘율법의 행위와 값 없는 은혜’, ‘성막에서 드린 제사와 그리스도의 구속’, ‘놀라운 성경의 예언’, ‘진정한 회개와 자백’ 등이었다. 그 가운데 김종호 목사가 ‘율법의 행위와 값 없는 은혜’를 주제로 컨퍼런스에 참석한 목회자들에게 강연한 내용을 요약하여 4회에 걸쳐 소개한다.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은 물론 목회자들도 ‘율법의 행위’와 ‘하나님의 은혜’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해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김종호 목사는 율법과 은혜에 대하여 쉽고 명쾌하게 설명해 정확한 영적 삶의 길을 제시한다.

 

사도행전에 보면, 오순절에 성령이 임한 뒤 사도들과 성도들이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예루살렘에서만 전하다가, 큰 핍박이 일어나 성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여러 곳으로 흩어지면서 이스라엘 땅 곳곳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더러는 이스라엘을 떠나 복음을 전해 이방인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 소식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내 교회를 인도하게 했습니다. 바나바는 다소에 있던 바울을 데리고 와서 두 사람이 안디옥 교회를 인도했습니다. 그 후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보냈습니다.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전도여행을 떠나 많은 사람이 구원받는 역사를 이루고 돌아와서 안디옥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이야기했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그즈음 유대에는, 예수님을 믿어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율법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어 교회가 형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안디옥 교회로 가서, 성도들에게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행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로 인해 바울과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할례를 받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유대인들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할례를 받아야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들로 여겼습니다. 그것이 마음에 뿌리박혀 있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안디옥까지 가서 이방인 성도들에게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쳐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고, 다툼이 해결되지 않아 바울과 바나바와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도 율법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행 15:5)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 모였고, 많은 변론이 있은 후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의논을 마친 뒤 두 사람을 택해 그들 편에 교회의 뜻을 담은 서신을 안디옥 교회에 보냈습니다. 
“…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행 15:23~24)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그 편지를 읽고 기뻐했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구약 성경에 하나님이 명하신 것들이 많습니다.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고, 유월절과 초막절 등 절기들을 지키라고 하셨으며, 안식일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그림자였습니다. 사람의 그림자는 사람의 형태를 나타내지만 실제 몸은 아닙니다. 몸은 따로 있습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17)
먹고 마시는 규례, 절기, 월삭, 안식일 등은 그림자고 실제 몸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할례 또한 그림자입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롬 2:28~29)
몸에 하는 할례는 그림자이며, 실제 할례는 마음에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도 하나님이 마음의 할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렘 4:4)
하나님은 몸에 행하는 표면적 할례를 통해 마음에 행하는 이면적 할례를 가르쳐 주길 원하셨습니다. 할례로 남자 생식기의 불필요한 끝 부분을 잘라내는 것처럼, 구원받은 사람이 성령의 인도가 아닌 자기 생각 등 육신에 속한 것을 베어내는 것이 진짜 할례입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골 2:11)
유대인들은 몸에 할례를 받았지만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해 이면적 유대인이 되지 못했습니다. 겉은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은 되지 못했습니다. 

죄를 깨닫게 해주는 도구, 율법
유대인들은 할례를 행하는 것은 물론 모세가 준 율법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하나도 어기지 않고 완벽하게 지켜야지, 하나라도 어기면 저주를 받습니다. 세상에 율법을 완벽하게 지킨 사람이 있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지키지 못할 율법을 주셨습니까? 그것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오래 전 제가 충남 당진에서 목회했을 때의 일입니다. 세 살쯤 된 아이와 함께 교회에 자주 오는 젊은 부인 자매가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자주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병명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큰 대학병원에서도 병명을 찾지 못했습니다. 아이가 아파서 음식을 잘 먹지 못하고 너무 힘들어했습니다. 하루는 집 근처에 있는 작은 병원에 갔는데, 의사 선생님이 전신 엑스레이를 한번 찍어보자고 했습니다. 아이 몸을 엑스레이로 찍었습니다. 
얼마 후, 의사 선생님이 아이 엄마에게 100원짜리 동전을 하나 가져오라고 한 뒤 말했습니다. “아주머니, 여기 보세요.” 엑스레이를 보니 아이 목 부분에 새카맣게 보이는 동그란 것이 있었습니다. 그 위에 100원짜리 동전을 올려놓으니 크기가 딱 맞았습니다. 아이 목에 동전이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의사 선생님이 큰 병원에 가면 수술하지 않고 동전을 빼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큰 병원에 가서 아이 목에 있던 동전을 빼내서 보니 빨갛게 녹이 슬어 있었습니다. 
엑스레이를 찍어서 사진을 보니 목에 동전이 걸려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엑스레이를 계속 찍으면 그 동전이 밖으로 나옵니까? 엑스레이는 아무리 찍어도 치료는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동전이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줄 뿐 꺼내주지는 못합니다. 엑스레이는 진단하는 도구지, 치료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치료는 다른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게 해주는 도구가 아닙니다. 율법을 가까이하면 신앙생활을 잘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깨우쳐 주는 일을 합니다. 사람들이 죄인이면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니까, 하나님이 율법을 주어 사람들에게 죄를 깨우쳐 주려고 하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이런 법들을 마음에 두고 그대로 하려고 하면 그렇게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더러운 죄를 마음에 품고 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율법이 우리 속에 있는 미움, 음욕, 탐심 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나는 저 사람보다는 괜찮아. 나는 선한 것이 좀 있어.’ 등등의 생각을 품고 삽니다. 율법 앞에 제대로 서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 앞에 서보면 자기 마음에 있는 죄가 드러나 입을 다물고 아무 소리도 못 하게 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 3:19)
체중계에 올라가면 몸무게를 알 수 있고, 키 재는 기계에 올라가면 키가 얼마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처럼 율법 앞에 서면 ‘내게는 선한 것이 없구나, 나는 악할 뿐이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율법으로 정확히 재봐야 합니다. 율법 앞에 서본 뒤 자신이 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이 말한 대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우리 마음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뿐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든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든,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인간에게는 선한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실을 깨우쳐 주려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선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뒤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면, 신앙생활이 완전히 새로워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구원받아도 육신에서 나오는 것은 여전히 악할 뿐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착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율법에 비추어보아 착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진실하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사람은 없습니다. 로마서 3장 4절에서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다 거짓됩니다. 
유리컵에 탁한 물을 붓고 가만히 놔두면 앙금 같은 게 가라앉습니다. 하루이틀 지나면 물이 깨끗하게 보입니다. 바닥은 보지 않고 물만 보면 깨끗한 물 같습니다. 그러나 컵에 젓가락을 넣어 휘저으면 가라앉아 있던 것들이 위로 올라와 다시 뿌옇게 됩니다. 
결혼한 부인들이 ‘처녀 때에는 착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남편 만나서 악해졌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처녀 때에는 곱고 부드러웠던 자신이 못되거나 무능한 남편을 만나 고생하다 보니 거칠고 사나워졌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남편을 잘못 만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처녀 때에는 악한 것들이 가라앉아 있어서 깨끗한 줄로 알았다가 남편이 젓가락이 되어 속을 휘저어 온갖 것들이 다 올라온 것입니다. 
구원받아도 육신에서 나오는 것은 여전히 악할 뿐입니다. 선한 것은 하나님에게서만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따라 사는 것이 선하지, 우리 육신에서는 선한 것이 결코 나오지 않습니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간 탕자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며 돌아갈 때
우리가 회개해야 합니다. 잘못한 것을 고백하며 용서해 달라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선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자신을 믿고 기대하고 살았던 데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 느낌, 감정을 믿고 산 데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진리구나! 내가 내 생각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믿어야 하는구나!’ 
성경에서 회개한 대표적인 인물이 탕자입니다. 탕자는 아버지보다 자신이 옳다고 여겨 받은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갔습니다. 탕자는 자신을 믿었지만 실제로는 허랑방탕해 재산을 다 탕진했고, 돼지 치는 일을 하며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주린 배를 채우려 했습니다. 탕자가 비참하게 지내다가 마음에서 돌이켰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 15:17) 아버지가 옳고, 아버지와 다른 마음을 가졌던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자신을 믿고 살았던 삶을 후회하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눅 15:19~20)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탕자가 허랑방탕하게 살아 비참하게 되었던 것처럼, 우리가 율법 앞에 서면 형편없는 자신을 알게 되어 비참해집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 3:19)
우리가 악할 뿐임을 발견하고 심판 아래 있는 자신을 알게 될 때, 탕자가 돼지우리에서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며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만나며, 누구에게나 값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얻게 됩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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