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35) - 진리를 사랑한 순교자, 얀 후스(Jan Hus) Ⅰ
교회사(35) - 진리를 사랑한 순교자, 얀 후스(Jan Hus) Ⅰ
  • 이한규 (기쁜소식동서울교회 목사)
  • 승인 2014.02.04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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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35회)

 

보헤미아의 그리스도인들
오늘날의 체코공화국 일대인 보헤미아에는 9세기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그 후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박해를 만나 쫓겨난 많은 왈도파(Waldenses)와 알비파(Albigenses)들이 보헤미아로 피했다. 그들은 은밀하게, 그러나 부지런히 활동했다. 보헤미아는 왈도파의 주요한 거점 가운데 하나였다.
후스가 출현하기 전 위클리프가 성경을 번역하면서 보헤미아 사람들은 자국어로 된 성경을 가지고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교황권이 확장되면서 보헤미아에서 복음을 전하던 사람들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막강한 힘을 가진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보헤미아 말로 공중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교서를 내렸다. 로마카톨릭은 복음의 등불을 끄고 백성들을 암흑 가운데 가두어 두도록 명령했다.
후스가 태어나기 전, 보헤미아에서는 카톨릭교회의 부패와 비행을 공공연하게 규탄하는 사람들이 이미 있었다. 그들의 활동은 많은 사람들의 주의와 관심을 끌었기 때문에 성직자들은 두려움을 느껴 박해를 가했다. 그들은 숲과 산으로 쫓겨가서 예배를 드렸고, 군사들은 그들을 찾아내어 많은 이들을 살육했다. 그리고 얼마 후, 로마카톨릭의 예배에서 벗어나는 예배를 드리는 자는 화형(火刑)에 처한다는 명령이 내려졌다.

 

출중한 학자였던 얀 후스
얀 후스(Jan Hus)는 1372년 남부 보헤미아의 후시넥(Hussinec)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출생지에서 유래했다. 후스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고, 가난에 시달리던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물려줄 만한 재물이 없었다. 그러나 경건했던 그의 어머니는 ‘교육’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가장 귀중한 재산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자식에게 전해주고자 애썼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후스는 시골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프라하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후스는 어머니와 함께 프라하를 향하여 여행길에 올랐다. 두 사람이 프라하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후스의 어머니는 무릎을 꿇고 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은혜를 구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기도가 어떻게 응답될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후스는 그 지역의 최고 명문이었던 프라하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프라하대학은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황제가 세운 대학으로 카를대학이라고도 불렸다. 당시 프라하대학은 유럽 굴지의 대학이었으며, 프라하를 중부 유럽의 학문과 문화의 중심 도시로 만들었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후스는 학업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지만, 정결한 생활과 온유하고 쾌활한 성격으로 여러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로마카톨릭을 열렬히 신봉했던 후스는 교회에서 준다고 하는 영적인 축복 받기를 매우 갈망했다. 한번은 큰 성회에 참석해 참회하러 앞으로 나가서 주머니 속에 있던 돈을 다 바치고 사면(赦免)을 얻기 위하여 행렬에 참여하기도 했다.
프라하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마친 후스는 1398년 모교의 신학교수가 되었고, 29세의 나이에 철학부 학장이 되었다. 1401년에 성직자로 안수받은 후 1402년에 프라하대학의 신학부장이 되었으며, 프라하에 있는 ‘베들레헴 교회’의 설교자가 되었다. 이는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는데, 후스는 그만큼 인정받는 출중한 학자였다. 1409년, 37세가 되던 해에 후스는 프라하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학자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 후 후스는 왕의 도움을 받아, 프라하대학 내에서 이뤄진 투표로 보헤미아를 장악하고 있던 독일인들을 누르고 대학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그러자 독일인들은 후스를 이단이라고 주장하며 라이프치히로 돌아가서 대학을 설립했다. 이 사건은 후스를 민족적 영웅으로 만들었다.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가져다준 위클리프의 저서들
1382년, 보헤미아의 왕 찰스 4세의 딸 앤(Anne)이 영국의 왕 리처드(Richard) 2세와 결혼하면서 옥스퍼드와 프라하 간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앤이 왕비로 있는 동안 보헤미아 청년들이 옥스퍼드로 유학했고, 보헤미아에서는 옥스퍼드와 다른 곳에서 프라하로 들어온 위클리프의 저술들이 읽혀졌다. 옥스퍼드대학에서 명성을 떨쳤던 교수 위클리프는 당시 카톨릭교회의 잘못된 점과 고쳐야 할 점을 지적하는 많은 글들을 썼다. 이 시기에 후스의 가장 친한 친구인 프라하 출신의 제롬(Jerome)이 옥스퍼드에서 공부하고 돌아오면서 위클리프의 저작들을 들여와 후스에게 소개했다.
위클리프의 저서들을 접한 것은 후스의 생애에 큰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후스는 위클리프의 저서들을 읽으면서 저자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임을 알았고, 당시 카톨릭교회가 참된 교회의 모습과는 큰 거리가 있다는 위클리프의 말에 전적으로 찬동했다. 후스는 성경과 위클리프의 저서들을 더욱 세밀히 연구하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
곧 위클리프의 저작들은 프라하대학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대학에 다니는 거의 모든 학생들이 그의 저서들을 탐독했고, 많은 학생들이 위클리프의 사상에 뜨거운 지지자가 되었다. 위클리프의 저서들이 프라하에서 널리 읽히고, 특히 후스와 제롬에게 인정받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연구하자, 프라하의 카톨릭교회 대감독은 새로운 교리가 퍼져나가는 것에 놀라서 위클리프의 저서들이 배포되는 것을 금지시켰다.

부패한 종교의 개혁 촉구
후스가 베들레헴교회의 설교자로 임명되었을 때 일반 사람들은 성경에 대해 거의 무지했다. 또한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서슴없이 악한 일을 행했다. 후스는 그러한 죄악들을 기탄 없이 견책했다. 그는 진리를 역설하며 열정적으로 개혁적인 설교를 하였다. 교회 성직자들의 축첩이나 허례의식에 대하여도 과감하게 비판했다.
후스의 설교는 프라하의 젊은이들과 일반 사람들에게 대대적으로 지지를 받았다. 지지를 받은 만큼 대감독 쯔비넥을 비롯해 로마카톨릭의 성직자들에게는 반감을 샀다. 후스는 보헤미아 말로 설교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켰기에, 보헤미아 사람을 대표하는 투사로 여겨지기도 했다.
후스는 로마카톨릭의 실상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되어 타는 듯한 마음으로 교권의 부패와 교만을 비판했다. 보헤미아 지역에서 그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교황청의 심기는 더욱 불편해졌고, 그의 입을 막을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후스의 비판이 중세 카톨릭교회의 치부였던 면죄부 판매에까지 이르자 교황, 왕, 귀족, 교회의 지도자 등 기득권층에서 그를 강력하게 견제했다. 후스는 로마카톨릭 교회는 ‘거룩하고 우주적이며 참된’ 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며, 카톨릭의 교회론을 전적으로 반격하고 성경적인 교회론을 세웠다.

박사들이 발표한 포고문에 대한 후스의 반박문
로마카톨릭을 옹호하는 박사들이 포고문을 발표하자 후스는 반박하는 조항들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스스로 ‘베드로와 사도들의 참되고 분명한 후계자’라고 하는 교황과 추기경들의 주장은 거짓이다. 이 세상에서 그들 외에는 베드로와 사도들의 후계자가 없다는 주장도 거짓이다. (중략)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그리고 추기경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든 신실한 백성들이 교회의 몸이 된다. 타락한 교황은 결코 거룩한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으며, 물론 그 지체도 될 수 없다. 그는 마귀와 그의 무리의 머리일 뿐이다.
우리가 모든 일에 있어서 교황과 추기경들의 결정을 지켜야 한다는 것도 진리가 아니다. 우리는 그것들이 거룩한 신구약 성경과 일치할 때에만 지켜야 한다. (중략) 교황 중에는 볼로냐(Bologna), 페루기아(Perugia), 아비뇽(Avignon) 등에 거한 교황도 있었다. 고위 성직자들과 거룩한 성경을 그릇 해석하는 자들은 우리가 모든 일에 있어서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 근거가 무엇인가? 우리가 알기에 많은 교황은 이단이었고, 또 어느 교황은 여성이었다.”(존 폭스의 순교사에서)
13세기까지 교황은 로마교황청에 거주했으나, 1309년부터 1376년까지 약 70년간 교황들은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의 론 강(江) 언덕에 위치한 아비뇽에 거주했다. 아비뇽에서 교황들은 호사스런 궁정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가장 추한 방법으로 주교(主敎)의 직분과 면죄부를 팔았고, 신도들에게는 아주 무거운 세금을 강요했다.
이후 1412년 5월, 벤첼 티엠(Wenzel Tiem)은 교황의 명령을 받아 보헤미아에서 면죄부를 팔았다. 이를 비판한 후스는 프라하에서 모든 교회 활동을 금지당하는 처분을 받았다. 후스는 부패한 교회의 기득권 세력과 타협하지 않고 보헤미아 남쪽 지역으로 가서 들판과 광장에서 민중들에게 진리를 설교했다. 이 무렵 후스가 로마교회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 라틴어로 쓴 대작(大作)이 ‘교회론(De ecclesia)’이다.

진리를 말하고, 죽음을 두려워 말고 진리를 사수하라
후스의 원수들은 강력했지만 왕후와 많은 귀족들이 그의 친구가 되었고, 많은 백성들이 그를 지지했다. 사람들은 후스의 순결하고 고상한 교훈과 경건한 삶을 타락한 로마카톨릭교회와 성직자들의 탐욕스럽고 방탕한 삶과 비교하면서 후스 편에 가담하는 것을 명예로운 일로 여겼다.
후스는 위클리프의 글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그의 글들을 체코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는 체코어와 라틴어로 아주 많은 글을 남겼는데, 설교만 해도 무려 3,000편이 넘는다. 후스는 탁월한 신학자였을 뿐 아니라 명설교가였다. 그의 설교는 평민에서 귀족과 왕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청종했다.
후스의 삶과 신앙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진리의 추구였다. 그는 이렇게 역설했다.
“크리스천들이여! 진리를 찾으라. 진리에 귀를 기울이라. 진리를 배우라. 진리를 사랑하라. 진리를 말하고, 죽음을 두려워 말고 진리를 사수하라.”
그에게 있어서 진리의 근원과 표준은 성경 말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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