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밖에 모르고 살았던 사람들
복음밖에 모르고 살았던 사람들
  • 박민희 편집장
  • 승인 2014.03.04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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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 성도를 찾아서 / 최점임 자매

 

1970년 추석 무렵, 두 소녀가 선산에서 김천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 가운데 한 소녀는 당시 열여섯 살이던 최점임이었다. 소녀는 몇 달 전에 구원받아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가득했다. 복음이 말할 수 없이 좋았다. 그 복음을 김천에서 박옥수 전도사가 힘있게 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와 함께 박 전도사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시간은 어느덧 40년을 훌쩍 지나, 올해 예순의 최점임 자매님과 당시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자매님은 오래 전 일들을 회상하며 기억의 앨범 속에서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꺼내 놓았다. 나이가 들어서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무작정 가서 뵙고 싶었어요.”
열여섯 살의 소녀가 친구와 함께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박옥수 전도사를 선산에서 김천까지 찾아간 이유가 궁금했다.
“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하기 시작했어요. 소망 없이 살다가 열여섯 살에 구원받고 말할 수 없이 좋았지요. 당시에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근처에서 복음을 전하는 분들의 소식을 종종 들을 수 있었는데, 박 전도사님이 김천에서 복음을 힘있게 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무작정 가서 뵙고 싶었어요. 그때 제 마음은 복음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요.”
두 자매는, 김천에서 박옥수 전도사와 그와 함께 지내던 형제들이 복음을 위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았다.
“찾아간 그날 전도사님과 함께 김천역에 전도하러 갔어요. 명절 기간이어서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 전도지를 나눠주면서 전도했지요. 새벽부터 말씀 듣고, 성경 읽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그렇게 복음만을 위해 사는 삶이 정말 좋았어요.”
당시 박옥수 전도사는 어느 건물의 2층을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주신 곳이었다.

 
선교 훈련을 받으러
두 자매는 며칠 후 선산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해 겨울에 최점임 자매는 다시 김천으로 왔다. 이번에는 들르러 온 것이 아니라 살러 온 것이었다.
“그때 전도사님이 복음 전도자를 훈련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어서 저도 선교학생으로 입학했어요.”
박옥수 전도사는 자신이 선교사들에게서 훈련받은 대로 선교학생들에게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지 말고 암시도 하지 말며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서 살라’고 가르쳤다. 
“한번은 함께 훈련받던 자매님과 함께 무전전도여행을 떠났어요. 그때 김천에서 선산으로 가던 중에 한 여중생을 만나 복음을 전하고 헤어졌어요. 당시에는 전화가 없었기에 편지로 사연을 주고받았는데, 나중에 신기한 방법으로 우리 교회와 연결되었지요. 지금 기쁜소식김천교회에 다니는 우명숙 자매예요. 그리고 전도여행 중 선산에 갔을 때 엄마를 만났는데, 전도사님이 전도여행을 떠날 때 집에는 가지 말라고 하셔서 도로에서 만났어요. 엄마가 떡국을 끓여 주겠다며 먹고 가라고 하셨지만 그냥 갔지요.”
복음을 위해 사는 삶을 하나하나 배우며 최점임 자매는 행복했다. 그런데 얼마 후 행복한 마음이 동이 나고 말았다. 훈련이 너무 힘들어서 선교학교에서 중도 하차하고 만 것이다.
“지금은 박 목사님이 성도들을 온화하게 대하시는데, 당시에는 칼 같았어요. 시간 아깝다고 밥도 5분 안에 먹어야 했어요. 처음에는 적응이 안 되어서 힘들었지만 조금 지나니까 그렇게 먹게 되더라고요. 적은 시간도 복음을 위해서 쓰게 하셨지요. 기도하고, 성경 읽고, 말씀 나누고, 전도하고…. 그렇게 복음만을 위해서 사는 것은 좋은데, 몸이 너무 힘들어서 견디지 못하고 집으로 가버렸어요.”

교회 없이는 살 수 없어서
얼마 후, 최점임 자매는 다시 김천으로 간다. 마음에는 여전히 복음 외에 소중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힘들어서 선교학교에서 나가긴 했지만 교회 없이는 살 수 없었다. 전에 같이 김천을 찾아갔던 친구 자매와 함께 김천으로 가서 방을 얻어, 기모노 옷감에 홀치기 일을 했다. 박옥수 전도사는 1971년 봄에 결혼하여 부부가 함께 복음을 위해 일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에도 형편이 굉장히 어려웠어요. 제가 선교학교에서 훈련받을 때에는 김치는 구경도 못 했어요. 꽁보리밥을 먹으면 다행이었지요. 굶는 날도 많았고요. 전도사님은 결혼하고도 부부가 자주 굶으셨을 거예요.”

 
“교회에 하루에도 몇 번을 갔어요. 새벽에 가고, 일하다가 낮에도 가고, 저녁에 가고. 시간이 될 때면 낮에 교회에 갔다가 함께 전도하러 가기도 하고요. 박옥수 목사님은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우리가 도움을 많이 준 것처럼 말씀하시지만, 제 생각엔 많은 도움을 드리지는 못했어요. 우리 벌이가 제법 괜찮았고, 생활비 외에는 번 돈을 교회에 다 쓴 것은 사실이에요. 그런데 제 기억에는, 교회에 먹을 게 떨어졌을 때 가끔 종이봉투에 쌀을 한두 되 사가지고 갔던 일 정도가 기억나요. 물론 헌금은 했지요. 아마 성도들이 많지 않던 시절이라 전도사님은 우리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었던 것 같아요.”

 
한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비록 복음 전도자의 길을 걷지는 않았지만, 최점임 자매는 복음 전하는 것을 무척 사모했다.
“전도가 일상이었어요. 버스를 타면 혼자 앉아 있는 사람을 찾아 그 옆에 앉아서 전도했지요. 그렇게 사는 것이 몸에 배어 있었어요. 한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았지요. 전도사님이 그렇게 사시니까 우리에게도 그런 삶이 자연스럽게 흡수된 거예요. 전도사님은 언제 어디서나 복음을 전하려고 하셨고, 우리도 그렇게 살고 싶어했지요.”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전하려고 했지만 구원받는 사람은 많이 일어나지 않았다. 교회가 작다 보니 연결되는 사람도 적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드디어 최 자매를 통해서 구원받는 사람이 일어났다.
“식당에서 일하던 분이었는데, 나보다 예닐곱 살 많은 언니였어요. 그 언니에게 계속 전도하러 갔지요. 처음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지만 계속 찾아가서 이야기하니 마음이 성경 말씀 편으로 끌려 왔어요. 전도사님께 데리고 갔는데,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어요. 언니는 구원받고 교회에서 함께 지냈어요. 나중에 전도사님의 중매로 결혼했는데, 우리 친척 분의 조카며느리가 되었어요. 지금도 종종 만나지요.”

어린이 전도
최점임 자매가 박옥수 전도사를 처음 만났을 때, 박 전도사는 ‘극동전도협회’를 이끌고 있었다. 1968년 군에서 제대한 박옥수 전도사는 선교사가 되고자 했던 꿈을 접고 한국에 남기로 했다. 군대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교회에 다녔다는 수많은 청년들이 구원받지 못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의 현실을 생각하면서 우리나라를 자신의 선교지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여름성경학교를 인도할 교사들을 훈련시켜서 전국의 교회들에 보내 복음을 전하게 하는 것이었다. 1969년 봄에 김천에 간 박옥수 전도사는 그 해 여름에 전국 25개의 교회에 훈련한 교사들을 보내 여름성경학교를 인도하게 했다. 1970년에는 훈련받은 교사들이 23개의 교회에 가서 여름성경학교를 인도했다. 시골 교회에서는 여름성경학교가 교회의 큰 잔치여서 거의 모든 교인들이 교회에 모여 훈련받은 교사들이 전하는 복음을 들었다. 그 해에만 10,000여 명의 어린이와 주일학교 교사를 비롯해 교회 직분을 가진 사람들 200여 명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았다는 내용의 간증문을 교사들이 받아 왔다.
1971년 여름성경학교 교사 훈련에는 최점임 자매도 함께했다. 최 자매는 훈련을 마친 후 다른 두 사람과 한 팀을 이루어 김천 외곽의 황산에 있는 어느 교회로 갔다.
“거창에서 온 자매님, 형제님과 함께 갔어요. 그때 저는 열일곱, 형제님은 열아홉, 자매님은 스물이 조금 넘었지요. 당시에는 많이 배우지 못하고 어렵게 살다가 구원받아 복음의 일을 하려는 청년들이 있었어요. 그들이 박옥수 전도사님을 찾아와서 교사 훈련을 받고 기성 교회들에 찾아가서 여름성경학교를 인도했어요. 우리 팀도 셋이서 제법 많은 아이들에게 찬송과 율동을 가르치고, 성경 말씀과 복음을 전했어요. 아이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았다고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말할 수 없이 행복한 일이었지요.”
“어린이 전도를 하는 동안 연결되어서 구원받은 어른들도 많았는데, 나중에 전도사님이 그 교회들을 방문해 보면 구원받고 기뻐하던 사람들의 마음이 다 죽어 있었어요. 그래서 전도사님이 ‘복음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구원받은 사람들을 모아서 교회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그때부터 ‘극동전도협회’라는 이름을 내리고 교회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어요.”
 

 
그때를 돌아보며
지금은 기쁜소식선산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최점임 자매님. 얼마 전의 일인 것 같은데 벌써 40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버린 당시의 시간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집안에 어려움이 있어서 부모님이 나를 신경쓸 겨를이 없었어요. 그렇게 살다가 구원받고는 복음과 교회밖에 마음 둘 곳이 없었어요. 교회가 전부였지요. 구원받고 김천에서 보냈던 시간들을 돌아보면, 그때 그 시절에만 맛볼 수 있었던 행복이 있었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기쁘고 따뜻해져요. 삶은 어려웠지만 저녁마다 모여서 형제 자매들과 함께 지냈던 날들이 그립지요. 성경 읽고, 기도하고, 말씀 듣고, 전도하고….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제 또래의 친구들과 함께 발레를 준비하면서 웃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 친구들이 보고도 싶고요.”
그리고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이렇게 말했다.
“교회에서 산 날들이 행복했어요. 밖에서 볼 때는 가진 것이 없어서 불쌍하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우리 마
 
음은 정말 행복했어요.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계셔서 행복을 주셨지요. 이제는 그때처럼 살려고 해도 환경이 많이 달라져서 불가능하지만, 지금도 그렇게 살고 싶지요. 세월이 많이 흘렀고 복음을 생각하는 성도들의 마음도 달라진 부분이 있지만 지금도 교회가 있어서 좋아요. 남은 삶도 복음과 함께, 교회와 함께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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