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부부, 참된 가정의 의미를 찾아가는 성도들
참된 부부, 참된 가정의 의미를 찾아가는 성도들
  • 김영삼 (카메룬 선교사)
  • 승인 2013.10.15 22: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선교사 수기

 

가족 간에 마음이 흐르는 축복
하나님께서 나를 아프리카에 보내신 후 많은 축복을 베풀어주셨다. 그 가운데 하나가 가족 간에 서로 마음이 소통할 수 있게 해주신 것이다.
카메룬에 와서 처음에는 말이 서툴다 보니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표면적인 이야기만 할 수 있을 뿐 마음 깊은 곳에 담아둔 이야기는 나누기 어려웠다. 사람들과 자유롭게 마음을 표현할 수 없으니 자연스럽게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많이 갖게 되었다. 아내나 아이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서로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서로의 소리를 듣게 하셔서 우리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셨다. 서로 마음이 흘러서 하나가 되니 문제가 될 만한 일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주님이 주신 가정 안에서 우리 마음이 쉴 수 있었다.
그런 시간들을 보내면서 하나님은 가족 간의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마음의 교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하셨다. 우리 몸 안에서 피가 막히지 않고 원활하게 흐를 때 몸의 병들이 자연스럽게 치유되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의 마음도 막히지 않고 흐를 때 마음의 병들이 해결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를 위하여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카메룬에 와서 사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가족 간의 다툼, 부부 간의 갈등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아 2:15)
작은 여우 한 마리가 포도원에 들어와 포도원을 헤집고 다니면서 이제 막 피어나는 꽃망울들을 다 망가뜨려서 탐스러운 포도 열매가 맺히지 못하게 하기에 그 여우를 잡아야 한다. 이곳 사람들도 여우처럼 잘못된 작은 생각 하나를 받아들임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아름다운 마음들이 차단되어서 가정에 신뢰가 깨지고 화목이 사라지는 것을 본다. 잘못된 생각 하나가 불신을 만들어내고, 다툼을 일으키고, 괴로워서 술을 마시게 하고, 간음하게 끌어가는 것을 본다. 그처럼 포도원을 망치는 작은 여우를 잡을 때, 포도나무에 꽃이 피어 탐스런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부부와 가족 간에 마음이 흘러 복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낯선 여자를 데리고 와서 내게 결혼을 허락해 달라던 형제
카메룬이 50여 년 동안 프랑스의 지배를 받으면서 그들의 종교와 문화에 영향을 받은 탓일까? 이곳 사람들의 삶에는 이해할 수 없는 퇴폐적인 사상과 문화가 마음 깊은 곳에 스며들어 있다.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부부의 개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라는 것이다. 남자들은 돈이 조금만 생기면 금방 첩을 둔다. 아니면 쉽게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로 가버린다. 여자들 또한 그러한 일들을 당연하게 여기고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산다. 이런 잘못된 삶의 모습은 아프리카에서도 카메룬 사람들에게 유독 심하다.
한번은 어느 형제가 낯선 여자와 함께 찾아와서 결혼하고 싶으니 허락해 달라고 했다. 그 형제는 아내와 세 명의 아이들이 있었기에, 갑작스런 일에 나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형제의 아내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유를 들어보니, 형제가 아내와 다투다가 아내가 주먹으로 자기를 쳐서 이가 부러졌다는 것이다. 병원에 입원한 후 형제는 전에 알고 지냈던 여자를 불렀고, 그 여자의 간호를 받으며 병원에서 지내다가 퇴원했다. 그러자 형제의 부모가 ‘네 아내는 악하니까 내쫓고 간호해준 여자와 결혼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형제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부부의 의미와 가정의 개념에 대해서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형제는 몹시 괴로워했다. 형제는 사흘간 고민하더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새 결혼을 포기했다. 그 후 형제의 아내가 구원받았고, 지금은 네 명의 자녀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다.
카메룬 사람들의 마음에는 남녀가 함께 사는 것이 ‘결혼’이라는 의미보다 ‘동거’라는 의미로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마음이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쉽게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난다. 여자들은 자신이 언제 버림받을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불안 속에서 살아간다. 남편한테 버림받으면 부모에게 가야 하기 때문에 남편보다 부모를 더 의지하는 카메룬 여자들은 자연히 부모에게 밉보이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한다. 이런 잘못된 관념들이 마음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가정이 쉽게 무너진다. 부모가 헤어지면 아이들은 친척 집에 얹혀살며 고아 아닌 고아의 삶을 살아야 한다. 말이 친척이지, 머슴처럼 사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창 2:21~25)
하루는 성경을 보다가 이 구절이 무척 은혜로웠다. 부부는 한 몸이라고 했으니 한 몸을 둘로 쪼개면 죽음밖에 없는 것이다.
구원받은 우리 교회 형제 자매들 대부분이 앞에서 이야기한 형제와 비슷한 관념을 가지고 있기에 가정에 문제가 많고 불행하게 사는 것을 보면서 부부 모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곧 한 달에 한 번씩 부부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또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갈등이 있기에 부모와 자녀가 함께하는 모임도 종종 가졌다. 그런 모임들을 통해서 형제 자매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씩 하나씩 세워져갔다. 세상에서 살면서 배워 알던 관념들이 관념들이 자연스럽게 하나하나 마음에서 빠져나갔다. 하나님의 말씀이 형제 자매들의 마음에 흘러들어가 그들의 사상이 바뀌고 마음이 바뀌고 삶이 바뀌어서 행복해졌다. 그리고 비로소 참 부부, 참 가정을 이루는 것을 보았다.

 
많은 형제 자매들이 구원받고 교회 안에서 행복을 찾았는데, 그 가운데 뤽 분디 형제 부부의 간증을 소개한다.
 
 

 

 

스물아홉 살의 청년과 열일곱 살의 소녀
나는 카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며 자랐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찾아와 야운데 1대학을 자퇴한 후, 사업도 하고 석공 일도 하면서 삶의 터전을 일궈나갔습니다. 스물아홉 살이 되어, 문득 내가 아이를 낳는 것이 다른 젊은이들에 비해 굉장히 늦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곳에서는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아이를 낳고 살다가 형편이 되면 결혼식을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살다가 헤어지는 경우도 있고요.
얼마 후, 열일곱 살의 여학생 미나를 만나기 시작했고, 아이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미나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임신하는 바람에 부모님과 상의 없이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그냥 나와서 나와 같이 살기 시작했습니다. 장인어른은 딸이 임신했기에 딸이 나와 사는 것을 허락했지만 태어날 아이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라고 했습니다. 그때 나는 야운데에 있는 어느 초등학교에서 35,000세파(약 75,000원)의 월급을 받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3년이 흘러 약혼녀(카메룬에서는 결혼식을 하지 않고 함께 사는 여자를 다 약혼녀라고 부른다)는 벌써 세 번째 임신을 했고, 나는 가족을 부양하기에 월급이 충분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 학교를 그만두고 전에 하던 석공 일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일거리가 많지 않아서 삶이 조금씩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선교학교에서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어렵게 살던 중에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복음은 하늘에서 내리는 단비 같았습니다. 약혼녀 미나는 나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교회에 같이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구원받은 후 형편이 금방 좋아지리라 생각했지만 나아지는 것은 없었습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약혼녀는 장모님의 허락을 받아 처가로 가버렸습니다. 나는 그녀를 돌아오게 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지만 그녀는 내가 다시 돈을 벌기 시작하면 오겠다고 했습니다. 처가 식구들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나는 아무도 없는 방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목사님께서 내가 처한 형편을 아시고 날마다 교회에 가서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아마도 죄를 짓게 될 내 마음을 읽으셨던 것 같습니다. 당시 카메룬 교회는 그다지 크지 않아서, 낮에는 교회에서 지내고 밤이 되면 교회에 잠잘 곳이 없어서 10시쯤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했습니다. 그런 삶이 계속 이어졌다면 나는 분명히 다른 여자를 찾아 그 여자와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사를 가면서 교회 안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고, 몸과 마음이 보호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나는 선교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약혼녀에게서 둘째 아이가 말라리아로 죽었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목사님은 한 형제와 함께 가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처가가 있는 시골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아이를 이미 땅에 묻은 후였습니다. 마음이 많이 아팠지만 약혼녀 뱃속에 있는 셋째 아이를 생각하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약혼녀는, 처가 식구들이 다음날 자신을 유럽에 보내준다고 하여 셋째 아이를 이미 낙태시킨 뒤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더 어려웠습니다.
나는 목사님의 허락을 받고 약혼녀를 야운데로 데려오고 싶었지만 그녀는 오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냥 돌아와야 했지만 하나님은 내게 이미 이사야 49장 1~23절 말씀을 약속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네 자녀들은 속히 돌아오고 너를 헐며 너를 황폐케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사 49:16~17)
처가 식구들은 내가 가족을 한국에서 온 이상한 종교단체에 팔아넘겼다고 핍박했고, 나는 몹시 고통스러웠습니다. 내 곁에 아무도 남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하지만 이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을 되새겼습니다. 말씀이 내 마음을 일으켜 주었습니다.
그 후로도 약혼녀를 야운데로 데려오려고 했지만 그녀는 아버지가 계신 다른 도시로 가버렸습니다. 목사님은 나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보자’고 하시며 마음에서 내려놓으라고 하셨습니다.
6개월 후, 약혼녀는 가족들과 많은 갈등을 겪고 일도 하지 않아 살기가 힘들어지자 나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나는 두알라에 전도여행을 가 있어서 편지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여섯 번째 편지까지 보냈지만 답장이 없자, 약혼녀는 어머니가 쫓아냈다며 밤 10시에 교회로 직접 찾아왔습니다.
이후 약혼녀는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고, 목사님께 교회에서 지낼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목사님은 여러 번 성경 말씀으로 그녀와 신앙 교제를 나누셨고, 마침내 선교학교에서 나와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이사야 49장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내가 아내와 하나가 될 수 있구나!’
8개월 간의 별거 후에 우리는 다시 함께 지내게 되었고, 1년 6개월 후 교회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이틀 후, 목사님은 우리 부부를 음푸 지역 교회의 전도자로 보내셨습니다. 음푸에서 사역하면서, 나는 아내를 다 용서했고 아내를 마음으로 받아들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내가 임신해서 셋째 ‘이삭’이 태어나면서 더욱 기뻤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나는 사랑이 아닌 서로의 욕망이 우리 부부를 이어주는 끈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성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아내와 살고, 아내는 자기를 지켜줄 사람이 필요해서 나와 살고 있었습니다. 사랑이 없는 우리는 서로의 잘잘못을 다시 들먹이면서 다투기 시작했고, 상대에게서 흠과 실수를 꼬집어내려고 했습니다.
나는 나대로 틀린 것이 없었고, 아내는 아내대로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한치의 기울어짐도 없이 팽팽했습니다. 이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마음뿐 입을 열지는 못했습니다. 내 아내는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아내가 아니라고 계속 불평했고, 아내는 내가 자신에게 맞는 남편이 아니라고 불평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중, 야운데 교회에서 부부 모임을 갖는다는 소식을 듣고 참석했습니다. 모임에서 말씀을 들으면서 ‘부부’라는 개념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항상 내 기쁨과 유익을 구하는 사람이었는데, 아내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 남편의 도리임을 알았습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 5:25~28)
이 말씀 안에서 그동안 부부생활을 잘못 해 왔음을 발견했습니다. 우리 부부 안에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나는 내가 원하고 바라는 여인상을 마음에 세워놓고 아내를 그 여자와 비교하면서 살았습니다. 아내를 그 여자에게 맞춰가려고 했습니다. 내 마음에 들어 있는 그 이상형의 여자와 결별하고 진짜 아내를 마음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쪽 마음에서는 여전히 아내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인간이 스스로 완벽해져서 천국에 가려고 하는 것처럼 어떤 행위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말씀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수준을 높여서 내 기대에 맞추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낮추어서 아내에게 들어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연약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처럼 말입니다.
‘아, 이렇게 해서 내가 아내와 하나가 될 수 있구나! 내 옳음과 내가 원하는 것을 버려야 하는구나!’
부부 모임에 참석하면서, 그동안 지혜롭다고 믿었던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가죽옷을 입고 있을 때 벌거벗은 모습이 보이지 않은 것처럼
그 후, 나는 아내에게 한 번도 말해본 적이 없었던 나의 연약한 모습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도 자신의 연약함을 나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번은 교회에서 어느 아가씨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가씨가 말씀을 잘 들어 신이 나서 계속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나에게 전도를 그치는 게 좋겠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아내는 그 아가씨가 말씀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나는 아내의 말을 믿고 말씀 전하는 것을 그쳤습니다. 그러자 그 아가씨가 독기 서린 눈을 하고 아내에게 대들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와는 전혀 다른 표독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일은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서로 자신을 세울 때 나누어졌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부인할 때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함께 전도를 다니면서 말씀 앞에서 하나로 연합되었습니다. 신기한 일이 있습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과 멀어지면 아내의 흠과 연약함이 눈에 쏙쏙 들어오고, 우리 부부가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에 잠겨 있는 동안에는 서로의 연약함과 흠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가죽옷을 입고 있을 때 벌거벗은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 부부도 예수님을 바라보는 동안 각자의 욕망이 힘을 잃고 우리 마음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을 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