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맑은 수채화
젊은 날의 맑은 수채화
  • 박민희 편집장
  • 승인 2014.06.04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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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 성도를 찾아서_허소영 사모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나도 그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다
1976년, 대전에서 구원받은 한 자매가 경산 조폐공사로 전근을 간다. 그리고 얼마 후, 박옥수 목사는 대전의 어느 형제에게서 그 자매에게 찾아가 신앙 교제를 부탁한다는 전화를 받는다. 그 일을 시작으로 ‘경산 조폐공사 성경공부’ 모임이 탄생한다.
허소영 사모가 구원받을 즈음은 조폐공사 성경공부 모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던 때였다. 허 사모가 구원받은 이야기부터 들었다.
“저는 서울에서 살았는데, 여고를 졸업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에 가지 못했어요. 당시 조폐공사 청장님이 할아버지의 친구 분이어서 할아버지의 부탁으로 경산 조폐공사에 입사했어요. 1979년이었지요. 외지에서 사는 직원들은 기숙사에서 생활했는데, 한 방에 세 명씩 지냈어요. 제가 지냈던 방의 큰언니가 구원받은 정귀자 자매님(말라위 김성경 선교사의 어머니)과 친구였는데, 하루는 정 자매님이 우리 방에 놀러와서 친구에게 전도하는 것을 옆에서 들었어요. ‘내 마음에 하나님이 살아 있다’고 하는 정 자매님의 이야기가 신선하게 들렸어요. 저는 종교에 관심이 없었지만 다음 주 일요일에 교회에 따라갔지요.”
여러 번 교회에 가고 구원받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성경 말씀도 들었지만, 알아듣지 못했다는 허소영 사모. 결국 교회와 멀어지게 되었다. 그 후 집안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찾아오자 하나님을 찾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한다.
“어려움을 만나니까 하나님이 기억났어요.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그 하나님을 나도 만나고 싶었어요. 마음이 힘들어서 성경을 읽다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는 구절이 눈에 들어왔어요. 또, 히브리서 4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는 구절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명언이나 격언이 아니라 살아 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어린 나이에 세상 짐을 다 짊어진 것처럼 고민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는구나’ 하고 말씀이 마음에 자리 잡았어요.”
그 후로 허소영 사모는 다시 성경공부 모임과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얼마 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로마서 8장 말씀이 마음에 밝은 빛으로 들어와 그의 마음에서 모든 죄악과 어두움과 세상짐을 몰아냈다.

 
예배당이 있던 파동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반월당이라는 곳까지 가서 그곳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영남대학교 정문에서 내린 후, 몇 킬로미터를 걸어가면 조폐공사가 나왔다. 조폐공사는 특수 지역이라 외부인이 들어갈 수 없기에 일을 마친 자매들이 밖으로 나왔다. 성경공부를 마치면 막차를 타고 대구로 돌아오는데, 버스정류장까지 2킬로미터 정도의 숲길을 걸었다. 캄캄한 밤하늘에 별들이 빛나는데, ‘오늘은 옥희가 죄 사함을 받았다! 다음주에는 소영이가 죄 사함을 받을 것 같아!’ 하며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집에 돌아오면 거의 밤 12시가 되었다. 마지막 버스에서 내려 집에 뛰어올라가면 아내가 문 밖에서 꾸벅꾸벅 졸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사람은 내 속에 가득한 이 기쁨을 알까? 이 행복을 알까? 아내에게도 내가 가진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면 많은 어려움들을 이겨낼 텐데….’ 나는 아내에게 그날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우리는 함께 기뻐하며 잠이 들었다. (박옥수 목사의 간증 중에서)

구원받은 후 허소영 사모에게 교회와 조폐공사 성경공부 모임은 삶의 전부였다. 당시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했던 박영숙(현재 기쁜소식부천교회 김태호 목사 아내), 정귀자, 김귀자(현재 기쁜소식상주교회 오상균 목사 아내) 자매 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즐거웠다.
“우리는 친자매보다 더 가까웠어요. 늘 함께 기도하고, 함께 성경 읽고…. 마음이 하나로 흐르다 보니 웃을 일도 많았어요. 별일 아닌 것에도 깔깔거리며 웃고 즐거워했지요.”
박옥수 목사가 성경공부 모임을 인도하러 올 때면 자매들은 같은 방을 쓰는 동료들이나 입사 동기 친구들을 모임에 데리고 갔다.
“기숙사에는 집이 외지인 여직원 200명 정도가 지냈어요. 조폐공사 건물이 도심과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있고, 기숙사 생활이 단조롭다 보니 전도하기 좋았어요. 성경공부에 같이 가자고 하면 따라오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저를 통해서도 한현옥, 한정원 등 입사 동기 대여섯 명이 모임에 나왔지요.”
성경공부 모임에 나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 20여 명이 모여서 말씀을 들었고, 말씀을 마치고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복음을 듣는 시간이 이어졌다.

핍박을 받는 것 같았지만…
복음의 씨앗이 떨어진 곳에는 언제든 핍박이 있다. 사탄은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가장 싫어하기 때문이다. 경산 조폐공사에서 구원받은 자매들 역시 적지 않은 핍박을 받았다.
“당시 경산 조폐공사 신우회에 속한 직원이 100명 가량 되었어요. 우리가 신우회 모임에 참석하지 않고 별도로 모임을 가지면서 전도하니까 우리를 이단이라고 많이 핍박했어요. 회사에서도 곱지 않게 보았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수양회에 참석하기 위해 여름과 겨울에 휴가를 동시에 갔으니까요. 당시는 수양회가 지금처럼 몇 주에 걸쳐서 있지 않고 딱 한 주만 하니까 무조건 그때 참석해야 하는 거예요. 회사에서는 휴가 날짜가 정해져 있는데, 우리는 어쨌든 수양회에 모두 참석했으니까 싫어했지요. 또, 회식 자리에 안 가고요. 거기에다 우리끼리 좋아서 함께 다니는 것을 회사에서는 늘 몰려다니는 것으로 보았으니까요.”
회사에서 자매들을 불편하게 여겼지만, 그것은 신앙생활에 관련된 몇 부분일 뿐이었다. 그 외의 삶에서는 나무랄 데 없이 충실하게 일했고, 회사에 크게 유익을 끼치기도 했다. 그리고 여러 직원들이 신우회 회원들과 달리 자매들의 신앙이 진실하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를 볼 때면 눈살을 찌푸리던 계장님이 있었어요. 아내가 교회에 다녔는데, 그분이 위암에 걸렸어요. 계장님이 아내가 죽을까봐 몹시 걱정하다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싶었어요. 그때 신우회 사람들을 찾아가지 않고 우리 교회를 찾아왔어요. 평소에는 유별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은 우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찾고자 하니까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이 진짜라는 사실을 느꼈던 거예요. 계장님은 아내 일로 교회를 찾아와서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어요. 신우회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에도 많은 이들이 우리가 가진 믿음이 참되다는 것을 알았어요. 평소에는 우리를 핍박하다가 가정에 어려움이 있거나 진급해야 하는 문제 등을 만나면 우리에게 살짝 찾아와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여유가 없어서 오히려 복음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끌렸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조폐공사 자매들에게 큰 기쁨이었다. 경산에서 대구 교회까지 꽤 멀고 시간이 제법 걸렸지만 소풍 가듯 즐거웠다.
“주일이면 아침 일찍 기숙사를 나서지요. 교회까지 가려면 30분 가량 걷고, 차를 두 번 갈아타야 하니까요. 오전 예배를 드리고는 다시 기숙사에 갔다가 저녁 예배에 올 수 없으니까 교회에서 지냈어요. 박 목사님, 사모님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지요. 은혜의 세계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좋은 시간들이었어요.”
당시 조폐공사에서 일하던 자매들은 월급을 제법 많이 받았다. 보너스도 두 달에 한 번씩 받고. 대부분의 자매들이 그 물질을 복음을 위해 드렸다.
“어떤 경우에는 교회에 갈 차비가 없었어요. 우연히 책을 넘기다 책갈피에 끼어 있는 돈을 보고는 ‘하나님이 이때를 위해 여기에 돈을 넣어두게 했나 보다’ 하며 기쁨의 웃음을 함빡 지었지요. 그때는 박 목사님도 어렵게 사셨고, 성도들도 대부분 가난했어요. 그래도 물질을 드려서 복음 전하는 일들을 계속 했지요. 예배당에서 생활하던 선교학생들은 굶을 때가 많았고, 어쩌다 먹는 계란은 아주 특별한 음식이었어요. 교회 앞에 호떡을 파는 곳이 있었는데, 그거 하나 먹는 게 큰 즐거움이었으니까요. 여유가 없었지만, 돈이 없어서 불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마음이 복음을 위해 살고자 하는 쪽으로 이끌렸어요. 돌아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이끄셨고, 우리를 지키셨다는 마음이 들어요.”

예배당을 사는 일 앞에 같이 염려하고, 기도하고, 기뻐했다
예배당으로 사용했던 전세로 얻은 건물의 주위 환경이 좋지 않아, 대구 교회의 형제 자매들은 하나님께 예배당을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계명대학교 근처에 팔려고 내놓은 예배당이 있음을 알았다. 건물 가격은 6,500만 원. 대부분 가난하게 사는 많지 않은 성도들, 1979년 당시에 그 성도들이 6,500만 원을 마련한다는 것이 박옥수 목사 마음에서는 불가능하게 보였다. 그런데 성도들은 다 기뻐하며 그 예배당을 사자고 했다. 박옥수 목사는 하는 수 없이 몇몇 형제들과 함께 그 교회를 찾아갔다.

나는 ‘도대체 얼마에 달라고 하면 안 팔겠다고 할 것인지’를 깊이 생각하다가 4천 7백만 원에 팔라고 말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 교회를 찾아가 “우리는 이 예배당을 살 만한 형편이 안 돼서 안 사려고 합니다. 만일 4천 7백만 원에 파시면 생각해 보겠지만 그것도 어렵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 교회 장로님들이 “그러지 말고 잠깐 들어와서 커피나 한 잔 하고 가세요” 하셨다. 들어가서 이야기하다 보니 5천 5백만 원에 사기로 결정해버렸다. 밖으로 나와서 ‘내가 왜 그랬지? 5천 5백만 원짜리 건물을 어떻게 사?’ 하고 어려워하고 있는데, 형제들은 ‘목사님, 흥정 잘하셨습니다! 우리는 상상도 못 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잘 깎으셨어요?’라고 했다. 교회로 돌아와서 5천 5백만 원에 사기로 결정했다고 하자 형제 자매님들도 너무나 기뻐하면서 감사해 했다. (박옥수 목사 간증 중에서)

예배당을 사기 위해 모든 형제 자매들이 힘에 겹게 헌금을 작정했고, 그 물질을 응답받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다. 교회가 큰 일 앞에 서니, 성도들이 매일 교회에 와서 기도회를 가지며 마음이 하나로 뭉쳐졌다.
“교회의 모든 형제 자매들이 함께하는 게 좋았어요. 모든 성도에게 복음의 일이 자신의 일이었어요. 그때는 기도회, 철야기도회도 많이 했어요. 같이 염려하고, 같이 기도하고, 기쁜 일이 생기면 같이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어요. 어려운 시간이 우리 마음을 하나로 만들었어요. 잡다한 생각들이 제해지고 마음이 맑고 깨끗해졌어요. 조폐공사 자매들도 힘을 다해 헌금을 작정했지요. 일하면서 짬짬이 읽는 성경 말씀이 굉장히 달았어요. 말씀이 우리 마음에 어려움을 이길 힘을 주었어요.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힘에 겹게 헌금하고 나니 세상에 나갈 일이 없었어요. 쓸 돈이 없으니까요. 자연스럽게 마음이 복음에 다 쏟아지더라고요.”
넘지 못할 산 같았지만 마침내 예배당을 샀고, 형제 자매들은 ‘이제 우리 예배당이 생겼다!’는 큰 기쁨과 감사에 젖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전보다 훨씬 강하게 복음의 역사들이 일어났다.

하나님, 선교학생에게 시집가게 해주세요!
당시 자매들에게 가장 큰 고민은 결혼이었다고 한다.
“교회에 청년 형제들이 많지 않았으니까요. 그나마 있는 형제들도 직장이 썩 좋진 않았고요. 그렇다고 구원받지 않은 사람과 결혼할 수는 없고, 나이가 들어가는 자매들은 결혼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형제들이 많지 않다 보니 자매들이 선교학교를 막 졸업하고 지역 교회로 파송되는 전도자의 아내가 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살기 싫어서 시험에 들었어요. 전도자의 삶은 정말 가난하고 힘들게 보였거든요.”
아직 결혼할 나이가 되지 않았지만, 허소영 자매는 박옥수 목사를 찾아가 어려운 마음을 토로했다.
“목사님께 ‘저는 선교학생과 결혼하기 싫고 물질로 복음을 섬기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러자 목사님이 ‘복음을 사랑하는 마음도 하나님이 주시니 미리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그래서 그런 마음들을 다 내려놓고 잊었어요.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부터 ‘복음 전도자를 내조하며 산다면 그 모든 삶이 하나님 앞에서 기억되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 후로는 ‘저도 복음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 선교학생에게 시집가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했지요. 목사님 말씀대로, 하나님은 제 삶을 억지로 끌고 가시지 않고 마음을 감동시켜서 이끌어 주셨어요.”
1983년,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 상대는 선교학생으로 파송을 앞두고 있던 임태산 형제.
“갚아야 할 돈이 있어서 고민했어요. 예배당을 살 때, 30여 명의 구원받지 않은 동료들이 만든 계에 들어 제가 먼저 타서 드렸거든요. 회사를 몇 년 더 다녀야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기에 결혼하기 싫었어요. 솔직히, 그때는 결혼할 형제님도 마음에 썩 들진 않았고요. 그렇게 보내고 있는데,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는 말씀이 제 마음을 두드렸어요. 하나님이 ‘네가 복음을 위해 살고 싶다면서? 그 길을 가다 보면 더 큰 어려움이 있을 텐데, 이 문제 하나 마음에서 내려놓지 못하면 어떡할래?’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으로 들려, 결혼을 결정했어요.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낼 테니 나에게 맡겨라
허소영 사모는 결혼하고 남편과 함께 구미중앙교회(현 기쁜소식구미교회)로 파송받았다. 그런데 계를 든 동료들에게서 돈을 달라는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전화를 받고 나서 ‘내가 어쩌자고 결혼을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교회 형제 자매들이 알면 사모가 믿음이 없어서 그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할 것 같고, 돈 달라고 전화가 올 때마다 겁도 나고…. 어쩔 수 없이 남편에게 이야기하자 함께 기도하자고 했어요. 그리고 얼마 후, 시편을 읽는데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시 37:5~6)’는 말씀이 마음에 들어왔어요. 하나님께서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낼 테니 나에게 맡겨라’고 하시는 이야기로 들렸어요.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손을 놓았지요.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친정아버지가 취직이 되셨어요. 학자로 글만 쓰시고 돈을 번 적이 없던 분이 갑자기 취직이 되었고, 월급도 제법 많았어요. 아버지는 내가 결혼할 때 도움을 주지 못한 게 마음에 못이 박혀 있어서 월급을 타면 한동안 저에게 많은 돈을 보내 주셨어요. 그 돈으로 빚을 다 해결할 수 있었지요.”
그 일은 허소영 사모의 마음에 큰 힘을 주었다. 교회의 청년 자매들에게 “복음을 위해서 삶을 드려라, 그러면 하나님이 도우시고 복되게 하신다”라고 힘있게 말할 수 있었다.

지난 날들에 대해 후회가 없는 것은…
조폐공사에서 구원받은 자매들이 하나 둘 결혼해 조폐공사를 떠나면서 성경공부 모임도 막을 내렸다. 마치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사람들을 경산 조폐공사로 불러모아 구원하시고, 복음을 위해 그들의 삶을 드리게 하시고, 그들을 복음의 일꾼으로 만드신 후 그 막을 닫은 것 같았다.
“언제 어려운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그 날들이 감사와 기쁨과 행복 속에서 지나갔어요. 순수한 마음으로 복음과 함께 달음질했던 날들이 내 인생에 있었다는 것이 말할 수 없이 감사하지요. 한번씩 ‘내가 그렇게 살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 대열에 참여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봐요.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이끄셨던 거예요.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시고, 후에 더 큰 것으로 갚아 주신 거예요.”
스물 한 살에 구원받아 34년을 복음 안에서 보낸 허소영 사모. 젊은 날에는 경산 조폐공사에서 한 폭의 수채화 같은 맑은 삶을 살았고, 1983년부터 목회자의 길을 걷기 시작해 오늘까지 그 길을 걷고 있다. 지난 날들을 한마디로 표현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나님 안에서는 후회가 없어요. 세상에서 살았다면 ‘이렇게 할 걸…, 저렇게 할 걸…’ 하고 후회가 남을 텐데, 저는 지난 날들에 대해 후회가 없네요. 제가 부족할 때도 있었고, 교만할 때도 있었고, 굉장히 어려운 시간도 있었지만, 어느 곳에 있든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어서 나를 인도해 주셨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마음도 넣어 주시고, 힘도 주시고, 권면도 하시고, 책망도 하시면서 이 길을 걷게 해주셨어요.”

 

어린 시절, 고향 시골 마을은 초라했지만 따뜻한 품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편리를 위해 이것저것 개량했는데, 지금은 사라진 초라한 모습들과 함께 아름다운 추억이 머물렀던 자리들도 사라져버렸다. 가난했던 시절에 구원받고 복음이 좋아서 자신의 모든 것을 교회에 쏟아부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있음으로 인해 오늘 구원받은 우리가 있다. 세월이 흘러 삶이 좋아져서, 이제는 호떡 하나에 큰 기쁨을 느끼거나 버스비가 없어서 먼 길을 걸어 교회에 가는 일은 보기 힘들다. 그런데 그것만큼 아름다운 일들도 많이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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