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사역지, 카메룬으로
새로운 사역지, 카메룬으로
  • 김영삼 선교사
  • 승인 2013.03.13 16: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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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수기

 

 

 불어를 쓰는 카메룬으로, 짐을 다 싸서, 차를 타고 가라
가나 아크라에서 1년 동안 은혜를 입으면서 잘 지내고 있었다. 영적인 은혜도 입고, 영어도 조금 하고, 살 만했다. 그런데 2005년 10월, 한국에서 가나에 집회를 인도하러 오신 강사 목사님이 집회를 마치고 나에게 카메룬으로 선교를 갔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갑자기 카메룬 행이 결정된 것이다. 내가 하는 영어를 현지인이 다시 영어로 통역하는 영어긴 하지만 그래도 좀 할 만했는데, 불어를 사용하는 나라인 카메룬으로 가게 된 것이다.
카메룬은 불어권이긴 해도 영어도 사용한다고 해서 안심이 되긴 했지만 여전히 걱정이 앞섰다(실제 와보니 영어를 사용하는 지역은 아주 일부일 뿐이었다). 게다가 서부 아프리카 지역장 목사님이 짐을 싸서 떠날 것을 제안했다. 보통은 선교지에 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먼저 방문해서 상황을 살피고 집도 구한 후 떠나는데, 방 값만 갖고 바로 떠나게 된 것이다. 그것도 비행기가 아닌, 차를 타고 육로로 가야 했다.
가나에서 세 개 나라의 국경을 통과해야 하고, 빈 몸이 아닌 살림살이를 모두 챙겨 가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웠다. 모든 것이 결정되고 이제 떠나야 하는데, 부담스런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 마음이 나를 두려움 속으로 몰아갔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대로 날 보내시는 거구나!
이 일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을 주셨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3~14)
성경에서는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가는 길이 사람으로 말미암은 길이라면 원망이 일어나고 시비가 생기겠지만,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이기에 원망과 시비가 없다는 것이다. 이 말씀이 내 마음에 약속으로 임했다.
‘원망과 시비가 없다면 감사하게 하신다는 것이구나! 이 길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길이구나! 하나님이 당신의 뜻대로 날 보내시는 거구나!’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약속대로 내가 가는 길을 지키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겠다는 마음이 들면서 평안이 찾아왔다.

정글의 진흙탕 길을 쏟아지는 비 속에서…
카메룬으로 가져가야 할 짐은 버너(이동 중 식사를 위해), 이불, 식사도구 등 커다란 보따리로 10개가 넘었다. 나와 함께 갈 사람은 한국에서 온 단기선교사 둘, 불어 통역을 맡을 토고 형제, 그리고 나이지리아 현지인 선교학생이었다. 다섯 사람이 짐들을 잔뜩 들고 가나에서 카메룬으로 가는 여행을 시작했다. 가나를 출발해 토고, 베냉, 나이지리아를 통과해서 가야 하는 여행이기에 기도가 많이 되었다.
무사히 나이지리아 국경까지 통과해서 드디어 카메룬으로 들어섰다. 우기(雨期)라 폭우에 흙길이 망가지고 깊이 패여 있었다. 괜찮은 길들도 다 진흙탕이 되어 있었다. 차가 앞으로 나가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웅덩이에 빠진 차를 차에 타고 가던 사람들이 내려서 끌어내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한번은 차가 깊은 웅덩이에 빠져 많은 짐 때문에 중심을 잃고 기우뚱하더니 곧 넘어갈 듯 기울었다. 그 상황이 되자 평소 “목사님, 목사님” 하던 형제들이 서로 살겠다고 나를 짓누르고 발버둥치고,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다행히 조수가 얼른 내려 차를 떠받쳐서 차가 간신히 넘어가지 않았다.
장대같이 쏟아지는 비 속에서 길은 사라지고, 차는 자꾸 미끄러지고…. 그렇게 정글을 뚫고 가는데, 날은 점점 어두워졌다. 정글에서 곧 사자라도 나타나서 나를 잡아먹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차 안에만 웅크리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2년을 살았다는 말을 꺼내기 무색할 정도로, 마치 아프리카에 처음 온 사람처럼 내 앞에 닥친 환경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카메룬으로 가는 길 내내 기도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나중에는 “하나님, 살려주세요.” 하는 말만 입에서 맴돌았다.
여행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돌아갈 수 없는 것이, 거기서 포기하면 카메룬에 복음을 전할 기회가 없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처럼 기도를 많이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두알라에서도 열악한 형편은 우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천신만고 끝에 카메룬의 항구 도시 두알라에 도착했다. 6일간의 거친 여행 기간 동안 우리는 잠을 자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해서 너무나 지쳐 있었다. 그런데 그처럼 어려움 끝에 겨우 도착한 두알라에서도 열악한 형편은 우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한국에서 갔다면 돈이라도 조금 있었을 텐데, 가나에서 간 데에다 갑자기 정해진 여행이었기에 가진 돈이 없었다. 다섯 명이 5,000세파(만원 가량)로 하루 숙식을 해결해야 했다. 여관비로도 넉넉지 않아서 머물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여기저기를 다녀 다섯 명이 딱 붙어서 겨우 잘 수 있는 여관 방 하나를 얻었다.
밥은 먹어야겠기에 화장실에서 몰래 밥을 해먹었다. 그 밥맛이 얼마나 좋던지, 서로 먹겠다고 또 난리를 피웠다. 인간의 근본 모습을 보는 순간이었다. 배가 고프니까 위아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감사했다.
다음날, 예배 드릴 장소를 얻기 위해서 집을 나섰지만 방 값이 너무 비싸서 얻을 수 없었다. 방을 얻기 위해 여기저기 다니면서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온통 술집으로 가득한 두알라의 전경이었다. 사람들이 술을 잔으로 마시는 게 아니라 병째 잡고 마시고 있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 길에는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그리고 많은 어린아이들이 술병을 들고 팔러 다녔다. 내게 처음 비쳐진 카메룬 사람들의 모습은 소망이 없어서 인생을 포기하고 사는 사람들 같았다. 정말 복음이 필요한 곳이었다.

뒤엉켜 잤지만 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게 감사했다
두알라에서는 집을 도저히 구할 수 없어서 그곳에서 다섯 시간 정도 떨어진 야운데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우리가 카메룬으로 올 때 토고에서 한 자매가 어머니와 이혼하고 야운데에서 살고 있는 아버지의 연락처를 주었는데, 도움을 입을까 해서 그분에게 연락을 했다. 그분은 전화를 받자마자 “나는 천주교인입니다. 나는 교회를 싫어합니다. 다시 전화하지 마세요.” 하고 칼로 두부 자르듯 딱 잘라 말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카메룬의 수도 야운데에 겨우 도착했다. 머물 곳을 찾다가 가진 돈이 없어서 싼 값의 허름한 여인숙에 들어갔다. 하룻밤 자는 데 2,500세파(5천원 가량)로, 열 개가 넘는 큰 짐들을 다 방으로 옮기고 돈을 내려고 하자 주인이 사람이 너무 많다며 방을 세 개는 얻어야 한다고 했다. 결국 우리는 쫓겨나고 말았다.
막막함 그 자체였다. 말할 기운도 잃었다. 침묵이 흐르고, 형제들은 다 나만 바라보았다. 나, 하나님이 아닌데…. 함께 기도회를 가졌다. 길이 없어서 다시 토고 자매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전화를 걸자, 쌀쌀맞았던 그분의 마음이 바뀌어 있었다. 간밤에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그 마음을 바꿔놓으신 것이다.
그분이 자기 집의 위치를 가르쳐주는데, 우린 다 뒤로 넘어질 뻔했다. 우리가 서 있던 곳 바로 옆이었기 때문이다. 그분이 사는 집은 방 하나에 거실이 있는 집이었다. 그분은 방에서 자고 우리는 거실에서 뒤엉켜 잤지만 그래도 너무 행복했다. 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게 감사했다. 더 좋고 감사한 건, 얼마 남지 않은 돈을 숙박비로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걸 보고 기적이라고 하는구나!
그분의 은혜로 그 집에 며칠 거했는데, 하루는 한 남자가 찾아왔다. 그는 자신이 선교사라고 했다.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가, 그가 불어 통역을 위해 우리를 따라온 토고 형제 마울롱의 삼촌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우리 모두 또 깜짝 놀랐다. ‘아, 이런 걸 보고 기적이라고 하는구나!’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본 적도 없고 연락도 없이 지내다가, 그곳에서 난생처음 만난 것이다. 그는 당장 우리를 자기 집으로 초대해 며칠 동안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을 만큼 풍성한 음식을 내놓았다. 정말 정신 없이 먹었다.
그는 미국의 어느 선교회와 연결되어서 선교비를 받아 살고 있었다. 어린이 선교를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선교를 하지 않고 선교활동 사진만 몇 장씩 찍어서 보내주고 선교비를 받아 풍족하게 살고 있었다. ‘기독교를 이용해서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안타까웠다. 미국인들이 아프리카를 돈으로 다 망쳐놓았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다는 마음이 들었다. 어쨌든 우리는 그를 통해서 많은 은혜를 입었다. 카메룬 사정을 전혀 몰랐지만 그의 도움으로 싼값에 예배당을 계약할 수 있었다.
어두울수록 별이 빛난다고 했던가? 나의 스승 박옥수 목사님이 복음을 위해 살아오는 동안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막막했을 때마다 별빛이 되어서 그 길을 비춰주셨던 주님. 종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별빛들을 나도 조금이나마 감각할 수 있었다.

나는 바다 가운데 있는 빈 배였다
은혜로 집을 얻은 다음날, 통역을 맡은 토고 마울롱 형제가 집을 수리하는 데 필요한 물건들을 사러 시내에 나갔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들어왔다. 불시검문에 걸렸는데, 비자가 없어서 가지고 있던 돈 5,000세파를 빼앗기고 돌아온 것이다. 추방당하지 않은 것만 해도 감사하다는 마음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문제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남은 돈은 하나도 없는데, 마울롱 형제의 비자 문제를 해결해야 했고, 내 비자도 연장해야 했으며, 3개월 후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단기선교사들이 가나로 돌아갈 비행기 삯도 마련해야 했다. 생활비까지 계산해보니 모두 3,000달러 정도가 필요했다. 당시 우리가 카메룬으로 간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연고자도, 우리를 도울 사람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고, 은행계좌를 개설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선교비를 기대할 수도 없었다.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눅 5:3)
빈 배일지라도 육지에 붙어 있는 배와 육지에서 떨어져 바다 가운데에 있는 배는 다르다. 카메룬에서 느끼는 것이 그것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에는 내 배가 비어 있긴 했어도 교회와 하나님의 종이 있고 주위에 형제 자매들이 있어서 그 힘으로 살았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내 믿음인 줄로 착각하고 살았다. 내가 한 모든 일은 교회의 그늘 아래서, 종이 닦아둔 터 위에서, 이미 만들어진 안정된 형편 안에서 그것들을 누리면서 산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마치 내가 무얼 한 것처럼 도둑놈 심보를 가지고 그것이 믿음인 양 착각하고 살았던 것이다. 배가 육지를 떠나 바다 가운데로 들어간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아프리카에서 나는 진짜 내 마음을 보았다. 믿음, 내 마음에는 없었다. 하나님도 안 보였다.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짜오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시거든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그대로 된지라….”(삿 6:36~38)
이 말씀에 나오는 기드온처럼 나는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었다.
“하나님, 당신이 나를 이곳에 선교사로 보내셨다면 3,000달러를 응답해 주십시오.”

이곳에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자
닭이 날개가 있어도 날지 않다가 개가 꽁지를 물면 날개를 퍼덕여 날아오르는 힘이 나오는 것처럼, 내게도 그 힘이 생겼다. 새벽 4시면 저절로 벌떡 일어나지고, 절로 기도가 되고 성경을 읽었다. 그런 시간을 두 달 동안 보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새벽마다 기도하다보니 점점 믿음이 일어나고, 말씀으로 내 마음을 세밀하게 이끄시는 주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마 5:15)
등불을 등경 위에 둔다는 말씀이 마음에 맴돌았다.
‘숨기지 말고 드러내라는 소리인데, 어떻게 복음을 드러낼 수 있을까?’
이 말씀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이곳에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길밖에 없다.’
당장 큰 합판을 사다가 폭이 1.2미터, 길이가 2.5미터 되는 간판을 만들어 교회 앞 대로변에 세우고 현수막을 하나 만들어서 걸고 집회를 시작했다. 교회가 등록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불법이지만, 대로변에 큰 간판을 세운 것을 보고 누구도 우리 교회가 등록되지 않은 교회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가장 급한 것이 교회 등록 문제였다. 등록이 되어야 사서함과 은행계좌를 개설할 수 있고, 거주권도 얻을 수 있었다. 교회를 등록하려면 직장이 있는 다섯 명의 카메룬 현지인 교인이 필요했다. 감사하게도, 첫 집회 때 입간판이나 현수막을 보고, 또 단기선교사들의 전도를 받아 다섯 사람이 집회에 참석해서 복음을 듣고 구원받아 교회를 등록할 수 있었다. 그때 구원받은 공군 대위 형제인 ‘바보’는 지금은 소령이 되어 아내와 딸들과 함께 교회에 나오고 있다.

믿음의 표징 3,180달러
두 번째 말씀이 마음에 임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우리가 기도한 대로 필요한 물질을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믿음이 일어났다.
카메룬에 간 지 한 달하고 보름 후, 주위의 선교사님들이 카메룬 교회 개척 소식을 우리 선교회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리면 좋겠다고 해서, 카메룬으로 왔던 여행 이야기와 교회 개척 소식을 게시판에 올렸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매주 토요일에 갖는 ‘박옥수 목사와의 영상교제’ 시간에 카메룬이 소개되었고, 박 목사님과 단기선교사 형제가 전화로 통화하는 내용이 인터넷 방송으로 방영되었다.
마침 그 방송을 본 형제의 이모가 감동을 받아서 940달러를 보내주셨다. 다른 단기선교사 형제의 아버지도 형제에게 연락해서 돈이 필요하지 않냐고 묻고 1,040달러를 보내주셨다. 그리고 가나 아크라 교회의 한 자매님이 아들이 주었다며 1,200달러를 보내주셨다. 모두 3,180달러. 주님이 의심 많은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믿음을 주셨듯이 나에게도 나타나셔서 믿음을 심어주셨을 뿐 아니라 표징으로 확증해주셨다.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며 도우시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말할 수 없이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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