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의 근원 하나님을 무시한 거짓 성화
성화의 근원 하나님을 무시한 거짓 성화
  • 월간 기쁜소식
  • 승인 2013.03.08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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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된 신앙관의 해체가 필요한 한국 교회

지난 2008년 미국인본주의협회가 워싱턴 D.C.에서 크리스마스 캠페인을 하려고 버스에 광고를 했는데, 그 문구는 ‘왜 신을 믿는가? 선(善)을 위해 선해지라.’(Why believe in a god? Just be good for goodness’ sake.)였다. 즉, 하나님과 무관하게 선 자체를 추구하라는 내용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한국 교회의 신앙관에도 스며들어 있다. 지난 2005년 한국 갤럽 보고서에, 교인들이 세속화되어 세상 사람들과 다름이 없는 것이 한국 교회의 중요 문제였던 것처럼 말이다. 최근 한국 교회는 타락한 한기총 해체 운동을 일으켰는데, 사실 해체되어야 되는 것은 그릇된 신앙관이다. 해체 운동을 주도하는 한 단체의 취지문을 살펴보자.

“갈등과 문제점들은 상당 부분 우리 사회의 도덕적 타락에 근거해 있다고 본다. 한 사회의 도덕은, 물론 그 사회의 모든 개인과 기관이 책임져야 한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독교가 그 임무를 감당하여야 한다.”(기독교윤리실천운동, 창립 취지문)

이처럼 도덕성 회복에 개혁의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한국 교회의 타락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그 원인은, 2007년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 후 평가를 통해 알 수 있다.

“우리는 지난 해 한국 교회의 새로운 부흥을 위해서 여러 가지 각종 행사도 많이 하고 집회도 자주 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도 안 일어났어요. 단지 행사로 다 끝났어요. 성도들의 삶이 바뀐 것도 아닙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자신을 바꿀 힘이 없어요.”(옥 모 목사,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 설교자, 2008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월례모임)

한국 교회의 근본 문제는 능력 없는 자신의 실체는 모른 채, 인위적 개혁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데에 있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신앙관은 인간의 타락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과는 전혀 다르다.


인간의 타락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나 없이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해봐라. 그리고 그로 인해 얻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세상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설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패한 심령으로 놔두시는 것은 인간의 실체를 깨우쳐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많은 개혁을 단행했든지 불의와 악한 것들을 완화시켰든지 간에 하나님을 떠난 어리석음을 회개하거나 깨닫게 하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들은 무익합니다.”(마틴 로이드 존스, Romans, Chapter 1)

위의 내용은 타락한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는 말씀처럼,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보다 무언가를 스스로 하는 데에 마음을 두게 된다. 그때 하나님은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라는 말씀대로 하셔서, 누가복음 15장의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난 결과를 깨달은 것처럼 인도하신다. 아담이 타락했을 때에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라고 하시며, 하나님과 떨어진 것이 근본 문제임을 가르쳐주고자 하셨고, 예수님 역시 같은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셨다.
“성경을 읽어보면,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칭찬하신 이야기는 백부장과 같은 믿음에 대해서였고, 주님이 꾸짖은 이야기들은 대부분 믿음이 없는 부분에 대해서였습니다. 주님은 인간이 잘못하고 실수한 부분에 대해서는 꾸짖지 않으셨어요. 한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왔을 때, 예수님은 ‘네가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강도가 못 박혀 죽을 때, ‘너는 왜 사람을 죽이고 그런 못된 짓을 했느냐’고 책망하지도 않으셨습니다.”(박옥수 목사, 예수의 피를 힘입어, p.17)

하나님은 당신을 떠나 생긴 인간의 악한 행위보다, 당신을 믿지 못하고 떠난 것 자체가 근본 문제이며 이를 깨닫고 돌아오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을 떠난 원인이 해결되면 자연스럽게 악의 열매의 문제도 해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보다 타락에서 벗어나는 개혁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교인들에게는 예수님과 같이 거룩한 삶을 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는 성화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성화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뿐

성화에 대해서는 ‘솔라 피데(Sola Fide, 라틴어로 ‘믿음으로만’이란 뜻) 성화’ ‘완전 성화’ ‘개혁주의 성화’ ‘결정적 성화’ ‘점진적 성화’ ‘영혼의 성화’
‘위치적 성화’ ‘실제적 성화’ 등 수많은 이론과 논쟁들이 있는데, 이는 아래의 내용처럼 성화의 근원에서 벗어난 신학자들의 주장으로 인해 생겨났다. 

“성화의 종교, 윤리적 연합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연합시켜 놓은 것을 신학자들은 산산이 흩어버린다. 그들의 관심이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 추상적인 이론들을 향해 나아갔기 때문에, 성화의 개념들은 종교, 윤리적으로 조각나게 되었다.”(도널드 맥컬로우, The Trivialization of God, Chapter 6)
성화(聖化, Sanctification)는 히브리어 ‘카다쉬’, 헬라어 ‘하기아조’에 해당하는데, ‘거룩하다, 거룩하게 하다, 성별(聖別)하다’는 의미를 갖는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만 거룩하시며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유일한 분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삼상 2:2)
“나 여호와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자는 거룩함이니라.”(레 21:8)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살전 5:23)

즉, 성화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와 박옥수 목사는, 못이 자석과 연결되면 자석의 자성으로 인해 못도 자석이 되는 원리처럼,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인간도 거룩해짐을 강조했다.
 
“성도는 그의 영혼이 하나님과 연합된 것을 명백히 느낀다. 성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형상이 성도의 거룩함이다.” (조나단 에드워즈, Religious Affections, Part 3)

“예수님과 우리가 마음에서 하나가 되면 그때부터 예수님의 거룩함과 의와 지혜와 능력이 우리 것이 됩니다." (박옥수 목사, 마하나임 사이버신학교 특강 중)


참된 성화를 가로막는 사탄의 궤계
  
그런데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은 참된 성화를 막기 위해 거짓 성화를 만들었다. 즉, 성화의 근원보다 성화의 열매에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 대신 인간이 이루게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마틴 로이드 존스와 박옥수 목사는 아래와 같이 경고했다.
“성화와 관련된 모든 문제는 하나님이 아닌 우리 자신에게서 출발하고자 하는 지극히 해로운 습관으로부터 생겨납니다.”(마틴 로이드 존스, God the Holy Spirit, Sanctification Part)
 
“여러분, 우리는 마음 근본이 더러운데 죄지은 것을 뉘우치고 앞으로는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앞으로 진실하게 살면 될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것은 사탄에게 속는 것입니다.”(박옥수 목사, 죄에서 벗어나게 하는 속죄제사, p.91)
 
거짓된 성화를 가려내려면 거룩함과 상반된 더러움과 사탄의 속성을 이해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더럽게 여기신 최초의 존재는 사탄이었다.

“너 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내었고”(겔 28:16)

여기서 더러움이란 히브리어 ‘할랄’로 ‘더럽다, 신성 모독하다’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신성 모독을 행한 최초의 더러운 존재가 사탄이며, 그의 신성 모독은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사 14:13~14)라고 말한 그의 교만함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모든 지위와 위치를 결정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한 채, 지위와 위치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 자신이 차지하려고 한 것이다.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신이 이루려고 하는 그것이 바로 더러운 신성 모독이다. 또한, 사탄은 아담과 하와에게도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창 3:5)라면서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라는 ‘더러움’을 심어주었다. 그 후 사탄의 더러움은 인류 역사와 함께 흘러왔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2~3) 

위의 말씀은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다. 세상 사람들도 권선징악(勸善懲惡)이나 적선(積善)과 같이 선한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선하게 살려고 하는 그 자체가 더럽고 악한 것이다. 선과 거룩함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더럽다고 하나님은 아래와 같이 분명히 선언하셨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딛 1:15) 
 

삶의 성화에 대한 오해와 진실

성화에 있어 가장 큰 오해를 낳는 부분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닮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삶의 성화로, 아래와 같은 주장이다.  

“그 이후에는 평생토록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성화의 과정’이 있음을 믿는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그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함이 마땅함을 믿는다.”(사랑침례교회 홈페이지, ‘우리의 믿음’)

조지 휫트필드와 동역했던 존 베리지는, 성화의 삶을 오해했던 자신의 잘못에 대해 ‘나는 6년 동안 성화에 대해 설교했지만 단 한 사람도 이끌지 못했다’라고 친구에게 고백한 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0년 전 나는 훌륭한 사람이 되길 바랐지만, 지금은 가엾고 타락하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바뀌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 되시도록 나는 더욱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길 간절히 원한다. 거룩해지면 거룩해질수록 자신을 더욱 부인하게 되는 것이다.”
(존 베리지, Christian Leaders of the Eighteenth Century, Chapter 6)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과 연합한 그리스도인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가령, 두 명이 한 팀을 이루어 바둑을 두되 둘 가운데 아무나 둘 수 있다고 할 때, 바둑의 최고수가 나와 같은 팀이 되면 나의 실력과 상관없이 그의 능력으로 인해 최고의 팀이 된다. 물론 최고수만이 바둑을 두도록 해야 한다. 내가 개입되면 안 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과 함께한 그리스도인을 향해 철저한 자기 부인(否認)을 원하신다. 그래야 당신의 거룩함이 온전히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내가 최고수처럼 잘 두려고 애쓰지 말고 나를 부인하면 최고수가 능력을 나타내듯이, 예수님을 닮으려고 하는 대신 악하고 추한 자신을 깨닫고 자신을 부인하면 예수님이 나타나 일하시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데, 이는 자신의 실체를 정확히 모르는 데에서 기인한다. 


거짓된 삶의 성화에 속는 영적 교만
 
“사람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니라.’ 하나니,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종일 타는 불이로다.”(사 65:5)
 
이 말씀처럼,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이 더 거룩하거나 낫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을 하나님은 극히 싫어하신다. 이는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롬 3:4)라는 말씀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 사탄과 같이 교만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항상 악할 뿐”(창 6:5)이라고 인간의 근본 위치를 못박아두셨다. 여기서 ‘항상’은 죄를 지을 때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할 때나 믿음을 가졌을 때, 그리고 귀한 역사에 쓰임받을 때 등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실체를 모르거나 잊으면 자신을 나타내게 된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민 20:12)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는 일에 크게 쓰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이었지만,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그 이유는 위와 같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고 자신들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민 20:10)

위와 같이 모세는 반석에서 물을 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시행하면서
‘우리가 물을 내랴?’하며 자신을 나타냈다. 분명히 하나님이 하신 것이지만, 자신이 행한 것처럼 자신을 나타냄으로 결국 하나님의 거룩함을 가로막는 악을 행한 것이다. 그 이유는 ‘패역한 너희여’라는 말처럼, 자신을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낫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한 모세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을 떠난 마음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 부분에 대해 조나단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주해를 달았다.
“영적 교만이 모세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하나님을 보는 놀라운 체험을 했고 그분과 친밀한 교제의 특권을 가졌으며 하나님이 그를 교회를 위해 크게 유익을 끼치는 도구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통해 최근 은혜를 입어 큰 성공을 거둔 젊은 목사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부인할 수 있도록 이끌어줘야 합니다.”(조나단 에드워즈, The Great Awakening, Part 4)

즉, 모세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것으로 인해 자신의 악한 근본 모습을 잊어버린 채 하나님의 거룩함을 가리는 영적 교만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영적 교만의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영적 교만은 사람들을 분리시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낫다고 여기면서 차별성을 가지는 것입니다.”(조나단 에드워즈, The Great Awakening, Part 4)

근본이 악한 자신의 모습을 잊고 자신을 남들과 다르게 여기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면 다른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며 예수님을 닮아 거룩한 삶을 살라는 거짓된 성화에 속을 수밖에 없다.


정통 복음주의의 참된 성화의 삶

참된 성화의 삶을 살기 위해 분명히 알아야 될 사실은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는 말씀처럼, 우리 모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히 거룩하게 될 수 있다. 즉, 예수님의 속죄 외에 더 거룩해지는 삶은 없는 것이다.

“그의 안에 살아 있는 생명을 진실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거룩함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모습으로 우리 자신이 더 거룩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충분히 거룩하기 때문이다.”(스티브 맥베이, 52 Lies Heard in Church Every Sunday, Lie#38)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은 더 거룩해지기 위해 살아야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악하고 추한 자신은 죽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사시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찰스 스펄전은 “성화는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주님의 사역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처럼 만드는 것은 그분의 일이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The Treasury of the Bible, Chapter 19)라고 주님의 일만이 성화의 삶임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사도 바울은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고후 3:18)라고 주님의 형상으로 화하는 삶은 거룩하신 주님을 바라볼 때 일어나는 것임을 명시했다. 이에 대해 박옥수 목사와 찰스 스펄전은 아래와 같이 언급했다.

“주의 영광을 바라봄으로 주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된다는 것이다. 참된 신앙은 ‘내가 또 죄를 지었구나. 내가 또 거짓말을 했구나. 내가 또 성경을 못 읽었구나. 내가 또 기도를 못 했구나.’ 하면서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변하게 하실 능력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분께 기대와 소망을 두는 것이다.”(박옥수 목사, 성막 上, p.224~225)

“성화에 대해 생각할 때, 그리스도에게서 얼굴을 돌리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면, 그 유혹을 떨쳐내야만 합니다. … 성경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바라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뱀에게 물린 자는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고 모두 살았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독생자를 바라봅니다.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살게 됩니다.”(찰스 스펄전, The Treasury of the Bible, Chapter 6 & 24)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만 바라보듯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피조물의 위치에 서게 되면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다. 사도 바울 역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타락했을 때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전 1:8)고 그들을 능히 바꾸실 주님을 바라보았다. 다시 말해 추하고 악한 인간을 부인한 채 능히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삶이 참된 성화의 삶이다. 특히, 박옥수 목사는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변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고 뜻이기에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우리를 바꾸실 것을 아래와 같이 강조하고 있다.

“거듭난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든지, 현재 어떠한 모습이든지 간에 그는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치리자로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요셉이 감옥에 있든지 종으로 있든지에 구애받지 않고 그는 결국 치리자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삼으시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다윗은 잘했든 못했든 결국 왕이 되지 않았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만드시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그 날에 그리스도와 같이 변할 것이다.” (박옥수 목사, 성막 上, p.226~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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