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 이헌목 (기쁜소식양천교회 목사)
  • 승인 2013.10.15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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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삶

사면과 집행유예
법률 용어에 ‘사면(赦免)’과 ‘집행유예(執行猶豫)’가 있습니다. 사면은 국가 원수의 특권으로 형(刑)을 면제하고 그 사건에 대하여 재판을 청구하는 일을 소멸시키는 것이고, 집행유예는 피고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후 형(刑)의 집행을 보류하여 일정(유예) 기간 동안 죄를 짓지 않으면 선고한 형(刑)의 효력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형이 집행되기까지 유예 기간을 살고 있습니다. 그 끝에는 반드시 사형이라는 형벌이 집행됩니다. 유예 기간 동안 잘 살았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사면 소식을 듣고 하나님의 그 말씀을 믿지 않으면 반드시 사망이라는 형의 집행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듭난 성도(聖徒)는 이 땅에 사는 유예 기간에 하늘로부터 주어진 사면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사형 판결을 받고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가던 우리가 대(大) 사면을 받아 하늘의 생명을 얻은 자들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뤄진 완전한 사면
구원받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에서 우리 죄가 사면된 사실을 알고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사탄이 주는 생각을 따라 살면서 십자가에서 이뤄진 역사를 집행유예 정도로 삶에 적용시켜서 자유와 평안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항상 잘하려는 조바심 속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삽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우리 죄가 사면되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감사하고 기쁨을 주는 소식인지 모릅니다. 십자가에서 사면된 성도의 거룩함은 이 세상의 어떤 더러운 것과도 섞이지 않고, 절대로 더럽혀지지 않으며 파괴되지 않는 온전한 것입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
그렇기에 성화(聖化)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온전케 하셨다는 이 말씀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이런저런 이론으로 이 말씀에 교묘하게 흠집을 내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 마음에 짐을 질 뿐입니다.
성도는 십자가에서 완전한 사면을 받았습니다. 설령 우리가 어떠한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노력해서 벗어야 할 저주가 더 이상 없고, 십자가의 효력이 무효가 되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 성도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완전한 사면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예수님께서 이미 다 받아버리셔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순결하고 거룩한 하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대로 두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눅 13:8)
누가복음 13장에 나오는 ‘포도원에 심긴 무화과나무의 비유’에서, 주인이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자 과원지기에게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사형선고를 내립니다. 그러자 과원지기가 주인에게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하고 말하는데, 그것은 ‘열매를 잘 맺으면 살리고 못 맺으면 버릴 테니 금년에도 두고 보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말 속에는 엄청나게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찍힘을 당할 무화과나무에게 참혹한 형의 집행을 일 년 동안 미루어 주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절대로 찍힘을 당하지 않도록 살리는 놀라운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대로 두소서’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압히에미’로, 그 뜻은 ‘용서하다, 사면하다, 버리지 않고 놔두다’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형을 당하기 위해 집행 장소로 끌려가는 사형수에게 “당신은 사면이요!”라고 외치는 소리와 같습니다. 그대로 두소서(압히에미),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얼마나 감격스러운 말씀입니까!
‘압히에미’라는 단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셔서 외치신 말씀 중에도 나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
예수님이 하나님께 저희를 사하여 달라고 외치실 때, ‘사하여 주옵소서’란 말이 바로 헬라어로 ‘압히에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사형을 받아 마땅한 자들에게 “저들의 죄를 사면해 주옵소서!”라고 하나님께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단어가 무화과나무에게 똑같이 쓰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포도원에 심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과원지기가 주인에게 ‘형의 집행을 1년간 미루어 주시면 잘 해보겠습니다’ 하고 간청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1년이란 시간 동안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참혹히 찍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처럼 성도가 선한 열매를 맺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성화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는 과원지기에 의해 찍힘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의 허물과 죄가 온전히 씻어져서 하나님이 다시는 우리 죄를 기억함이 없는 완전한 사면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거름이 되셨다
물질이 죽어서 썩음으로 말미암아 생성되는 에너지를 가진 것이 ‘거름’입니다. 거름은 죽음이 함의된 단어로, 죽음으로 다른 생명을 살리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과원지기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위해 땅을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겠다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셔서 거름이 되셨습니다. 주님의 죽음이 거름이 되었고, 우리가 그 거름을 양분 삼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명의 열매를 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과원지기가 찍혀야 할 무화과나무를 위해 때를 따라 물을 주며 항상 보호하여 찍히지 않게 하며, 주인이 받으실 만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상해하지 못하게 하리로다.”(사 27:3)

오직 과원지기에 의해서
신앙의 열매는 우리가 맺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악한 나를 발견하고 과원지기의 손길만을 바라보아야 산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과원지기인 예수님의 은혜로 생명의 열매를 맺는 무화과나무인 것을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서 어떠한 일에도 흐뭇한 마음을 가질 수 없으며,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실상은, 우리는 다 찍힘을 당해야 할 무화과나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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