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몸과 나의 영혼을 살리신 하나님
나의 몸과 나의 영혼을 살리신 하나님
  • 임덕종
  • 승인 2013.11.15 14: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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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간증

 














 

 

 
목에서 핏덩어리가 올라왔다
나는 경상남도 거창의 덕유산 자락에 있는 산촌 마을의 농가(農家)에서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군대를 제대하고 200호 되는 마을의 이장을 했는데, 집안 농사일보다는 마을 일에 신경쓰다 보니 아버지가 몹시 불편하게 생각하셔서 나는 쫓겨나다시피 집에서 나와야 했다. 객지 생활을 몇 년 하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농사를 지었는데, 농협에 빚도 지고 이웃 빚 보증을 섰다가 그것을 갚아야 하는 일도 생기고, 어려움이 많았다. 당시 농촌 생활이 어려워서 농민회를 결성해 정부에 항의하는 활동도 많이 했지만, 활로를 찾지 못하다 보니 전답(田畓)들만 점점 없어져 갔다.
세상 사는 맛을 잃고 사람들과 휩쓸려 다니면서 술에 마시며 지내다 보니 알코올에 중독되고 말았다. 40대 중반부터는 술을 먹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술친구들은 마흔을 넘으면서 하나 둘 죽어갔다. 나도 계속 그렇게 살면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술을 먹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다.
 
그냥 살아서는 도저히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기에, 술이 없는 곳에 가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산으로 들어갔다. 산에서 자랐고 산을 좋아했기에, 사람이 없는 산 속에서 살면 술이 끊어지지 않을까 생각하고 거할 곳을 만들어 산으로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산 속에 있어도 술은 생겼다. 오히려 더 많이 마시기까지 했다.
하루는 피를 토했다. 핏덩어리가 목에서 올라왔다. ‘이제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죽는 게 두렵고 ‘이렇게 죽으면 억울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병원에 실려가서 위를 세척하고 두 달 가량 입원해 지내며 몸을 좀 회복해서 퇴원했다. 그 후로 얼마간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병원에서 다시 술을 먹으면 죽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함께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피를 토하면 대부분 죽는 것을 보았기에 나 스스로도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런데 몸이 조금 괜찮아지니까 술의 유혹을 이길 수 없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면 ‘술을 안 먹어야지!’ 하면서도 술잔에 손이 갔다. ‘반 잔만 먹으면 안 되겠나?’ 하고 조금 먹었다. 그렇게 해도 괜찮으니까 나중에는 두어 잔씩 먹기 시작했고, 다시 술에 빠져 살았다. 그리고 다시 피를 토해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3년 동안 6개월에 한 번씩 피를 토하고, 두어 달씩 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몇 번 하고 나니, 더 이상 나에게 기대를 둘 수 없었다. 그냥 삶을 포기해버렸다. 산으로 들어가서 아무 생각 없이 되는 대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얼굴에는 흰 수염이 길게 자라나, 나이는 40대지만 몰골은 80대 노인 같았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니 거기나 한번 갔다 오자
2002년 겨울, 하루는 산에서 내려와 아는 동생과 함께 마을회관에서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두 아주머니가 다가와서 교회 이야기를 하더니 산에서 수양회를 갖는다며 가자고 했다. 산에서 하는 행사라면, 전에 농민회에서 활동할 때 워크숍에 가면 술도 주고 밥도 주었기에 그것을 생각하고 가겠다고 했다. 산에 다니는 장비가 있었기에 배낭과 침낭을 가지고 교회로 찾아가겠다고 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기에 거기나 한번 갔다 오자는 마음이었다.
아침에 교회에 가려고 버스를 타려고 나가니까 승합차 한 대가 왔다. 교회에서 나를 태우러 온 것이다. 그 차를 타고 기쁜소식거창교회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교회 사람들은 나를 대하는 것이 달랐다. 보통 사람들은 내가 옆에 가면 코를 막고 얼굴을 찡그리며 피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정신이 없기에 우선 술을 한 병 사서 마셨다. 속이 편했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대덕산에 있는 수양관으로 올라갔다. 수양관에서 펼쳐진 처음 보는 광경에 얼떨떨했다. 사람들은 술 냄새가 나는 데에다 수염이 길게 자란 노인 같은 나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걸을 수도 없었기에 식사시간에는 거창 교회 형제들이 옆에서 부축해 주어서 밥을 탔지만 먹지는 못했다. 술을 마시지 않으니까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정신도 어지러워서 ‘무슨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왔나? 면에서 운동회 하러 왔나?’ 하고 생각했고, 목사님이 설교하는 중에 일어나서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하루는 헛것이 보였다. 세 사람이 나를 죽이려고 하며 수양관 밖으로 나를 몰아냈다. 나는 맨발로 수양관 앞에 있는 산으로 달아났다. 세 사람은 10미터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며 계속 쫓아왔다. 그때 산에 눈이 20cm 정도 쌓여 있었는데, 맨발로 몇 시간을 계속해서 산 속을 도망다녔다. 그러다가 날이 점점 어두워져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발을 헛디뎌서 배수관이 설치되어 있는 가파른 곳에서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거기에는 물이 제법 많았다. ‘이러다 얼어죽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물 속은 영하로 내려가지 않으니까 몸을 물 속으로 잠궜다. 나를 쫓아오던 세 사람은 소나무 위에 올라가서 나를 찾더니, 내가 조용히 물 속에 엎드려 있으니까 “에이, 못 찾겠다.” 하고는 사라졌다.
물에서 나오니까 멀리서 불빛이 보였다. 시골 방앗간에 가면 외등을 켜놓기에, 그곳이 방앗간인 줄 알고 ‘저기에 잠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쏟아지는 눈길을 헤치고 발걸음을 옮겼다. 올라가니까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수양관이었던 것이다. “나 좀 살려주세요.”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발에는 양말에 달라붙은 눈들이 단단하게 얼어서 장화처럼 되어 있었다. 내가 없어진 것을 알고 온 곳을 찾아다니던 거창 교회 형제들이 나를 보고는 얼른 옷을 벗기고 물수건으로 닦은 후 이불로 푹 감싸주었다. 기적처럼 죽지 않고 산 것이다. 처음 간 수양회는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교회로 다시 돌아왔다.

교회가 나를 진정으로 불쌍히 여겨 주었다
교회 분들이 ‘저 사람, 한 달 살면 많이 살겠다’ 하며 나를 불쌍히 여겨 주었다. 나를 교회에 머물게 하며, 내가 술을 마시러 나갈까봐 형제들이 교대로 지켰다. 밤에 잠을 잘 때면 형제들이 문의 손잡이에 줄을 묶은 후 그 줄을 자기 몸에 묶어두어서, 내가 나가려고 문을 열면 바로 일어나서 막았다. 어쩌다 몰래 교회를 나가면 성도들이 다 나서서 나를 찾아 교회로 데리고 왔다.
사실, 이 모든 일들이 당시에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나중에 건강을 회복하면서 하나씩 기억난 일들이다. 거창 교회에서는 수양회 기간에 어린이 수양회가 열리는데, 해마다 어린이 수양회에 온 사역자들이 나를 보고는 다 오래 살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는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하나님이 내 몸도 살리셨고, 내 영혼도 살리셨다!
교회에서 사람들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내가 교회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씩 느껴지면서 ‘내가 살았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미 삶을 포기했었는데…. 몸이 조금 회복되니까 교회 분들이 좋아했다. 그들이 진심으로 나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하나님께 10년만 살려 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그 후로 대전도집회를 비롯해 집회에 많이 참석했다. 목사님이 집회에 갈 때마다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나는 구원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성경 말씀을 들었다. 내가 죄인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나는 부모 가슴에 못을 박은 세상에서 가장 나쁜 놈이라고 생각했기에 내가 큰 죄인이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구원을 받지는 못했다. 1년 가까이 구원받았느냐는 질문을 계속 받다 보니 좀 귀찮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죄가 없다고, 구원받았다고 말해버렸다.
2003년 가을, 마산 대전도집회 때였다. 강사인 김성훈 목사님이 로마서 3장 말씀을 전하는데, 그 말씀이 마음에 들어왔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목사님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했다. 나만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착하게 산 사람도, 열심히 산 사람도, 지위가 높은 사람도…. 그때 비로소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그리고 모든 사람의 죄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해결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죄에서 건지셨구나! 그러면 나도 죄에서 건지셨구나!’
모든 사람이 죄를 지은 것처럼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셨는데, 나도 그 모든 사람 속에 속하기에 내 죄도 씻어진 것이 마음에 믿어졌다.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 전에는 억지로 믿으려고 했지만 안 되었는데,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믿음이 생겼다.
‘하나님이 내 몸도 살리셨고, 내 영혼도 살리셨다!’

 
기분이 무척 좋았다. 문득, 내가 아는 원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불쌍하게 생각되었다. 그리고 세상이 새롭게 보였다. 늘 지겹게 보이던 세상이었는데, 풀도 나무도 새롭게 다가왔다. 나는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지냈는데, 구원을 받고 나니까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후 나는 서툴지만 아는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냐?”며 놀라워했다. 한 친구에게 찾아가서는 “너는 참 복이 있다. 구원받은 친구를 하나 두었으니 말이다.” 하고 말했다. 물론 친구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 친구에게 복음을 전해서 친구가 구원을 받았다.

“저 사람이 저렇게 변했다.”
2002년 겨울에 우리 교회를 처음 만난 후 나는 계속 예배당에서 지냈다. 형제 자매들이 나를 위해서 기도하며 마음을 열고 대하는 것을 알았기에 나도 그들과 마음으로 함께하고 싶었다. 그래서 청소도 하고, 교회 일을 내 일처럼 하며 지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덧 몸무게가 52kg에서 62kg으로 늘었다. 목사님이 좋아하시고, 형제 자매들도 좋아했다. 그 즈음에 한번은 대덕 수양관에 차를 몰고 올라간 적이 있는데, 신학생 시절에 나에게 복음을 전해 주려고 했던 한 전도사님이 나를 보더니 사람들에게 “이분이 이렇게 다니는 것은 기적입니다!”라고 했다.
지금은 몽골에서 선교하고 있는 김상수 목사님이 당시에는 함양에 전도사님으로 있었는데, 2004년 초여름 무렵에 하루는 나를 보더니 “형제님, 하나님께 형제님 일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기도했어요.” 하셨다. 그날 나에게 일자리가 생겼다. 읍사무소에서 공공근로처럼 하는 일로, 쓰레기 단속하는 차를 따라다니면서 쓰레기를 치우는 일이었다. 우리 교회의 어느 자매님의 남편이 읍사무소에서 일하는데,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추천해준 것이다.
읍사무소에서 안 된다고 했다. 내가 심한 술주정뱅이였던 데에다 전에 농민회 일을 하면서 읍사무소 앞에서 데모를 많이 주도했기 때문이었다. 공무원들은 나를 잘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은 술 먹으면 감당이 안 돼요.” 하지만 내가 변한 것을 알고 있었던 자매의 남편이 “한 달만 써보고 안 되면 그만두게 하세요.” 하고 말해서 일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한 달이 지나자 담당 부서의 과장이 “저 사람이 저렇게 변했다.”고 자랑을 했다.
일을 시작한 첫날, 강가에서 오물을 주우면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내가 교회에 처음 왔을 때에는 제대로 걷지도 못해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야 화장실에도 갈 수 있었다. 그런 내가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을 보며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했다. 한없이 감사해서 눈물이 흘렀다.
그 일을 몇 년 하다가 읍사무소에서 새 일을 주었다. 공원에 있는 화장실을 관리하는 일이다. 공원 화장실 관리는 쓰레기를 줍는 일처럼 종일 하지 않고 필요할 때만 일하면 되었다. 읍사무소에서 나를 배려해준 것이다. 내가 일해서 받는 월급은 100만 원 정도였다. 사람들은 적다고 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소중했으며, 교회 안에서 여러 모로 요긴하게 쓰이기에 참 좋았다.

나는 이런 마음, 저런 마음을 품지만
구원받은 후, 직장을 얻기 전에 산으로 도망간 적이 있었다. 어느 날 문득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도 건강해졌기에 산에서 살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데 산에서 하루 지내고 나자, 교회의 연세 많은 할머니들이 나를 찾으러 산꼭대기까지 올라오셨다. 그분들과 함께 산을 내려오면서 울었다. 그 후로는 산에서 살고자 하는 마음을 지워버렸다.
한번씩 예배당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은 생각이 들 때면 계획을 세워서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밖에서 친구들을 만나면, 친구들이 “너는 그 교회를 다녀서 살았어.” “그 교회 목사님 대단하셔. 너 같은 사람을 술을 끊게 하고 이렇게 만들어 주시다니 정말 훌륭한 분이야.” 하고 말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마음이 다시 교회의 은혜에 적셔져 내 발로 교회로 돌아갔다.
구원받고 교회에서 생활하면서 마음으로 배운 아주 소중한 사실이 하나 있다. 나는 변하지만 주님은 변치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런 마음, 저런 마음을 품지만 나를 향한 주님의 마음은 일정하다는 사실이다. 변함 없이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 안에서 나는 쉴 수 있었다.

 

“좋다고 하니 다 됐네. 둘이 결혼하세요.”
지난 4월에는 내 생애에서 생각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권수백 목사님이 이동해 오신 후, 내가 혼자 사는 것이 보기에 안 좋았던지 형제 자매들과 의논하면서 나를 장가 보내려고 하셨다. 나에게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기에 교회에서 다 아는 사실을 나만 모르고 있었다. 나는 구원받기 전까지 혼자 살았고 몸도 많이 안 좋았기에 결혼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구원받고
1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도 결혼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야기가 나오기는 했지만 내가 아주 강하게 반대한 후로는 다시 꺼내지 없었다.
우리 교회에 남편을 잃고 혼자 사는 자매가 있었다. 자매의 아이들을 주일학생일 때부터 보았는데, 지금은 그 아이들이 청년이 되었다. 그 자매와 나의 결혼 이야기가 교회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하루는 목사님이 나에게
“문명숙 자매님 어때요?” 하고 물으셨다. “자매님 좋지요.” 하고 대답했다. 나는 우리 교회의 모든 형제 자매들을 좋아한다. 친 형제 자매들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그런 의미로 대답한 건데, 목사님이 갑자기 “좋다고 하니 다 됐네. 둘이 결혼하세요.” 하셨다. 갑작스런 이야기에 어안이 벙벙했다. 목사님은 계속해서 그렇게 몰아가셨다. 나중에 알았지만, 형제 자매들과 함께 그렇게 각본을 짜서 진행한 것이었다.
나는 결혼한다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도망을 갔다. 전화기도 꺼놓고 며칠을 혼자 지냈다. 그런데 우리 교회 장로님과 한 형제님이 내가 있을 만한 곳을 수소문해서 나를 찾아오셨다. 어른이 찾아왔으니 더 버틸 수가 없었다. 장로님과 이야기하면서 정신이 들었다. 나는 내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나를 정말 결혼시키고 싶어하는 교회의 마음을 볼 수 있었다. ‘내가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결혼하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교회가 기뻐하는 대로, 교회가 하는 대로 마음에서 받을 수 있었다.
내가 마음을 바꾸자 온 교회 사람들이 좋아하고 기뻐했다. 할머니부터 주일학생까지 다 기뻐했다. 내가 언제 결혼할지 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기뻐하는 결혼을 내가 왜 안 했던고?’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교회뿐만 아니라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기뻐했다. 먼 곳에서 축하한다고 전화가 오기도 했다. 자매의 두 아들도 기뻐했다.
내가 결혼하던 날, 온 교회가 함께 즐거워했다. 하나님께 10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어느덧 10년의 세월이 흘러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내가 전혀 생각지 않았던 새 삶을 시작하게 하신 것이다.
결혼하고 아내와 함께 살아 보니 결혼을 아주 잘한 것 같다. 아내가 나를 잘 섬겨 주어서 고맙기도 하다. 나보다 두 살 아래인 아내는 어떤 때는 아이 같고, 어떤 때는 호랑이 같다. 나는 그 모든 것이 좋다. 아내도 나와 결혼한 것을 기뻐해서 좋다.

 

나에게 바람이 있다면…
내가 보기에 좋은 것들을 따라서 살았던 날들은 가치 없는 시간이었다. 나는 허황된 생각에 사로잡혀서 시간을 허비했고, 나를 망쳤다. 지금도 생각해 보면, 나를 이끌어 주는 이가 없으면 어떤 길을 가야 할지 찾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세상에 많은 것들이 우리를 이끌어 주지만, 나에게는 나를 구원의 길로 이끌어준 교회가 있어서 감사하다. 인생에서 가장 큰 복인 구원, 그 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 행복하다. 교회 안에서 형제 자매들과 가리는 것 없이 마음으로 소통하면서 사는 것이 좋다.
나에게 바람이 있다면, 우리 가족이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나로 인해 많은 아픔을 겪으셨던 아버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듣고 돌아가셨다. 내가 구원받은 후 셋째 동생의 아들 셋을 교회에 데리고 다녔는데, 그때 아이들이 주일학교에서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다. 청년이 된 아이들이 지금은 교회에 나오지 않고 있는데, 그 아이들이 IYF 활동과 굿뉴스코 봉사를 통해서 다시 교회와 연결되기를 소망한다. 첫째 동생의 아내도 복음을 듣고 교회에 나오다가 지금은 바빠서 오지 못하고 있는데, 제수씨도 다시 교회에 나오기를 소망한다. 그 외의 가족들도 하나님의 품안에서, 교회 안에서 함께 행복하게 살게 되기를 소망한다.

 
지금 내 나이 쉰 여덟이다. 살아온 지난 날을 돌아보면 감사한 것이 많다. 그 가운데 가장 감사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약하게 하셔서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신 것이다. 내 인생을 붙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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