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팔리의 행복했던 사람들
장팔리의 행복했던 사람들
  • 박민희 편집장
  • 승인 2014.02.04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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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 성도를 찾아서

 

경남 거창군 장팔리. 거창 장(場)에서 8리 떨어졌다 하여 이름 붙여진 동네. 그곳에 살던 소년 심재열은 이제 예순 아홉의 할아버지가 되었다. 2014년 1월 어느 날, 기자는 기쁜소식선교회 수양관(김천시 대덕면 소재)에서 수양회에 참석한 심 형제님과 함께 차를 타고 장팔리로 향했다. 형제님은 40여 년 만에 장팔리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슬픔에 젖어 살던 소년
장팔리로 가는 길에 심 형제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었다.
“경남 합천의 하늘만 보이는 산골에서 태어나 열 살까지 그곳에서 살았는데, 동생 하나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앉아서만 지내다가 일곱 살에 죽었어요. 그 동생이 너무 불쌍해서 어린 제 가슴이 아렸지요. 그 후 제가 열 살 되던 해에 합천에서 장팔리의 외딴 곳에 있던 어느 과수원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아버지가 과수원지기가 되신 거지요. 그곳에서 또 두 동생을 잃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 때 전염병이 하루 사이로 두 동생을 앗아갔습니다. 죽은 동생들이 너무 불쌍하고, 슬프고,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지요. 왜 사는지, 소망도 없이 살았어요.”

장팔리교회 어느 여학생의 편지
소년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양복점 보조로 들어가 일을 시작했다. 늘 공부하지 못한 게 한이었는데, 어느 날 항상 같이 다니던 친구를 통해 ‘장팔리교회’에서 야학(중학교 과정)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른 양복점에서 일하던 그 친구와 함께 교회를 찾아가 열심히 배웠다. 예배에도 참석하면서 예수님을 믿을 마음이 일어났다. 그런데 50명으로 시작한 야학은 몇 달이 못 되어 학생이 점점 줄더니 나중에는 10명 정도만 남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교회를 인도하던 전도사는 더 이상 목회를 할 수 없다고 판단해, 다른 곳에 교회를 지어 그곳으로 가버렸다. 장팔리교회에는 목회자 없이 10명이 모여 지내고 있었다. 그때 한 여학생이 수양회에 함께 참석해서 알게 된, 압곡동에 있던 박옥수 전도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오늘은 주일인데, 전도사님은 안 오시고 아이들만 앉아 있다가 돌아갔습니다. 제 마음이 너무 아파서 편지를 드립니다. 허락되시면 장팔리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편지를 받은 박옥수 전도사는 학생들이 말씀을 듣지 못하고 그냥 돌아간다는 사실에 견딜 수 없는 안타까움을 느껴 장팔리교회에 가기로 마음먹는다. 압곡동에서 장팔리까지는 20km 남짓 되는데, 박 전도사는 차비가 없어 걸어서 장팔리교회에 가서 말씀을 전하고 이튿날 다시 걸어서 압곡동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두 곳을 오가며 말씀을 전하던 박옥수 전도사는 얼마 후 장팔리교회에서 지내기로 한다.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이 흐르던 곳
1964년 5월, 심재열은 박옥수 전도사를 처음 만났다. 키가 작고 초등학교를 2년 늦게 들어간 데에다 호적도 2년이 늦어, 열 아홉 살이었지만 열 일곱 살 소년처럼 살던 때였다.
“당시 우리는 구원받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죄인인지도 몰랐어요. 신앙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요. 전도사님이 오셔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시기 시작했어요.”
6월 어느 주일, 박옥수 전도사는 예배를 마친 후 심재열과 그의 친구를 앉혀 놓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두 사람은 마음에 복음이 임해 구원을 받았다.
“내 죄가 다 씻어졌다는 사실이 믿어졌어요. 아무 소망 없이 살다가 구원을 받으니까 정말 기쁘고 행복했어요. 당시 저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성경이 어떤 책인지도 몰랐어요. 그런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어 천국에 간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날부터 심재열 형제는 매일 저녁 교회에 갔다.
“퇴근하면 집에 들렀다가 무조건 교회로 갔어요. 주일에는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고요. 교회에서 지내는 것이 좋고, 재미있고, 행복했어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듣고 가족이 구원받겠다는 소망도 생겼고요.”
당시 장팔리교회의 성도들은 청년과 어른 서넛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나이가 어렸다. 학생들, 공장에서 일하던 소년 소녀들…. 그들 대부분이 밤이면 교회로 모였다. 교회에 와서 지내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함께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이 하루 동안 행하신 일들을 간증하고, 말씀을 나누었다.
“그때 우리 마음이 순수했어요. 먹을 것이 없던 시절이지만 가끔 누가 삶은 고구마를 가지고 와서 함께 나눠먹기도 했지요. 주일에는 예배를 마치고 전도사님과 함께 거창경찰서 유치장에 전도하러 갔어요. 우리가 연습한 찬송을 부르면 전도사님이 말씀을 전하셨지요. 집집마다 전도도 다녔고요. 전도사님이 처음 장팔리에 오셨을 때는 복음을 아는 사람이 전도사님에게 편지를 쓴 여학생 정도였는데, 전도사님이 복음을 전해서 한 사람 한 사람 구원을 받았어요. 사람들이 구원받을 때마다 먼저 구원받은 우리는 ‘누구 구원받았어!’ 하며 기쁘고 즐거웠지요. 네 명의 제 동생들 가운데 두 동생도 복음을 듣고 교회에 나왔어요. 저도 전도사님처럼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구원받는 아이도 있었고요.”

 
 
열 아홉 심재열 형제의 눈에 비친 박옥수 전도사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목사님은 변한 게 없어요. 늘 성경을 읽고, 성경을 이야기했어요. 가끔 내가 잘못된 이야기를 하면 눈을 부릅뜨고 야단을 치셨어요. ‘아차!’ 싶어서 정신을 차렸지요.”

 
물고기들을 얼음장 밑에서 얼어죽지 않게 하신 하나님이…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먹을 것도 별로 없고, 겨울이면 난방도 변변치 않았다.
“당시 우리 집은 너무 가난해서 음식을 먹고 배부르다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더 먹고 싶지만 먹을 게 없었지요. 일해서 받은 월급 몇 푼도 집에 가져다주면 용돈을 받은 적도 없고요. 그러니 교회에 헌금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어요. 나이도 어려서 전도사님이 뭘 먹고 지내는지에 생각이 미치지도 않았고요. 나중에야 어머니에게 이야기해서 전도사님에게 보리밥을 조금 갖다 드리기도 하고, 동생이 열무김치를 갖다 드리기도 했지요. 가을에 과수원에서 사과를 조금 따다 갖다 드리기도 했고요. 저뿐 아니라 교회에 나오던 사람들 대부분이 가난한 데에다 어려서 전도사님이 어떻게 사는지는 생각지 못했어요. 자주 굶으셨을 거예요. 겨울에 덮을 이불이 없어서 찬송가를 적은 괘도를 덮고 잤다는 이야기도 나중에 듣고야 알았지요.”

 
이듬해에는 심재열 형제와 그의 친구, 그리고 다른 한 형제가 밤이면 박 전도사와 함께 예배당에서 지냈다.
“우리 집이 단칸방이어서 지낼 곳도 마땅치 않았고 전도사님과 함께 지내는 것이 좋기도 해서 저녁 모임을 마치면 예배당에서 함께 잤어요. 아침에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출근했지요.”

 
구원받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더해져 장팔리교회는 성도가 늘어 갔다. 형제 자매들의 믿음도 점점 자라나 교회가 더욱 아름다워져 갔다. 박옥수 전도사와 형제 자매들은 여전히 매일 모여서 찬송하고 간증하고 말씀을 나누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헤어져야 할 시간이 찾아왔다. 1965년 10월에 박옥수 전도사가 군에 입대하게 된 것이다. 인도자를 떠나보내는 성도들도 아쉬웠지만, 박 전도사 또한 ‘이곳에서 3년만 더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을 만큼 장팔리교회를 떠나는 것에 아쉬움이 컸다.
“많이 섭섭했지요. 다행스러웠던 것은 바로 다른 사역자가 오셨어요. 전도사님이 군대에 가신 후, 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생들과 함께 예배당에서 잠도 자고 기도도 하면서 전도사님이 살았던 삶을 흉내내 보기도 했고요.”
다시 1년이 흘러, 1966년 가을에 심재열 형제도 장팔리를 떠났다. 당시 구원받아 장팔리교회에 나오던 형제 자매들도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삶의 굽이굽이마다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해

 
심재열 형제는 인천시 부평에서 2년여를 지내다가 1970년 스물 다섯의 나이에 군에 입대했다. 입대를 앞 두고 가족이 장팔리에서 부산으로 이사했다. 심 형제가 군대에 있는 동안 부산에 교회가 세워져(부산대연교회의 전신) 제대하고는 그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담임 목사님의 중매로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다.
“딸과 아들을 두었는데, 교회 안에서 잘 자랐어요. 생활이 넉넉지 않아 학원에 한 번도 보내지 못했지만 공부도 잘했고, 잔병치레 없이 잘 컸지요. 간호학과를 졸업한 큰딸은 간호사로 일하다가 목회자와 결혼해서 지금은 기쁜소식함안교회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박창규 목사, 심은실 사모). 아들(심성진 집사)은 영상선교부에서 일하다가, 미국에 영상선교 일이 시작될 무렵인 2000년 2월에 결혼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지금까지 미국 영상선교 일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심 형제님은 아들을 장가보내면서 자꾸 눈물이 났다고 한다.
“하나님이 우리 아이들을 잘 길러 주시고 복된 결혼을 허락하신 것이 너무나 감사해서 계속 눈물이 나더라고요.”

 
시간이 훌쩍 흘러 어느덧 예순 아홉의 할아버지가 된 심재열 형제님. 지난 날들에 대해 “어려움도 많고 힘든 시간도 많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잘 살았습니다. 어머니도 구원받고 돌아가셨고, 여동생들과 조카들도 구원받아 교회 안에서 쓰임받고 있어서 감사합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제 삶의 굽이굽이마다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했음이 보입니다.” 하고 말한다. 특별히 며칠 전에는 사위(박창규 목사)의 부모님을 모시고 수양회에 함께 참석했는데, 사돈 내외가 복음반에서 말씀을 들으면서 구원을 받아 행복하다고. 형제님 아내의 가족들도 구원받아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라시아스 합창단의 소프라노 솔리스트 박진영은 처제의 딸이기도 하다.

50년 전 모습 그대로
 
수양관을 출발한 차가 드디어 장팔리교회에 도착했다. 심 형제님은 감회가 남다른 것 같았다. 장팔리교회는 50년 전의 모습을 아직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교회에서 자고 아침이면 세수하러 갔던 시내는 아직도 교회 뒤편에 옛날 그 모습 그대로 흐르고 있었다.
“더듬어 생각해 보니, 예배당 마당에 작은 동산이 있었어요. 꽃을 심어서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피었지요. 그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제가 교회 울타리에 포플러를 심었는데, 그 나무들은 다 뽑혀지고 없네요. 그때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형제 자매들이 보고 싶네요.”
심재열 형제님은 예배당을 둘러보고, 예배당 뒤편 언덕 너머에 있는 개울을 걸으며 “여기서 세수 많이 했지요” 하고 말을 건넸다. 50년 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개울물은 졸졸졸 정겨운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문득, 너무 추워서 얼어죽을 것만 같은 두려움에 떨던 스물 한 살의 청년이 개울에 나와서 세수를 하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청년이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은데, 시간은 어느덧 50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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