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 월간 기쁜소식
  • 승인 2013.03.07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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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눈을 거의 뜨지 못하는 아내. 병원들을 찾아다녔지만

     
 

이유도 알아내지 못한 채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찾아온 뇌졸중. 병석에 누운 나를 눈을 감은
아내가 지켜야 했다. 교회 일에 마음을 다 쏟고 살았는데….

교회 일에 빠져서 사는 삶이 행복했다
올해 내 나이 쉰 일곱. 나는 1993년 4월에 구원을 받았다. 구원받기 전 ‘나처럼 마음 편하게 산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굴곡 없는 삶을 살았다. 낙천적인 데에다 돈에 대한 큰 욕심이 없다 보니, 기아자동차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큰 어려움 없이 살았다.
먼저 구원받은 여동생의 초청으로 집회에 참석해서 구원을 받았지만 7년이 지나도록 직장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게 부끄러웠다. 구원받고 7년째 되던 해에 교회의 일을 하나 맡았는데, ‘내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낼 그리스도인이구나’ 하는 마음이 처음 들었고, 그때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 후로는 교회 일에 빠져서 살았다. 그렇게 사는 것이 굉장히 즐거웠다. 2000년에는 우리 교회(기쁜소식송정교회)의 옛 예배당 건축이 있었고, 2007년부터는 현재 예배당 건축이 시작되어서 아침에 출근했다가 퇴근하면 교회에 가서 일하고 11시쯤 집에 돌아왔다. 아내도 공사장에서 일하는 형제들 간식을 준비해주기 위해 일찍 나갔다가 밤 11시가 되어 나와 함께 돌아오는 삶을 살았다. 우리 부부는 그렇게 사는 것이 재미있었다. 세상에서 누렸던 기쁨인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회식하고…, 그런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즐겁고 행복했다. 일이 없을 때에도 교회에 가서 형제들과 함께 놀고 교제하며 지내는 것이 즐거웠다.

지름이 12cm나 되는 물혹이 꼬여서
2009년, 두 딸이 굿뉴스코 해외봉사단으로 외국에 나간 후 우리 부부에게 감당하기 힘든 일이 닥쳤다. 6월 6일 저녁으로 기억하는데, 예배당 마무리 공사를 마치고 아내는 11시쯤 집에 가고 나는 12시가 되어서 집에 들어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화장실에 있던 아내가 문소리를 듣고 화장실 문을 여는데, 온갖 인상을 쓰고 있었다.
“여보, 왜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어?”
“배가 아파서 죽겠어.”
아내는 배가 몹시 아파 음식을 잘못 먹어서 그런 줄 알고 화장실에 갔다가, 그게 아닌 것을 알고 내가 오자 통증을 호소하려고 화장실 문을 열었던 것이다. 어지간하면 아프다고 하지 않는 사람이기에 바로 광주성심병원으로 갔다. 병원에서 이것저것 검사했지만 원인을 찾지 못해 새벽 4시가 되어서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은 일요일이어서 병원에 가지 못하고 아픈 배를 움켜쥐고 참았다가, 월요일에 화순에 있는 전남대병원을 찾아갔다. 검사 결과, 자궁에 물혹이 있는데 그 혹이 꼬여서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했다. 혹의 지름이 12cm나 되어 떼어내야 해서 바로 긴급 수술에 들어갔다.

▲ 1993년 구원받은 후, 대덕 수양관에서 열린 여름 수양회에 참석해 수양관 근처 냇물에서 세례를 받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눈을 뜨지 못하는 아내
7월 6일, 아내가 퇴원했다. 그런데 9월 어느 날 아내가 “여보, 내가 눈이 감겼다가 안 떠져.” 하고 말했다. 전남대병원 신경외과에서 처방해준 약을 먹었지만 효과가 없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증세가 심해지면서 나중에는 눈을 뜨자마자 바로 감겨서 계속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서울의 큰 병원을 비롯해 전국의 유명하다는 안과, 침 맞는 곳들을 찾아다녔다. 어느 곳에서도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고, 치료도 되지 않았다. 한 병원에서는 ‘상태가 점점 악화되어서 나중에는 안구가 굳어지고 다음에는 음식도 삼키지 못하게 된다’고 했다. 겁이 났다. 아내에게는 말하지 못하고 자다가 깨서 곰곰이 생각하며 혼자 울 때가 많았다.
아내는 거의 눈을 뜨지 못해서 옷도 찾아 입지 못했다. 안방에 조립식 옷걸이를 설치한 후, 잠깐 눈을 떠서 골라 입을 수 있도록 장롱에 있는 아내의 옷을 전부 꺼내 걸어놓았다. 직장에서 퇴근하고 교회에 들렀다가 11시쯤 집에 오면 때론 설거지를 해야 했다. 음식물 찌꺼기를 버리는 일은, 사람들이 보고 ‘저 집은 여자가 안 버리고 남자가 버린다’고 할까봐 12시가 넘어서 버렸다. 빨래도 내가 해야 했다. 1인 2역을 하며 살았지만 견딜 만했다.
우리 교회 사모님은 아내를 집에 혼자 두면 우울증에 빠진다고 자꾸 교회로 부르셨다. 교회 식당에서 칼이나 수저를 든 채 눈을 감고 그냥 서 있는 아내 모습을 볼 때면 안쓰러웠다. ‘집에서 쉬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불러내는 사모님의 마음을 알기에 어찌 할 수 없었다. 내 마음도 안타깝고 힘든데, 그런 일을 겪는 당사자의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아내 마음에서는 고통과 죽고 싶다는 생각들이 수시로 지나갔다고 한다.
나는 하나님께 따지듯 물었다. “하나님,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내가 저주를 받은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원망하고, 교회를 원망하고, 목사님을 원망했다.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하면서까지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빠졌다 벗어났다를 반복했다.

나마저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2011년 7월 어느 날, 아내의 눈이 감기기 시작한 지 2년이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해외봉사를 갔던 두 딸은 돌아와서 다시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직장에서 퇴근 한 시간을 남겨놓고 나는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급히 실려갔다. 뇌경색에 의한 뇌졸중이었다. 새벽 4시에 연락을 받은 아내는 병원에 와서 억장이 무너져 울었다고 한다. 그래도 남편에게 기대고 살았는데, 남편마저 쓰러져버리고 만 것이다. 그것도 뇌졸중으로. 말을 못 하든지, 반신불수가 되든지, 못 일어나든지, 심하면 죽을 수도 있기에 아내는 겁이 더럭 난 것이다. 중환자실에 있는 나를 보지도 못하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아서 서럽게 울었다고 한다.
나는 중환자실에 3일을 있었다. 정신이 든 후 숱한 생각들이 오갔다.
‘내가 직장에 다니지 못하면 아내 눈은 어떻게 뜨게 하지?’
‘두 딸이 아직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는데, 학교는 어떻게 하고 먹고사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마음에서 하나님께 물었다.
‘나마저 쓰러지면 아내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내에 이어 나까지 이런 일을 당한 것은 하나님의 저주가 아닙니까? 우리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무엇인지 알려주십시오! 아니면, 왜 이런 저주를 받아야 하는지 이유를 가르쳐주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믿었다는 사실이 친구들 앞에 부끄러웠다. 가족들이나 친척들에게도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복 주실 것이라고 했기에 “네가 하나님을 믿은 것의 결국이 그거냐? 그런 꼴 당하려고 하나님을 믿었냐?” 하고 말할 것 같아 부끄러웠다. ‘이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입니까?’ 하고 받히는 마음이 올라오고, ‘복음이 좋아서 교회의 일에 마음을 다 쏟은 것의 결국이 이건가?’ 하고 후회가 밀려왔다.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올라오면 견딜 수 없었다. 아파서 괴로운 것보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올라오는 것이 더 괴로웠다. 내 신앙을 내가 다 뒤엎는 것 같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 구원받고 10년 후 제주도를 방문해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필자 부부

“지금 조 형제님에게 주님이 걸으라고 하십니다.”
중환자실에 누워 있던 둘째 날이었다. 절망에 사로잡혀 있는데, 문득 내 모습이 보였다. 큰 병실 안 하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나. ‘이 모습이 하나님께 어떻게 보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마리의 벌레처럼 느껴졌다. 풀밭에 버리면 그냥 버려질 수밖에 없는 벌레 같은 초라한 인간. 나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 불쌍한 나에게 무슨 옳음이 그리 많고, 잘한 것이 그리 많은지…. 속에서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하는 마음이 올라왔다.
쓰러지고 나서 처음으로 성경 말씀이 생각났다. 아내가 처음 수술 받을 때 수술실 밖에서 아내 신발을 들고 혼자 서 있으면서 ‘하나님…!’ 하고 있을 때 마음에 떠올랐던 말씀이다.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 107:20) 이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위경에서 건져내시겠다는 마음이 들어왔다.
그날 점심때 목사님이 찾아오셨다. 목사님은 “형제님,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 마음 다 비우고 버리세요.” 하고는, 다른 사람에게 간다며 병실을 떠나셨다. 목사님이 가신 후 화장실에 가려고 한 손으로 침대를 잡았는데, 중심을 잡을 수 없었다. ‘목사님이 모든 생각을 버리라고 하셨지? 지금 내 생각을 다 버리지 않으면 나는 죽어!’ 목사님이 해주신 말씀이 내 마음에서 살아 일했다. 그 동안 내 속에 담아두었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다.
다음날 점심때 목사님이 다시 오셨다.
“형제님! 제 이야기 잘 들으세요. 김충환 목사님이 암에 걸려 죽음 앞에 있을 때 박옥수 목사님이 병실에 찾아가서 이야기하셨잖아요. 전기는 전선을 통해서 흐르고, 링거 주사액은 관을 통해서 흐르고, 하나님의 능력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흐른다고요. 그 말씀, 김충환 목사님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고 이 시간 조 형제님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내가 성경을 보니까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하시니까 그 사람이 일어나 걸었습니다. 그 말씀, 38년 된 병자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 조 형제님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이 걸으라고 하십니다.”
“예, 목사님. 알겠습니다.”
둘째 날은 마음을 다 비우라는 말씀만 하고 가셨고, 셋째 날은 걸으라는 말씀만 하고 목사님은 가셨다.
목사님이 가신 후,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아내가 곁에 있어 주었지만 눈을 뜨지 못하기에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화장실에 갈 때 부축도 해줄 수 없었다. 두 딸 청선이와 경선이가 병원 수속도 밟고, 번갈아가며 엄마와 함께 내 병상을 지켜야 했다. 누가 병문안을 와도 아내는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눈을 잠시 떴다가도 금방 감겨버리니까. 그러면 내가 아내의 상태에 대해 그 사람에게 설명해주어야 했다.
일반실로 옮긴 후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병실 안에 화장실이 있지만, 일어서면 모든 게 빙글빙글 돌기에 혼자서는 화장실에 가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당신의 종을 통해서 나에게 걸으라고 하셨지’ 하고 걸으려고 했다. 빙글빙글 돌았지만, 딸에게 한쪽만 부축하게 하고 한쪽은 벽을 잡고 걸었다. 그렇게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고 왔다.
몇 시간 후 화장실에 갈 때에도 그렇게 했고, 세 번째에는 ‘나 혼자 걸어볼게’ 하고 혼자서 갔다가 올 때는 힘이 빠져서 부축을 받아 침대로 돌아왔다. 그 다음에는 유모차 같은 것을 끌고 복도로 나가서 걸었다. ‘하나님이 걸으라고 하시니까 걷네!’ 하면서 걸었다. 점점 긴 거리를 걸을 수 있었다.

▲ 교회 야외 예배 때, 구원받은 후로 교회는 점점 삶의 전부가 되어갔다.

“여보, 당신 지금까지 눈을 한 번도 안 감았어.”
얼마 후 전남대병원에서 요양병원으로 옮겼고, 그때부터는 앉아서 성경을 읽을 수 있었다. 말씀 한 구절이 마음에 들어왔다.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54:10)
‘하나님은 나를 늘 긍휼히 여기시는구나. 내가 병실에 누워 있을 때에도 나를 긍휼히 여기셨구나! 하나님의 인자가 나에게서 떠나지 않는구나!’
마음이 평안했다. 재활치료를 담당한 물리치료사가 나에게 ‘뇌졸중 환자 가운데 선생님처럼 낫는 경우는 천 명에 한 명 나올까말까 한다’고 했다.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기셨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직장에서 동료들이 문병을 와서도 다 하나님이 도우셨다고 했다.
하루는 인터넷으로 들은 기쁜소식강남교회의 주일 설교 말씀이 참 좋아서, 저녁에 또 듣고 싶어 스마트폰에 저장한 후 아내와 함께 근처 공원에 걷기 운동을 하러 나갔다. 아내는 눈을 뜨지 못해 나를 붙들어야 하고, 나는 발에 힘이 없어 돌부리나 나뭇가지만 밟아도 넘어지기에 아내를 붙들어야 했다. 나는 아내의 눈이 되어주고, 아내는 내 발이 되어주는 것이다. 우리 사정을 모르는 공원에서 운동하던 사람들이 서로 안고 가는 우리 부부의 모습을 보고는 “행복하게 사시네요. 좋아 보여요.” 하고 말했다.
저녁 6시 30분에 나가서 걷기 시작했는데, 7시 30분이 지났는데도 아내가 눈을 뜨고 있었다. 8시 30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눈을 뜨고 있었다. 내 몸에 조금 무리가 되었지만, 아내가 눈을 감지 않고 계속 뜨고 있는 것이 좋아서 한 바퀴 더, 9시 30분까지 걸었다. 그리고 아내에게 병실로 들어가자고 하면서 말했다.
“여보, 당신 지금까지 눈을 한 번도 안 감았어.”
“응?? 그랬어?!!”
아내는 7층에 있는 병실에 들어갈 때까지 눈을 감지 않고 있다가 병실에 들어가서야 눈을 감았다. 앉아서 쉬면서 믿어지지 않았다. 아내가 눈을 뜨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다른 병상에 있던 환자 분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진짜 다르네. 하나님이 도우시는가 보네.” 하였다. 그동안 아내가 내 곁에 있었지만 다른 환자 분들이 밥도 타다 주는 등 나를 도와주었다. 사실 아내도 도움을 입어야 할 때가 많아서 사실상 환자가 두 명 있는 셈이었기에, 눈을 뜨고 병실로 들어오는 아내를 보고 다 같이 마음으로 기뻐해주었다.

이젠 두렵지 않고 원망하지 않는다
2011년 7월 19일에 쓰러져서, 9월 7일에 퇴원했다. 아내도 눈을 뜨고 지내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더니, 일주일 후에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날이 바로 내가 퇴원하는 날이었다. 나는 일어서서 퇴원하고, 아내는 눈을 뜬 것이다. 그리고 열흘 후 나는 직장에 출근할 수 있었다.
내가 쓰러져서 처음 첨단병원에 실려갔을 때, 생전 물을 가지고 다니지 않던 내가 물병을 가지고 병실에 갔고, 새벽 2시쯤 목이 말라서 물을 마셨는데 넘어가질 않았다. 간호사에게 그 사실을 말하자 간호사는 괜찮다며 다음날 MRI를 찍어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마침 의사인 조카가 병실에 와서 내 이야기를 듣고는 나를 전남대병원으로 옮겼고, 그 새벽에 내 증상이 모세혈관이 막혀 뇌경색으로 인해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사실을 아는 의사가 병원에 있어서 바로 조치를 받을 수 있었다. 그 일을 시작으로, 순간순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손끝 하나 장애가 오지 않고 온전하게 나았다.
우리 부부는 다시 예배에 참석해서 병이 낫기까지의 일을 간증하면서, 교회가 우리를 위해서 기도한 것을 알았다. 우리 부부의 마음에 교회가, 하나님의 종이 세워졌다.
재활치료도 잘 마쳐서 지금 우리 부부는 아주 건강한 몸으로 교회 안에서 기쁘고 감사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지난 날을 돌아보니, 하나님은 당신의 섭리를 좇아 우리 부부의 마음 지경을 넓히셨고, 믿음의 세계를 보여주셨다.
지금은 내 삶에든 교회에든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을 주셨지?’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이 일도 풀어가시지 않겠는가?’ 한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저주로 생각되지 않고, 두렵지 않으며, 원망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기에 ‘하나님이 무슨 감사한 마음을 만나게 하시려고 이 일을 허락하셨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 혹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형제 자매들을 보아도 같은 마음이 든다.
잠시 당신의 얼굴을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를 품고 계시는 당신의 마음을 보여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 필자 부부와 두 딸.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넘어 얻은 행복한 웃음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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